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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59화 (59/257)

00059  (8) 거세개탁(擧世皆濁)  =========================================================================

그날의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더 돌아보고 싶었지만, 황야의 밤은 일찍 찾아왔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곳이 하마단의 중심가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자리에서 2km 남서쪽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마지막으로 들었다.

그런 황야에 민국실록이 존재할 수 있을까? 오늘 다녀온 소감은 혼자 힘으로 그 일대를 모두 뒤져보기 위해서는 긴 시간을 요하리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회합 장소는 넓어도 너무 넓었다.

다음 날, 안내원 없이 홀로 그 장소로 나아갔다. 타티키오스가 돌아오면 곧 떠나야 할 상황이니 오늘이 이곳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인근을 돌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하나를 깎아 만든 부조와 석상, 알 수 없는 글자들, 순례자들이 남긴 말라빠진 꽃다발들이었다.

‘인연이 닿지 않은 것인가?’

소동파 같은 인물이 함께 있었다면 단서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준경은 처음으로 무예의 부족함 외에 아쉽다라는 감정을 느꼈다.

흑우와 함께 터덜터덜 걸어 성문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린 소년이 대마를 복용하는 것을 보았다. 황홀감이 종교적 체험과 비슷하다는 말에 이 지역에서 대마를 복용하는 자를 찾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린 소년이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보자 왠지 기분이 싸해졌다.

저런 소년들을 납치해 대마로 중독시켜 자객으로 활용하는 하사신의 모습을 보면 과연 종교 지도자가 개인의 삶을 멋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다시금 회의를 느꼈다.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최소한 자신이 아는 종교는 평안을 주기 위한 것이지 사람을 노예로 부리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개인적인 원한을 떠나 무슨 일이 있어도 하사신을 괴멸시키리라고 다짐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타티키오스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타티키오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베두인이 거절했습니까?”

배타적인 유랑 민족이라 했으니 타티키오스의 제의를 거절할 가능성이 컸었다.

“거절만 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들이 레이의 영주, 히삼 아스쿠리의 요청으로 당분간 용병이 되어주기로 했다는군.”

*레이(ray, 테헤란 인근 도시, 이 시기는 테헤란이 발전하기 전으로 레이가 중심도시였음.)

“누구를 막기 위한 용병입니까? 설마 저희를?”

“레이의 영주는 최근에 수니파에서 시아파로 돌아섰다는군. 아마도 인근 알라무트에 자리한 하사신의 협박을 받았겠지. 알라무트로 가기 위해서는 레이를 거쳐야 하는데 그곳에서 우리를 공격하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인 셈일세. 베두인의 족장이 나를 무사히 보내주는 것은 이번뿐이라며 선을 긋더군.”

“케르만샤에서 베두인은 하사신을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그들이…….”

“정확하게 말하면 도시 자체를 약탈한 것이지. 하사신을 일부러 노린 것은 아니지. 하사신으로서도 베두인은 쉽게 대할 수 없는 민족이네. 근거지 없이 매일 같이 떠돌아다니는 유랑 민족을 상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 차라리 그들에게 막대한 이득을 보장해주고 우리와 서로 공멸시키겠다는 뜻이겠지.”

베두인은 사막의 유랑 민족답게 낙타를 이동 수단으로 삼았다. 사막에서 그들을 상대로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 민족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들이 가야 할 길에 중앙 사막이라 불리는 거대한 사막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사막이라 해도 짧거나 주로 시원한 고원 지대를 통과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된 사막이 자신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베두인은 숫자도 자신들이 많고 사막이라는 이점까지 더해지니 승리를 자신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나 보군요.”

“맞아. 족장이 그냥 물러나라고 충고하더군. 그들은 우리가 공격하지만 않으면 날로 먹는 장사가 따로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지.”

“중앙 사막을 돌아가면 얼마나 걸립니까?”

“산맥만 두 개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말을 끌고서는 어렵네.”

말을 포기하면 전력의 반은 떨어져 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산맥을 넘고 나서 바로 말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결국,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어렵군요. 그래서 포기하실 겁니까?”

타티키오스는 준경의 담담한 말이 도발처럼 들렸다. 자신들이 빠져도 준경은 가겠다는 뜻을 피력한 것이니 자존심 때문에라도 물러날 수 없었다. 타티키오스의 황금마스크가 들썩였다.

“자네의 자신감은 언제 보아도 일품이야. 아무래도 하마단의 영주를 만나봐야겠네.”

“영주는 중립을 지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습니까?”

“내가 베두인에게 무엇을 제의했었는지 아나?”

오히려 되묻는 타티키오스였다. 준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통행권이었네. 우리는 아나톨리아 일대를 되찾았고 베두인은 해마다 찾던 곳을 떠나 다른 곳을 떠돌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지. 그들이 탐낼만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시큰둥하더군.”

“하사신이 그들에게 약속한 대가 중에 그와 비슷한 것이 있었겠군요.”

“맞아.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하사신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그들은 아나톨리아 통행로를 대신하여 네푸드 사막을 거쳐 카이로로 향하는 통로를 보장해준다고 했네.”

준경은 지리를 잘 모르니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타티키오스가 바닥에 대강의 그림을 그려주자 그제야 이해했다. 이곳의 베두인 족이 지금까지 아나톨리아와 이란 고원 일대를 수평으로 이동했다면, 하사신이 보장한 통로는 레이에서 남서쪽으로 일직선을 그어 카이로까지 닿는 경로였다.

“그들이 무역이라도 한다면 관세 면제 같은 혜택도 주고 싶지만 자급자족하거나 약탈로 사는 무리니 통행 보장이야말로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혜택이었는데 하사신이 발 빠르게 움직였으니 참으로 아쉽긴 하지. 그러나 하마단은 다르네. 그들은 통행권보다 관세 면제가 매력적이지. 비록 우리와 직교역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이 생산한 곡물은 우리에게도 팔리고 있네.”

비잔틴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관세 면제라는 무기를 매우 효과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자국 상인들이 전쟁 특수를 노려 폭리를 취하자 베네치아나 제노바 상인을 무관세로 끌어들여 경쟁을 유도해 가격 폭락을 주도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알렉시우스 1세의 정책을 봐온 타티키오스였기에 선택할만한 방법이었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준경은 조금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티키오스도 그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자신이 하마단에 줄 수 있는 혜택이 없었다. 하마단의 영주가 거부한다면 베두인과 겨룰 생각을 굳혔다.

그렇게 하마단의 영주, 아쉬네에게 접견 요청을 넣었고, 그날을 지나 다음 날 아침에 허락되었다.

준경은 접견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면서 그 옆으로 진열된 물품들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하나같이 오래된 물건들이었는데 절반 이상은 중원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였다. 민국에서 사백 년을 거주했었으니 자연 그때의 유물들일 것이다.

때론 한문이 빽빽한 서신이나 고서도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읽어보고 싶었지만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로만 보이니 준경은 이번 여정이 끝나면 꼭 천자문을 떼야겠다고 새로운 목표를 잡았다.

향긋한 차가 둘에게 나오고 반쯤 음미했을 때쯤 면사로 얼굴을 두른 아쉬네가 시녀와 신하들의 대동하고 나타났다.

“내게 제의가 있다고 들었다. 다시 한 번 밝히지만 하마단이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중립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이미 타티키오스가 어떤 부탁을 할 것인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하마단의 지원을 요청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중앙 사막에 버티고 있는 베두인 족을 절로 물러나게 할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만약 이대로 우리와 베두인이 부딪친다면 서로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베두인과 싸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스마일의 자식들과 싸우고 싶은 것입니다.”

“베두인은 그들만의 율법이 있다. 그중에는 신의도 들어 있지. 그들은 이미 약속한 것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비잔틴은 20년 전의 쇠약한 제국이 아닙니다. 옛 영토를 회복했고 반란 세력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아나톨리아의 남은 패주는 대략 롬, 카파도키아, 다니슈멘드 정도인데 남부를 차지한 롬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나톨리아 동부를 양분하고 있는 카파도키아와 다니슈멘드는 제국의 위세에 밀려 점차 그 세력을 동쪽으로 뻗고 있지요. 그럼 다시 그들에게 밀린 지역의 영주들이 동쪽으로 도망칩니다. 쫓기는 자들에게 하마단은 매우 먹음직스러운 영토지요.”

아쉬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호위병들이 분분히 칼을 빼들어 준경과 타티키오스의 목을 겨누었다.

“감히 나를 협박하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들이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현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이 역사적 가치와 중립이라는 이름, 또는 종교적 감화로 순순히 물러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다른 선택지도 있습니다. 제국은 더 이상의 영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옛 땅을 얻은 이상 온전하게 다스릴 수만 있다면 만족하지요. 다니슈멘드와 카파도키아, 롬에게 강화 사절을 보내 평화를 제안할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영주들에게 남은 적은 십자군뿐이겠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십자군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영주께서는 십자군을 지지하십니까?”

“우리가 그런 패악한 자들을 지지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영주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십자군이 파티마 왕조와 손을 잡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파티마 왕조의 자객 노릇을 이스마일의 자식들이 도맡고 있습니다. 이제 이건 단순한 종교 전쟁이 아닙니다. 이스마일의 자식은 종교의 이름을 빌린 비뚤어진 욕망이 낳은 독버섯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피해를 받을 무수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그 독버섯을 자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약간의 원한을 털어버리면 그만입니다만 그들의 세력이 더욱 강성해졌을 때, 그들이 무슨 잣대로 검을 휘두를 것인지, 수모와 고통을 받은 다음에야 후회할 것입니까?”

타티키오스의 열변에 아쉬네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며 생각에 빠졌다.

“레이의 영주, 히삼 아스쿠리가 변심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다. 그대는 그것을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겠지? 그러나 그가 협박으로 그런 것인지 자발적으로 그런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의 예측에서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진정성은 느껴진다. 그래도 하마단은 개입할 수 없다. 설사 하마단이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선조가 세운 원칙을 깰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옛 예언을 믿는다. 왕의 도시, 이곳의 진정한 주인이 언젠가 나타나리라고 말이다. 그때까지 이곳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옛 예언을 맹신하여 파괴로 끝이 나더라도 말입니까?”

“파괴는 곧 재생과 연결된다. 시련은 있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주인을 맞이하기 위한 산고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은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타티키오스는 완강한 아쉬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이 일어나자 호위병들은 아쉬네의 명령으로 칼을 거두었다.

“그대는 유적을 모두 둘러보았는가?”

조용히 물러나려던 준경에게 아쉬네가 말을 걸었다.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준경은 순순히 대답했다.

“이틀간 둘러보았습니다. 그 규모가 너무나 커서 한 달을 머물러도 다 구경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죽은 아내가 생전에 그대를 민 태조의 부조에서 기도했다지? 모르긴 몰라도 그녀는 그대의 무사함을 기원했을 것이다. 그녀의 기원이 그대를 지금까지 생존케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어리석은 여인입니다. 둘 다 행복하고 무사하길 바랐다면 제가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었겠지요.”

“그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떠나기 전에 유적에 들러 민 태조의 입상에 무사귀환을 빌어보아라.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글쎄요.”

준경의 시큰둥한 반응으로 접견은 끝이 났다.

타티키오스 일행이 짐을 챙기고 떠날 준비를 마치자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왜 이곳으로 갑니까?”

준경은 타티키오스를 따라 달리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중앙 사막으로 가려면 북쪽을 향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지금 달리는 길은 유적지였다.

“설마 영주가 말한 미신을 믿는 겁니까? 거기다 정교회의 주교라는 사람이…….”

“말대로 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자네는 그때의 분위기를 보지 못했나? 그녀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고 말일세.”

“진짜로 하고 싶은 말? 그녀가 그 자리에서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나도 짐작이야, 그러니 들러서 확인해보세. 거리도 얼마 되지 않지 않은가?”

이미 이틀 동안 둘러보았었지만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아쉬네가 유적지에 온 것도 아니었다. 정말 타티키오스의 짐작대로 무언가가 있는 걸까? 아니면 말 그대로 단순한 기도를 뜻한 것일까? 준경은 흑우의 말 배를 걷어차며 선두로 치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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