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0 (8) 거세개탁(擧世皆濁) =========================================================================
말이 땀을 흘리기도 전에 도착한 유적지는 이제 익숙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준경이 앞장을 서자 갑작스러운 기병들 출현에 놀란 순례자들이 분분히 흩어지기도 했다.
민 태조의 거대한 입상에 도착했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별다른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거진 한 시진을 계속 쳐다보았지만, 소득이 없자 일행은 점차 지치기 시작했다. 타티키오스도 처음에는 의욕 가득했던 눈이 점차 포기로 바뀌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고삐를 당겨 터덜터덜 유적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늦은 점심때여서 배들이 출출해진 시점이었는데 유적지 입구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노천 식당들이 몇 곳 마련되어 있었다. 제법 많은 사람이 식사하고 있어서 500명에 가까운 인원이 한꺼번에 식사하기에 알맞은 식당은 없었다. 평소처럼 적당한 곳에 말을 매어두고 간단한 식사를 하기 위해 지나치려는 차였다.
그중 식당 한 곳에서 종업원 한 명이 다가와 타티키오스에게 말을 건넸다.
“바끌리야(al-Baqliyyah)? 바끌리야?”
그의 질문에 타티키오스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바끌리야는 채소를 파는 상인을 가리켰다. 먼 길을 떠나면서 항상 말에는 물과 채소, 고기가 잔뜩 실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식당에서 필요한 채소를 사기 위해 다가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바끌리야? 바끌리야? 바끌리야?”
아니라고 말했지만, 종업원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다.
타티키오스는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종업원은 아닌가 싶어 식당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한바탕 작은 소동으로 끝나고 유적지를 벗어날 때쯤, 타티키오스는 심각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유적지로 향하는 늙은 순례자를 붙잡고 물었다.
“미안하지만, 뭣 좀 물어보겠소. 바끌리야가 채소를 파는 상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오?”
최대한 상냥하게 말을 건넸음에도 늙은 순례자는 복면을 두른 타티키오스의 육중한 위압감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뜻이 맞습니다.”
“혹시 다른 뜻은 없소?”
늙은 순례자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손바닥에 주먹을 내려치며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다른 뜻이라면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저 먼 남쪽에서는 카라미타파를 바끌리야라고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카라미타파?”
타티키오스도 준경도 처음 듣는 종파였다. 그러나 뭔가 실마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시오.”
늙은 순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성실한 대답에 흡족한 타티키오스는 품에 있던 몇 개의 금화를 꺼내 그에게 강제로 안겨주었다.
늙은 순례자가 떠나자 준경과 타티키오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설마 그 종업원이 하마단 영주의 전언이었단 말입니까?”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면 측근 중에 하사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타티키오스는 일단 자리를 옮겨 일행이 식사할만한 곳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는 고민을 거듭했다. 혹시나 함정이 아닐까 우려했던 것이다.
늙은 순례자가 말하길 카라미타파는 이스마일파의 분파였다. 즉, 하사신과 같은 교리를 가진 종교 집단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800km 이상 남쪽에 자리한 바스라 일대를 통치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늙은 순례자가 그들을 말하는 투는 몹시 증오로 가득 찼다. 혹시 종파가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들이 저지른 일들을 듣자 종파를 떠나 증오할 만 하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수니파 왕조에 반기를 들며 남부에서 반란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마다 주변은 피로 가득했다고 하지요. 그들은 메카로 가는 순례객, 외국의 대상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메카를 공격하여 닥치는 데로 성전을 부수고 카바 사원의 고귀한 흑석까지 약탈하여 20년간이나 볼모로 삼아 전 이슬람 세력의 공분을 일으켰던 극악무도한 자들입니다.”
타티키오스가 혀를 찰 정도였다. 카바 사원의 흑석은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날 때 증표로 받았다고 하는 돌로 원래는 하얀색이었으나 인간이 그 돌에 입 맞추고 만지는 과정을 통해 원죄를 흡수하는 역할을 하여 검은색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지는 성물이었다. 사원을 부수고 성물을 훔쳤으니 일반 무슬림이 그들에게 가지는 반감이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바끌리야라고 불리는 이유는 철저한 채식주의를 고집하기 때문에 주로 갖는 직업이 채소 장사라고 했다. 그들의 악행에 비하면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바스라라…….”
늙은 순례자는 그들이 바스라와 바레인 일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바스라와 바레인은 옛 영화는 온데간데없이 숱한 전쟁으로 폐허로 변해 촌동네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고, 그 때문에 다른 영주들이 그곳을 차지하는 것을 꺼리자 카라미타파가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했다.
바스라는 이슬람의 진주라고 불리며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곳이었고 바레인은 그런 바스라에 이르기 전 중계도시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곳이다. 전설적인 우화, 신밧드의 출항지이기도 했던 그곳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는 사실은 타티키오스로서도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하긴 싸울만한 상대는 다 싸웠다고 하니.”
메카를 파괴하고 성물, 흑석을 탈취한 죄를 물어 아바스 왕조가 불같은 공격을 퍼부었으나 카라미타파는 강력한 신념으로 무장하여 그들의 공격을 번번이 막아냈다고 했다. 그리고 오히려 가만히 있던 상대까지 들쑤셨다. 일대에서 존재하는 종파는 오직 자신들만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그것이 인근 바레인에서 근근이 종교를 전파하던 네스토리우스파를 공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 바레인을 기독교 왕국으로 만들며 크게 흥성했던 네스토리우스파는 아바스 왕조의 공격을 받아 크게 쇠퇴했는데 정치적인 세력은 사라져도 여전히 종교는 명맥을 유지하며 언제고 이 지역에 기독교 국가를 다시 세울 날을 꿈꾸고 있던 참이었다.
카라미타파는 중동 이슬람 세력의 거센 공격을 수비하는 와중에도 네스토리우스파를 공격하여 그들을 바레인에서 완전히 쫓아내는 위업을 이뤘지만 결국 남은 것은 잿더미뿐이었다.
외국의 상인들은 발길을 돌렸고, 메카 순례객들은 진로를 바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종교적인 신념만으로 충분히 일대를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지만, 기반 시설이 완전히 파괴된 거대한 땅은 묘지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한 술 더 떠서 사막을 유랑하는 베두인을 공격하고, 인근 자그로스 산맥의 쿠르드 족까지 공격하면서 더욱 궁지에 몰렸지만, 그들은 여전히 독오른 살쾡이 같은 존재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예 그들을 유령처럼 취급하며 바스라 일대를 육지의 외딴 섬 취급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마단에서 바스라까지는 800km 정도의 거리였다. 자그로스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긴 하지만 이곳은 산맥이라기보다는 낙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원 평지가 많고 물이 풍부하여 통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마단의 영주는 왜 그들을 언급한 것일까?”
누가 보아도 비잔틴의 기사들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난 일행이었다. 그런데 종업원이 자신들을 채소 장사로 착각할 수 있었을까? 그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야 하마단의 영주가 자신들에게 던지는 전언이라는 것을 짐작했지만, 왜 하필 악행으로 가득한 그들일까 싶었다. 혹시나 싶어 찾아간 자신들과 그들을 양패구상이라도 시키려는 것일까? 타티키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려면 더 믿음직스러운 방법을 써야 했다.
“고민하지 말고 가봅시다. 흥미도 생기는군요. 대체 어떤 자들인지.”
“자네는 오로지 전투 생각밖에 없군.”
“그들 역시 이스마일의 분파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장군은 저를 따라 알라무트로 가겠다며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지요. ‘적의 적은 아군이다.’라고 말입니다.”
타티키오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맞아. 하마단의 영주는 그것을 노린 것이군. 같은 이스마일의 자식이라도 서로 파가 다르지. 하사신은 니자리파지만 이스마일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지. 그러나 그들은 암살을 자행하면서 공공연하게 이스마일의 자식을 표방하고 있다. 어쩌면 카라미타파가 그것을 불쾌하고 여기고 있을지도 몰라.”
확신이 들었다. 이스마일계 중 무장 투쟁의 선봉에 선 것은 카라미타파였고, 니자리파는 최근 떠오르기 시작한 후발 주자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이스마일의 적자라고 믿으며 메카까지 공격을 감행한 카라미타파라면 니자리파가 이스마일의 자식이라고 외치는 것을 잘한다고 볼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거야말로 독으로 독을 제압한다는 것이로군.”
이백 년 이상 주변 세력에 숱한 원한을 남기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카라미타파의 독기가 어떨지 충분히 짐작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정말로 설득에 응할까 하는 것이었다. 만약 지금의 지도자가 니자리파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함정이 될 수가 있었다. 결국, 하마단의 영주를 믿을 수 있는가로 다시 되돌아왔다.
“만약 하사신이 영주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공격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마단 정계는 영주와 하사신이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위협은 할 수 있지만 죽일 수 없는 이유가 있다던가, 아니면 서로 약점을 잡고 있다던가.”
타티키오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준경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준경의 생각은 폭이 넓어졌다. 확실히 준경의 생각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세. 바스라로.”
그들은 800km의 길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자그로스 산맥이 비록 다른 곳보다 진행이 쉬운 편에 속했지만 그래도 엄연히 고산 지대였다. 종단 거리가 100km에 이르는 고산 지대에서 사흘을 허비하고 바스라 인근에 다다른 것은 하마단을 떠난 지 칠일 째 되는 날이었다.
지나가다 만난 유목민족이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이동한 곳은 온통 폐허로 변한 도시였다. 바다를 향해 경계하며 천천히 이동하자 이곳저곳 무너진 가옥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한참을 가로지르자 그제야 제법 번듯한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바스라가 번화하던 시절 항구를 보호하기 위한 내성쯤 되는 모양이었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바다로 가까워질수록 심해지는 모래바람만 이미 마를 대로 마른 옷자락을 때렸다. 성벽 위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했을 찰라, 준경의 눈빛이 주변을 훑었다. 아까부터 자신들을 주시하던 시선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숫자는 대략 일백 정도로 자신들을 막기 위한 숫자로는 너무 부족했다. 그러나 눈빛이 정상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대마를 복용한 흔적이었다. 전멸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면 껴안고 함께 죽기라도 할 심산인 것 같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떻게 이렇게 하는 행동들이 똑같단 말인가? 준경의 냉소에 타티키오스는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복면을 두른 황금마스크 너머로 쓴웃음을 지으며 동조했다.
“비잔틴이 이곳까지 무슨 일인가? 네스토리우스 정교회는 그대들에게 이단으로 지목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까지 전혀 올 일이 없는 비잔틴 기사들이 잔뜩 출현한 것에 성벽 위의 사내는 몹시 긴장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비잔틴이 이곳까지 올 일이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의 짐작대로 타티키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니자리파를 아는가?”
“니자리?”
사내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들이 자신들을 이스마일의 자식들이라며 외치고 다닌다는 것을 들어보았나?”
사내는 대답 대신 이를 드러내며 분개하는 모습을 먼저 보였다.
“감히 바티니가 이스마일의 자식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가!”
타티키오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티니는 ‘겉과 속에 다른 믿음을 가진 자’를 일컫는 말로 수니파를 치기 위해서는 십자군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하사신들을 비하하는 뜻을 담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들만의 힘으로 지상 낙원을 이뤄내겠다는 카라미타파에게 하사신이란 박쥐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우리는 너희가 바티니라고 부르는 그들과 원한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본거지, 알라무트를 공격하려고 하고 있지. 그런데 그들은 그 일대의 베두인을 끌어들여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다. 알다시피 베두인은 사막에서는 누구도 당해내기 어려운 부족이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다.”
타티키오스는 황금마스크를 가린 복면을 휙 풀었다. 그의 얼굴이 드러나자 성벽 위의 사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 이름을 떠올린 것이다.
“나는 비잔틴의 검, 타티키오스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시해하려 했던 바티니를 쫓아 이곳까지 이르렀다. 그대들 역시 그들과 풀지 못할 숙제가 있을 터, 나와 함께 하지 않겠는가!”
성벽 위의 사내는 타티키오스의 외침에 일순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이미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 수십 명의 인물이 타티키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티니를 공격하겠다고?”
그들 중 가운데 선 이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오십 중반 정도에 깡마른 체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눈만은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