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8 (8) 거세개탁(擧世皆濁) =========================================================================
도시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낮에는 다들 인근 농경지를 돌보기 위해 자리를 비운 탓이다. 예전에는 상공업도시였으나 오가는 대상과 그들로 말미암은 약탈이 빈번히 일어나자 하마단의 태수는 대상을 받지 않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도시는 쇠락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왕의 도시라는 이명에 맞게 순례자가 끊이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 도착하기 전 10km 지점에서 옛 페르시아 제국의 영화를 기록한 세 개의 석비를 본 바가 있었다. 각기 바사어, 바빌론어, 엘람어로 적혀 있었는데 이제는 사멸된 언어들이 섞여 있어 누구도 그 뜻을 다 아는 자가 없었으나 자신들의 도시가 그때부터 왕의 도시였음을 자랑하는 근거로 삼았다.
“하마단은 철저히 중립을 지키고 있네. 이 일대에서는 곡창인지라 노리는 자들이 제법 많지만, 워낙 전설과 성역이 많이 보존된 곳이라 그 유산을 온전히 얻기 위해서라도 군대를 일으킬 수 없는 곳이지. 이 일대를 완전히 평정하는 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어중간하게 이곳을 공격했다가는 일대 영주들의 공적이 되어버리니 참으로 대단한 곳이긴 하지. 그래서 우리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기도 하고.”
비잔틴 기병이 이곳까지 나타난 것을 놀라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즉시, 하마단의 태수에게 보고되었고 친히 몸을 일으켰다는 말이 들려 준경 등은 잠시 대기하고 있었다.
반 시진 정도 지났을까? 일단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화려한 가마가 나타났다. 타티키오스도 이곳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라 가마에 탄 사람의 정체를 정확히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대대로 하마단을 지배하는 태수는 대부분 여자라고 했다. 가마의 외형을 보아도 충분히 성(性)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의 도시, 하마단의 지배자, 아쉬네 하마단 아르타바누스 리 님께 경배를!”
거창한 소개와 함께 차양이 걷히자 지나가던 주민은 엎드려 경의를 나타냈다. 타티키오스는 한쪽 무릎을 꿇는 정도로 대신했다.
“자네 지금 뭐 하는건가!”
옆에 있던 준경이 멍하니 정면을 주시하자 그는 준경을 끌어 앉혔다. 하마단의 전력은 별 볼 일 없지만, 이름값만으로 수백 년을 지탱해왔다. 하마단에 밉보인다는 것은 인근 일천 리 이내 영주들의 미움을 산다는 것과 같았다.
그의 나직한 외침에도 준경은 그저 그 이름을 되뇌었다.
“아쉬네 하마단 아르타바누스 리?”
분명히 처음 듣는 이름임에도 왠지 그리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여인은 눈을 제외하고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정확한 외모를 알 수는 없었지만 고운 눈매는 그녀가 미녀라는 것에 높은 가능성을 두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준경을 보며 말했다.
“그대는 예의를 모르는가?”
그녀의 발언보다 타티키오스가 먼저 몸을 일으켜 준경의 머리를 강제로 조아리게 하였다.
“이 친구는 코레아란 곳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이곳 예법에 서툴지요.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그저 알라무트로 가기 전에 잠시 휴식을 위해서입니다. 부디 우리의 휴식을 허락해주시길.”
“코레아? 고려?”
의외의 반응이었다. 타티키오스는 이곳이 한때 실크로드의 기착지였음을 떠올렸다. 지금은 비록 정책으로 기착지의 역할을 포기했지만, 가끔 기후 변화에 휘말려 피신을 위해 이곳에 머무는 대상들도 있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준경에게 고려가 국제적인 무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고려를 정확하게 발음한 것 때문에 준경 역시 눈이 번쩍 뜨였지만 아쉬네의 반응은 거기까지였다.
“알라무트로 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곳은 지금 이스마일 자식들의 철옹성이 되었다.”
“그곳을 공격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쉬네가 손을 들자 웅성거림은 단숨에 그쳤다.
“알라무트가 어떤 곳인지 아는가?”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빚을 갚아줘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스마일의 자식들과 원한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그러나 잘 생각해야 한다. 그곳은 ‘독수리 둥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깎아지른 듯한 정상에 지어진 매우 험난한 요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이스마일의 자식들이 성주를 죽이고 무단으로 점거한 이후 누구도 그곳의 사정을 아는 자가 없을 정도로 폐쇄된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인근의 태수 몇이 이천의 군사를 징발하여 알라무트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고 말았지. 지휘관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목숨을 잃는 괴이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이름을 떠올리지 않는다.”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타티키오스의 간명한 대답에 아쉬네는 혀를 찼다. 아마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그때 준경이 나섰다.
“하마단이 왕의 도시라는 이명을 얻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의 회합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때의 흔적을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알라무트를 가려는 자가 전혀 상관없는 일을 묻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구나. 중요한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회합 장소는 순례자에게 공개되어 있다. 누구에게든 물으면 그 장소를 알려줄 것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그것을 보려고 하느냐?”
“제게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준경은 담담히 자신의 과거사를 털어놓았다. 송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하사신, 수피 등과 얽힌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아쉬네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로구나. 너의 이름이 준경이라는 것도 놀랍고, 우연하게 만난 처자가 민 태조를 숭앙하는 묘족이라는 것도 말이다. 너는 나의 이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느냐?”
준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 태조는 정부인이 여럿이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아쉬네 하야스탄 아르타바누스 님이었다.”
“아!”
준경은 짧은 탄성을 질렀지만, 곧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에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느꼈던 그리움은 분명히 어디선가 많이 겪어본 듯한 습관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민 태조의 정부인이 누구였는지 아예 알지를 못했다.
“민 제국이 멸망하고 난세가 시작되었다. 당시 민에 거주하던 아르타바누스 일족은 세력을 이끌고 이곳 하마단으로 되돌아와 지금에 이르렀다. 민 제국과 아르타바누스 왕가의 부활을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언제고 다시 옛 영화가 찾아올 것을 믿고 있다. 그래서 ‘아르타바누스’ 성 뒤에 다시 ‘이’라는 성을 더 붙인 것이다. 아무튼.”
아쉬네는 손뼉을 쳤다.
곁에 있던 신하 한 명에게 준경에게 당시 회합이 진행되었던 유적지를 보여줄 것을 지시했다. 준경과 자매의 이야기가 심금을 울렸던 탓이다.
“잠시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겠지만, 알라무트와 비잔틴의 일에 하마단은 끼어들 생각이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
“그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타티키오스가 감사의 예를 취하자 아쉬네는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떠나자 주위는 평상을 회복했다. 타티키오스는 필요한 물품의 지시를 서둘렀다.
그리고는 기병 열 기와 함께 어디론 가로 떠날 채비를 했다.
“정찰이라도 가려는 것입니까? 그럼 저도 가죠.”
준경에게 유적지 구경은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었다. 타티키오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찰이 아니라 원군을 얻어 올 걸세. 이틀 정도 걸릴 것 같으니 자네는 그동안 보고 싶었던 유적지 구경이라도 하며 몸을 쉬고 있게. 곧 바빠질 테니까.”
인근에 아는 영주라도 있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타티키오스는 이곳까지 한 번도 온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곳보다 훨씬 북쪽,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활동했다.
생각해보니 원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중간에라도 언급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곳에 도착하여 갑자기 생각난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들을 끌어들이려고?”
“하하하, 설마가 맞을걸세.”
타티키오스가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삽시간에 사라졌다.
“베두인을 끌어들이겠다고?”
사막의 유랑자라는 베두인의 위력은 이미 실감한 바가 있었다. 배타적인 성품 때문에 다른 부족과 어울리지 못하고 유랑 생활을 고집하는 그들이 과연 타티키오스의 제의를 받아들일까? 만약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든든한 원군이나 마찬가지였다. 준경은 타티키오스가 그들에게 어떤 제안을 할지 궁금해졌다.
“지금 가실 겁니까?”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전형적인 쿠르드 인이 준경에게 슬며시 물었다.
“이곳에서 멉니까?”
“그리 멀지 않습니다. 말을 타면 밥 한 공기 먹을 정도 시간이면 됩니다.”
일단은 가볍게 둘러보기로 했다.
안내를 맡은 쿠르드 인과 유적을 가니 당시의 참가 규모를 알 수 있는 석비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석비에는 열방의 이름이 각기 적혀 있었는데 그들의 자리를 정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일백 개 이상의 석비는 당시 참가 세력이 어마어마했음을 보여주는 증표였다.
준경이 가장 놀랐던 것은 북쪽에 자리한 산의 단면을 깎아 민 태조의 입상 부조와 그가 외쳤던 내용을 다섯 개의 문자로 각기 기록을 해놓은 것이었다. 민 태조라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었던 것은 이미 해남도에서 자매와 함께 부조를 보았기 때문이다. 준경은 새삼 자매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곳까지 오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준경은 다섯 개의 문자 중 한문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자 이소의 얼굴도 떠올랐다. 천자문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잔소리를 해대던 이소의 강권을 무시한 덕분에 한자라는 사실만 알 뿐 무슨 뜻인지 읽지를 못했다.
안내원으로 따라나선 쿠르드 인이 자국어로 되어 있는 것을 번역해 들려주었다.
-전국시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있던 등나라의 군주가 맹자에게 어찌하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청했다. 맹자가 말했다. ‘백성과 함께 성벽을 쌓기 위한 돌을 나르십시오. 백성과 함께 해자를 파십시오. 마지막으로 백성과 더불어 죽을 각오를 하십시오. 그러면 백성은 왕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어떤 나라의 군대도 소국의 백성보다 많은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바람이 잠시 불어 준경의 옷깃을 스쳤다. 안내원이 몇 차례 준경에게 괜찮으냐고 물어서야 준경은 석벽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안내원의 설명이 마치 자신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요동쳤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글이 끝나는 지점에는 당시 회합을 기록한 암각화가 짤막짤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인물마다 이름이 쓰여 있었는데 누가 누군지 상황을 오해하지 않고 바로 알 수 있도록 하려는 조치였던 것 같았다. 그러나 세월이 너무 오래 지나 알아볼 수 없는 이름은 몇 되지 않았다.
“위연, 장합, 서성, 강유, 등애.”
훈족을 멸할 것을 결의하자 민 태조가 다섯 장수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비교적 한문이 쉬워서 몇 글자는 알아보았고, 안내원이 보충해주었다.
고려에서도 당시 시대를 그린 설화들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에 제법 유명한 이야기들은 준경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황사를 이용하여 조조와 원소가 원술과 이풍을 죽였으나, 민 태조의 수공 덫에 걸려 목숨을 구걸한 끝에 살아났다는 내용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정도를 제외하면 일일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이름들이 너무 친숙하게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