00061 (8) 거세개탁(擧世皆濁) =========================================================================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가 3년 전 사망했었다.”
그의 음성은 흡사 한편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준경은 잠깐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설명을 알아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칼리프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알 무스탄시르는 나이가 많았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왕위를 노린 아들 둘이 있었다. 본토의 이스마일은 차남인 알 무스탈리를 지지했지만, 페르시아와 바빌론, 아나톨리아의 이스마일은 장남 니자리를 지지했다. 치열한 분쟁 끝에 결국, 본토 세력이 이겼다.”
하사신을 니자리파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서 밝혀졌다. 니자리는 어떤 뜻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지한 왕자의 이름이었다. 반대파는 무스탈리파라고 불렸다고 그는 덧붙였다.
“바티니의 산장로(山長老), 하산 사바흐는 니자리를 보위에 올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알라무트에서 이집트까지는 워낙 멀기도 했거니와 본토 세력과 함부로 척을 질 수 없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새롭게 칼리프가 된 알 무스탈리 역시 그들의 유용함을 잘 알고 있기에 손을 내밀었다. 그 강성하던 셀주크 제국이 흔들리고 있었기에 이 기회를 노려 적극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서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알라무트의 존재들을 바티니라 부르지 않았었다.”
산장로, 하산 사바흐는 하사신의 창립자로 알려졌었다. 자세히 알지 못한 옛이야기가 조금씩 밝혀지자 타티키오스와 준경은 흥미롭기만 했다.
“십자군이 들이닥쳤고, 하산 사바흐가 그들과 손잡았다는 사실이 천하에 알려졌다. 그 후 이스마일은 두 패로 갈렸다. 누군가는 그들을 응원했고, 누군가는 그들을 비난했다. 결과인가 과정인가의 문제였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타티키오스는 대립의 근원을 본 셈이었다. 교리도 비슷한 이들이 극한 증오를 품게 된 것은 방법론의 차이였다. 그러나 서로 거리가 멀고 활동 반경이 다른지라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대들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그만큼 바티니와 원한이 깊다는 뜻일 것이다. 진정으로 바티니와 싸울 작정인가?”
“물론이오.”
타티키오스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확답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일을 해결해왔고, 지금까지 그 방식은 유효했다.”
“바티니를 스스로 처리하겠다는 뜻이오?”
장로, 자파르라고 자신을 밝힌 중년인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래바람에 휘말린 하늘은 온통 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파르의 눈빛도 누렇게 물들어 갔다.
“싸울 수 있는 자는 이제 이백에 불과하다.”
타티키오스는 입안에서 ‘그것이 정말이오!’라고 외칠뻔하다가 간신히 눌렀다. 정면과 주위에 모인 자들이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가용 전력의 전부였던 것이다. 한때 수만에 달하는 세력을 자랑하던 그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쇠락했으리라고는 외부의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바레인은 네스토리우스와 수니파가 작당하여 우리의 영향력을 벗어난 지 이 년이 지났다.”
타티키오스는 누런 하늘을 바라보며 올려다보는 장로, 자파르의 표정에서 회한을 읽었다. 자존심 빼면 시체라는 카라미타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선대의 위업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다.”
“나에게 그대들의 전모를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이오? 만약 내가 외부로 나가 이 사실을 알린다면 이곳을 노리는 자들이 제법 있을 것이오.”
“인근에서 알만한 자들은 안다. 그러나 그들은 기다리고 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알면서도 그대들을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단 말이오.”
자파르는 하늘에서 시선을 돌려 다시 타티키오스를 바라보았다.
“먼저 손을 쓰는 자가 가장 손해를 입을 테니까.”
죽어가는 살쾡이를 건드려 상처를 입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들이 자멸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백 년간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사람은 점점 줄어갔고, 고립된 생활 속에서 근친혼이 일어났다.”
준경은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고려의 숙종이 즉위하며 제일 먼저 폐지한 것이 왕실의 근친혼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폐해를 일으켰는지 숙종은 실감한 것이다.
“이제 우리의 실상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데도 우리를 바티니와의 전투에 동참시키겠다는 것인가?”
“이왕 죽을 것이라면 영예롭게 죽고 싶은 생각은 없소?”
자파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대의 선조가 메카를 공격한 후 메카는 카라미타파의 순례를 허락하고 있지 않소. 당연한 일이겠지. 만약 메카에서 죽을 수 있다면 우리를 따라나서겠소?”
준경은 타티키오스의 약속이 허풍처럼 느껴졌다. 이집트 파티마 왕조는 메카 순례를 대신할 성전을 카이로에 건설하기로 하고 대대적인 토목 공사 끝에 알 아즈하르 사원을 세웠다. 그러나 카라미타파는 카이로도 메카도 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들은 믿음만 있다면 성지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위했지만, 세대가 흐르면서 성지 순례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다.
“무슨 자격으로 그대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비잔틴의 힘이 이곳에서도 통한다고 보는 건가?”
“제국의 힘이든 아니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대들이 원한다면 성지를 순례할 수 있도록 명예 회복을 시켜주겠소. 나를 믿으시오.”
준경은 가끔 보면 타티키오스가 정교회 주교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실용적인 관념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실용적인 생각이 그를 비잔틴의 검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타티키오스의 발언은 하사신들이 벌이는 일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결론이 방법에 우선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하마단의 영주를 떠올리고 이런 약속을 한 것일까?’
타티키오스가 아무런 계획 없이 약속을 남발하는 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예상해볼 방법은 그것 하나였다.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우리를 누가 찾아올까 늘 궁금했다. 아니 궁금했다기보다는 돌파구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우리는 신천지를 찾아 나서고 싶었지만, 우리가 이곳을 나서는 순간 우리의 전력은 낱낱이 밝혀질 테고, 이때다 싶은 사냥꾼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날 것이다.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그토록 경멸하던 니자리의 방법을 우리가 답습해야 한다니……. 이제 우리도 변할 때가 되었다.”
“장로! 우리는 스스로 생존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는 장로 자파르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지만 몇몇은 발언이 불만스러운지 힘있게 나서고 있었다. 자파르는 거친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티키오스에게 말했다.
“하지만, 니자리의 방법이 모두 옳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용병으로 고용하지 않겠나?”
“용병?”
“신념을 두고 싸운다는 것은 우리가 바스라를 떠나는 순간 니자리와 같은 길을 일시적이지만 걷겠다는 뜻이기에 의미 없는 일이다. 차라리 베두인처럼 용병으로 그대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지. 대가는 세 가지다. 일천 명이 거주할 수 있는 비옥한 땅과 그 땅을 개척할 동안 필요한 1년 치의 식량, 성지 순례의 보장이다.”
타티키오스는 다시 주변을 훑어 보았다. 찬찬히 다시 둘러보니 대마를 한 것도 배고픔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눈이 퀭하고 깡마른 자들 천지였다. 저런 자들이 이백 정도라고 했다. 베두인은 이천에 가까웠다. 과연 저들이 요구조건만큼 밥값을 할 수 있을지 우려가 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비잔틴이 발휘할 힘은 지극히 적었다. 그렇다는 것은 일이 해결된 후 하마단 영주에게 대가에 대한 반대급부를 주어야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마단 영주는 이런 일까지 염두에 두었을까?
“한 가지는 약속하겠다. 베두인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물러날 것이다. 물론 그만한 대가를 주어야 하겠지만.”
“베두인을 물러나게 할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들은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자들이다.”
베두인이 물러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알라무트가 비록 요새였지만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하사신을 키운 지 십 년을 넘지 못했다. 자객 하나를 키우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금이 필요한지 잘 알기에 알라무트에 있는 인원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들이 무서운 것은 암습이었다.
레이 영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레이와 알라무트의 거리 차를 이용하여 최대한 이른 시간에 공격을 감행할 셈이었다. 준경의 능력을 여러 차례 봐왔기에 과감한 공격을 생각했다.
“드루즈(Druze)를 아는가?”
“드루즈? 그들도 종파인가?”
자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전 칼리프 계승 분쟁에 참여하지 않은 종파는 둘이었다. 우리 카라미타와 드루즈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이스마일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참가하지 못한 이유는 짐작할 것이고 드루즈파의 근거지는 이집트에서 가까운 다마스커스 남부에 자리하고 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카라미타가 이스마일의 본류라면 드루즈는 우리 카라미타와 기독교, 그리스철학이 뒤범벅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잡종처럼 여기지만 그들은 우리를 신성시한다.”
“다마스커스라면 이곳에서 멀리도 떨어져 있군.”
혹시 그들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다마스커스라면 1300km가 넘는 거리였다. 더구나 삼분지 이는 사막을 지나야 하는 험한 여정이었다.
“그곳은 드루즈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일 뿐, 여기저기 흩어져 산다. 그 이유는 드루즈가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베두인도 있다.”
“베두인? 다른 베두인을 참전시키겠다는 뜻인가?”
“비슷하지만 다르다. 베두인에 대해 잘 아는가?”
타티키오스가 대답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자 자파르의 설명이 이어졌다.
“베두인은 엄격한 계급 체계다. 상위 부족과는 혼인할 수도 없어 태어나면 주어진 계급이 평생을 이어진다. 그중 최상급 계급은 투아레그족으로 그중에 드루즈를 믿는 족장의 아이를 내가 축복해준 적이 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신분이 높다고 해서 순순히 신의를 깬다는 것인가? 또한, 20년 전의 일을 그들이 기억하고 있을지도 의문이군.”
“신의가 아니라 계약이다. 지금 우리가 대가를 그대에게 논한 것처럼. 이방인과의 계약보다 우선되는 것은 존경받는 최상급 계급의 중재이다. 대신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들이 섭섭하지 않을만한 재물을 내놓아야 한다. 또한, 20년 전의 일을 잊을 정도로 드루즈의 신앙은 약하지 않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갔다. 만약 자파르의 말대로라면 하사신이 믿었던 베두인이란 방패는 그대로 소멸할 것이 분명했다.
왜 그들에게 지금까지 도움을 받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드루즈는 시아파 베두인 사이에서도 숫자가 매우 적어 보통 열에서 이십 단위로 움직인다고 했다. 계급을 이용한 중재 같은 일은 나서줄 수 있어도 대신 전쟁을 치러주거나 이들을 보호해줄 만한 힘은 없는 셈이었다.
“그들은 항상 유랑을 다닌다고 하지 않았소? 무슨 수로 20년 전에 헤어진 그들을 다시 찾는단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