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7 (8) 거세개탁(擧世皆濁) =========================================================================
(8) 거세개탁(擧世皆濁)
“곧 하마단이로군.”
1300km 가까운 먼 거리를 달려 어느덧 하마단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사신의 본거지가 있다는 알라무트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휴식과 준비를 위해 꼭 들러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한 달의 여정 동안 준경의 얼굴은 새카맣게 탔다. 비잔틴 기병들의 중무장을 고려해도 늦어도 보름이면 도착했어야 할 거리였으나 예상치 못한 습격과 기습을 받으며 난관을 헤쳐왔다. 그 기간이 불과 한 달이라니, 준경은 하마단을 앞에 두고서 감회가 새로웠다.
준경은 하마단을 향해 지친 말을 달래며 앞서 걷고 있는 타티키오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여러 도시를 거치며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안전했던 것은 킬리지 같은 이들의 도움 때문이었다는 것도 말이다. 이방인으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갖은 공격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투르크 출신에 온갖 전장을 전전한 타티키오스의 경륜과 지휘 덕분이었다.
준경은 한 달간의 여정을 회상했다.
첫 번째 위기는 출발지에서 불과 15km 떨어져 있는 에데사 백국에서부터였다. 에데사 백국은 십자군 지도자 중 보두앵이 안티오크 원정에 불참하고 에데사 영주의 양자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기독교 국가였다. 백국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보드앵이 백작 신분이었기 때문에 백작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이었다.
그는 모두의 시선이 십자군과 안티오크로 쏠린 사이 에데사 인근을 통합하며 세력을 점차 넓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 그때 타티키오스와 마주쳤다.
보두앵은 타티키오스가 십자군을 궤멸로 이끌고 있다고 믿었다. 애초에 노예였던 투르크 인이 주교의 자리를 받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십자군 사이에서 악마란 별칭을 얻은 코레아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욱 그를 불신하게 되었다.
당시 에데사 백국은 건국 초기였고, 그전부터 인근 부족들과 종교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었기에 보두앵은 용병을 고용하여 세를 늘리고, 그렇게 얻은 세를 바탕으로 직할군을 늘려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종교 문제로 인근에서 용병을 구할 수 없으니 그가 손을 내민 것은 북방 아르메니아였다. 비록 정교회를 믿는 그들이었지만 최소한 무슬림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보두앵은 삼천의 아르메니아 기병을 이끌고 타티키오스와 오백 비잔틴 기병을 막아섰다. 그는 타티키오스와 기병들을 사로잡아 비잔틴 황제에게 톡톡히 몸값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타티키오스에 대해 너무 몰랐다. 그가 비잔틴의 검이라는 명성이 어디에서 생긴 것인지 간과한 것이다.
단순히 비잔틴 기병을 상대한다고 믿었던 아르메니아 기병은 타티키오스의 문양을 보자마자 도망가기 시작했다. 보두앵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급속히 흩어진 진형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원초적인 두려움을 붙잡기에는 그의 지휘력이 미치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싸움도 없이 보두앵은 물러나고 말았다.
싸우기 위해 잔뜩 독기를 품고 있던 준경이 허탈할 정도로 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타티키오스는 그런 준경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아직 내 황금마스크를 기억하는 이들이 제법 있군.”
타티키오스의 주요 활동범위는 주로 비잔틴 북동부였다. 그는 헝가리에서부터 아르메니아 사이의 이민족을 평정하며 한때, 헝가리 일부를 군정 통치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의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자연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는 투항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었지만,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 자에게는 여지가 없었다. 칼을 부딪쳤던 준경과 손을 잡은 것은 정말 특별한 경우였던 것이다.
에데사 백국을 지나 인근에서 가장 큰 도시 모술을 향해 달렸다. 그러다 모술을 불과 하루 앞두고 3만에 달하는 투르크 대병력을 평원에서 마주쳤다.
비잔틴의 표식을 보자마자 공격을 시작한 그들을 상대로 타티키오스가 선택한 것은 도주였다. 그는 인근 야산으로 달려 적들을 유인했다. 기병 일천이 그들을 추격하였고, 타티키오스는 준경에게 기병의 지휘관을 사로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준경이 흑우를 반전시키자 추격하며 대열이 흩트려져 있던 그들의 방심을 여지없이 꿰뚫고 유유히 지휘관을 사로잡자, 지금까지 준경의 무위를 반신반의하던 비잔틴 기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했다. 자신들의 지휘관 타티키오스와의 전투가 있었지만, 그때 이후로 상당시간이 지나서 준경에 대한 위명이 상당히 퇴색되었던 참이었다.
지휘관의 설명을 통해 그들이 안티오크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모술의 군대라는 것을 알았다. 모술의 태수는 케르보가라는 장수로, 안티오크의 야기 시안과 같이 맘루크 출신이었다. 그는 같은 맘루크 출신 야기 시안이 십자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끌어모아 출병한 것이다. 그는 안티오크로 향하기 전에 눈엣가시 같은 에데사 백국을 처리할 결심으로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까지 얻었다.
타티키오스는 지휘관의 석방을 앞세워 케르보가를 마상에서 대면했다. 케르보가는 타티키오스의 설명을 듣고 모술을 지나는 동안 무사통과를 약속해주었다. 타티키오스의 곁에 준경이 같이 있었던 것이 타티키오스의 말을 신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킬리지의 친우이자 십자군에게 악마라고 불리는 사내가 자신들의 적일 리가 없다고 믿었다.
우연한 도움까지 얻어 거의 절반의 거리를 순조롭게 진행했다고 생각했다. 예상보다 너무나 평탄한 여정에 준경이 투정을 부렸을 정도였다. 말이 씨가 되었을까? 그들이 하마단에서 160km 떨어진 케르만샤 인근에 도착하면서부터 하사신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미 타티키오스도 그 점을 주지시킨 바가 있었다.
“케르만샤는 시아파 무슬림이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네.”
비잔틴 갑옷이 너무 눈에 띄었기에 그들은 케르만샤부터는 몇몇 병사를 상인으로 위장시켜 성내로 들어가 필요한 물건만 사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타티키오스와 준경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다른 이들이 물건을 구매하는 동안 노천 식당에 앉았다.
대상들이 올 시기가 아닌지 시장도 식당도 한적하기만 했다. 시킨 요리가 나오자 준경은 손가락을 먼저 움직였다. 그러나 타티키오스는 그런 준경의 손을 ‘탁’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무슨 짓입니까?”
허기진 배를 달랠 생각에 화색이 감돌았던 것도 잠시 준경은 타티키오스의 무례한 행동에 살짝 화가 솟았다. 그러나 타티키오스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독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재주는 없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네. 우리가 음식을 먹기만을 기다리는 자들의 눈빛은 볼 수 있지.”
“그렇다면!”
준경은 앉았던 의자를 잡아 점원을 향해 던졌다. 점원은 다짜고짜 날아온 의자를 날렵한 몸놀림으로 피했다. 점원의 품속에서 단도가 나오자 타티키오스는 가벼운 신음을 발했다.
“기껏 해봐야 식당 주인, 점원 정도까지라고 생각했는데.”
점원의 움직임을 시작으로 지나가던 행인까지 품에서 칼을 꺼내 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사신은 상급에 이른 자들이 문양이 새겨진 단도를 쓸 수 있는 자격을 준다고 했으니 칼을 쓰는 자들은 졸개에 불과했다.
“게다가 대마까지 했군. 어쩐지 지금까지 한 번도 공격이 없어 이상하고 했는데 이곳에서 끝장을 보기로 했군.”
둘이서 상인으로 변장한 비잔틴 기병을 찾아 나섰을 때, 일부는 이미 군중에게 살해당한 상태였다. 도시 전체가 적으로 돌변한 느낌이었다. 어찌어찌 성문까지 도달했는데 성문은 굳게 잠겼고, 안에서 열지 못하도록 밖에 부목을 대고 있었다. 자신들 편을 해할까, 화살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온갖 공격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다.
타티키오스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천을 힘껏 풀어 젖혔다. 그를 상징하는 황금마스크가 햇빛 아래 찬연히 빛났고, 그는 군중 사이에서 탈취한 두 자루의 시미터를 교차시켰다.
“페체네그족이 어째서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어째서 내가 비잔틴의 검이란 아호를 가지게 되었는지 이제부터 보여주마.”
페체네그족은 흑해 연안에서 헝가리까지를 넘나들던 부족이었다. 그들이나 아르메니아인과의 싸움 등을 이곳까지 오는 내내 질리도록 들었던 준경이었다. 그리고 타티키오스의 기병들이 왜 강한지도 알게 되었다. 맘루크와 비슷했지만, 아버지를 잃은 전쟁고아들의 모임이라는 것이 달랐다. 그리고 그 원수는 페체네그족이 다수를 차지했다.
타티키오스와 준경까지 포함하여 모두 열 명이었다. 타티키오스가 함성을 지르며 두 자루의 시미터를 휘두르자 일제히 다른 방면으로 적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칼을 든 군중이 아니라 단도를 들고 이리저리 틈을 보고 있는 일단의 자객들이었다. 단도에는 특수한 독이라도 발라져 있는지 살짝 스쳤을 뿐인 병사 한 명이 숨 몇 번 쉴 사이에 절명하고 말았다.
대마에 취한 군중은 일백이 순식간에 죽어나갔는데도 전혀 두려움 없이 칼을 뻗었다.
한 명, 두 명, 비잔틴 기병이 속속 쓰러질 때마다 활동할 수 있는 간격은 점차 좁혀졌다. 종국에는 타티키오스와 준경 둘만이 등을 맞대고 적을 상대해야 했다. 자객들은 단검을 다 썼는지 시미터를 들고는 군중 틈 사이에서 일격을 노렸다.
그때였다.
묵중한 고동 소리가 들리더니 성문 밖에서 비명이 일기 시작했다. 불화살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밀집한 군중은 그제야 정신이 깨는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준경과 타티키오스의 최후를 지켜보던 케르만샤의 태수와 이번 공격을 지휘한 하사신의 장로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비명을 터트렸다.
문이 활짝 열리며 나타난 이들은 낙타를 탄 일단의 무리였다. 수백 명에 이르는 자들은 희열에 차서 마구잡이로 주민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낙타 허벅지에 박힌 문양을 보더니 타티키오스는 지친 준경을 끌어당기며 벽 쪽에 달라붙었다.
“베두인, 베두인이다. 이 도시를 약탈하기 위해 계속 기회를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내가 그토록 경멸하던 이들이 이제는 주님께서 보내주신 사자로 보이는군.”
혼란을 틈타 타티키오스와 준경은 성 밖을 빠져나왔다. 그들을 공격하는 베두인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들의 관심은 도시의 약탈에 있었기에 몇 명이 소리소문없이 쓰러지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간신히 성 밖을 벗어나 달리자 능히 일천은 되어 보이는 낙타 군단이 열린 성문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능선에서 참았던 숨을 헐떡이며 휴식을 취하는 사이, 준경은 베두인의 정체를 물었다.
“사막의 유랑자라고 할 수 있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엄격한 계급과 규율을 가지고 극히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네. 아까 낙타 허벅지에 문양을 보았지? 그건 그 부족의 재산이라는 표식일세. 낙타를 잃어버리면 그들은 끝까지 추격하여 상대를 죽여버릴 정도지. 하사신들이 우리의 행방에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베두인이 도시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것 같네. 낙타를 강탈당했을 수도 있고, 도시의 수비가 너무 허술한 것을 보고 때를 본 것일 수도 있겠지.”
케르만샤 곳곳이 불길에 타올랐고, 목불인견의 살육전이 벌어지는지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준경과 타티키오스를 죽이기 위해 마련한 거대한 함정이 오히려 자신들의 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8명 형제의 목숨 빚은 알라무트에서 갚아야겠군.”
타티키오스와 준경의 상처와 피로는 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것도 아니었다. 기병을 이끌고 케르만샤 북동쪽에 자리한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수도원을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 타티키오스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이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평안하게 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배척하는 아시리아 동방교회 세력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네스토리우스파로 451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되어 비잔틴 제국에서 쫓겨나자 그를 따르는 신자들이 모여 창립한 교회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패권을 우려로 바라보던 페르시아 일대의 지배자들은 그들을 품어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해주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적은 동지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케르만샤 일대를 지배하던 시아파 태수가 베두인의 기습으로 어이없이 죽고, 도시마저 황폐해지자 상대적으로 활동이 자유로워진 아시리아 동방교회 측은 이 지역에서 유일한 기독교 종파로 남기 위해 아르메니아 정교회 수도원 공격을 단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회복 불가능에 빠져들었다. 오백 명의 건장한 신도를 투입하여 수도원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말살하려고 했지만, 타티키오스와 준경 이하 오백에 달하는 기병을 상대하기란 어불성설이었다. 타티키오스와 준경은 부상을 이유로 나서지 않았는데도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아시리아 동방교회 공격을 막아냈다.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총대주교는 아르메니아 정교회 역시 무주공산으로 변해버린 이 지역을 노리는 것이라 단정 지었다. 그렇다고 복수를 하기에는 너무나 세가 약했다. 오백을 동원한 것도 이 지역에서 가용 가능한 남자 신도를 모두 끌어모은 숫자였다. 결국,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케르만샤 일대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로서는 예상치 못한 호재를 만난 것과 같았다.
그렇게 정리를 마치고 이제 알라무트로 가기 전에 마지막 기착지라 할 수 있는 하마단을 통과하고 있었다.
“왕들의 도시라.”
민나라 태조는 이곳에서 훈족의 대처와 평화 공존을 천하 열방(列邦)에게 외쳤고, 그로 말미암아 하마단은 한 도시에 가장 많은 왕이 머무른 도시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과연 이곳에 실록의 흔적이 있을까? 준경은 조금은 설레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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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슬럼프에 빠졌다고 생각해서 하루 쉴까 생각했는데 때마침 독감이 와주시더군요. 다시 연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