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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54화 (54/257)

00054  (7) 척당불기(倜%26#20795;不羈)  =========================================================================

준경은 호화로운 침대에 몸을 누이고 팔베개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민국실록에 연연할 이유는 없었다. 관계가 있다면 자매를 만나 조금 관심이 생겼었다는 것 그 하나일 것이다. 그것보다 조금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야기 시안에게는 미안하군.”

열병에 걸린 킬리지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 승승장구를 거듭하다가 이후 계속된 패전과 불운, 그리고 열병까지, 이제는 자신의 운이 다했다고 믿었다.

의지할 수 있었던 엘카네스를 잃고 킬리지는 롱기누스의 창을 저주와 살육의 창으로 만들어버리리라고 광기 섞인 눈동자로 말했다. 준경은 그런 킬리지에게 몇 차례 충고했지만 모두 무시당했다. 오히려 친구가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며 면박만 당했다.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결국 킬리지의 곁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나게 되었다.

준경이 야기 시안에게 말한 희망 섞인 근거와 달리 우마르는 안티오크가 멸망할 것으로 보았다. 십자군이 공성을 하기에 턱없이 약해졌기는 하지만 저들은 돌아갈 곳을 잃은 굶주린 사자들이었다. 사람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짓을 저질러서라도 안티오크를 무력화시키리라고 예견한 것이다.

그럼 굳이 롱기누스의 창을 안티오크에 가져다 놓을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십자군은 분열할 것이고, 설사 예루살렘이나 안티오크를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하더라도 100년을 넘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사소한 욕심과 오해에서 시작된 일로 인간관계가 파탄 나는 경우가 있다. 하물며 십자군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노르만, 프랑크의 갈등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지역 영주들의 이합집산이기도 했다. 롱기누스의 창은 서로마 교황과 비잔틴 황제의 관심을 끌 것이고, 참가하는 머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결론을 내지 못하고 불신만 쌓이며 외부의 적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 롱기누스의 창은 그 세월을 앞당겨주는 촉매제였다.

침대는 푹신하기 그지없었다. 준경은 잠시 눈을 감았다. 나른한 것이 이대로 잠이 들것 같았다.

그러다 순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준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러 침대에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침대에는 세 자루의 단도가 꽂혔다.

“누구냐!”

준경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렀다. ‘사사삭’ 하는 움직임과 함께 천장에서 한 명의 회색 인영이 대들보를 넘나들며 다시 단도가 뿜어졌다.

준경은 다시 바닥을 굴러 간신히 피했다. 그는 침상 아래에 놓아두었던 수패를 잡았다. 다시 단도가 날아들었고, 이번에는 수패로 막았다.

회색 인영은 세 번의 공격이 실패하자 미련없이 대들보를 타고 지붕 위로 사라졌다. 지붕이 닫힌 것으로 보았는데 언제 그곳을 뚫어놓은 것인지 교묘하게 구멍을 막아 놓고 있어 보이지 않았었다.

준경은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수패에 박힌 단도 하나를 힘을 주어 뺐다. 날카롭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단도로 보아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은 치밀한 계획의 일환이라고 확신했다.

“혹시 하사신인가? 내가 수니파인 킬리지를 도왔기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분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왜 그동안 하사신을 잊고 있었을까?

야기 시얀에게 단도를 보여주자 그 역시 매우 놀라며 손잡이에 그려진 문양이 이스마일파의 자객들을 뜻하는 것이라고 확인시켜주었다. 그는 즉시 주변을 수색하여 수상한 자들을 모두 색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준경의 예상대로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자객이 쉽게 꼬리를 잡힐 리가 없었다.

“조용히 떠나고자 했는데 나를 건드려?”

빚을 졌으니 갚아줘야 했다.

야기 시안이 며칠을 수소문하여 자객의 입성을 도운 자를 찾아내 고문한 결과 하사신은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의중이 반영되어 십자군을 돕기로 한 것에 따라 움직였다고 했다.

분열되기는 했지만 셀주크 제국은 여전히 큰 덩어리였고, 파티마 왕조는 과거 셀주크 제국에 번번이 패한 응어리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십자군과 손을 잡고 셀주크 제국을 완전히 괴멸시킬 생각으로 있었고, 안티오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영토를 십자군이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팔레스타인을 비롯하여 파티마 왕조가 한창 잘 나갈 때의 영토를 수복하는 것을 도와주거나 방해하지 말 것을 협상하는 중이라고 했다.

결정적인 순간 안티오크의 성문을 열기 위해 내부 배신자를 섭외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섞여 있자, 야기 시안의 분노는 극에 달해 결사 항전을 부르짖고 그 같은 사실을 셀주크 제국의 각 후계자에게 전달했다.

또한, 내부에서 자객의 활동을 돕고 배신자를 섭외하는 일당을 찾아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킬리지의 제안대로 충성을 맹세한 시리아 정교회 외에 모든 기독교인이 추방되었고, 정교회 총주교가 수감되었다.

기독교도들이 십자군에게 밀려들자, 십자군 수뇌부 사이에서는 롱기누스의 창이 안티오크 대성당 지하에 있다는 사실이 은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떠나겠다고?”

야기 시안은 아쉽다는 듯 준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경은 본래 십자군을 상대로 어느 정도 싸우다 떠날 생각이었지만 하사신의 본거지라고 짐작하는 도시 이름을 듣게 되자 그곳으로 향할 결심을 한 것이다. 자신이 하사신의 본거지로 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하사신은 안티오크보다 자신을 더 신경 쓸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야기 시안을 돕는 것과 같았다. 어느새 준경을 뜻하는 ‘코레아’라는 이름은 일대에서 제법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사신 역시 십자군의 강력한 적이라 생각하여 준경에 대한 암습을 시도한 것이었다.

“좋은 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준경은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어 몹시 흥분된 상태였다. 야기 시안은 준경에게 선물로 말 한 필을 주었는데 중원에서는 한혈마(汗血馬)라고 불리는 뛰어난 말이었다. 말에 한 번 타보고 난 후 한 무제가 ‘서극천마(西極天馬)'라고 칭송한 것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말과 함께라면 어떤 적도 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윤기나는 검은 털에 일반 말보다 훨씬 체구가 커서 하루에 천 리도 너끈히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아이의 이름을 뭐라 지을까 고심했었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애마였던 부케팔로스를 따라 할까 했는데, 선택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주인은 따로 있었던 모양일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은 준경도 이곳에 와서 여러 차례 들었다. 역사 속의 인물이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마치 신화의 인물처럼 기억되는 그런 대단한 영웅이었다.

부케팔로스의 뜻을 물으니 ‘소머리’라는 뜻이라고 했다. 말의 덩치가 소처럼 컸다는데서 유래된 것이라 하는데 지금 준경이 타고 있는 말도 그와 같아서 야기 시안이 같은 이름을 붙일까 고민할만하다고 생각했다.

준경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소머리라면 우두가 되어야 하나? 웃음거리만 될 것이 뻔하니 그래, 너의 이름을 흑우(黑牛)라고 하자.”

흑우는 아직 사람을 태우는 것에 익숙지 않은지 준경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준경의 힘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고삐를 잡고 연신 흑우의 이름을 계속 불러주자 체념한 것인지 아니면 수긍하는 것인지 준경의 움직임에 응했다.

준경의 목표지는 안티오크에서 210km정도 떨어져 있는 아인타브(Aintab, 가지안테프)였다. 지중해 북동단 이스켄데룬만(灣)에서 동쪽으로 100km 정도 들어간 지점에 있는 도시로 유프라테스 강 연안과 시리아의 중심도시 알레포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의 중심이기도 했다.

유프라테스 강의 축복으로 일찍이 농산물의 집산이기도 한 이 도시를 하사신이 근거지로 정한 것은 아마도 그런 장점들에 기인했을 것이다.

하루에도 천 리를 달린다는 한혈마 혈통답게 흑우는 하루해가 떨어지기 전에 아인타브에 도착했다.

아인타브는 교통의 요지, 농산물의 집산지답게 온갖 인종의 전시장이었다. 준경은 코니아에 머물던 시기부터 무슬림의 옷을 착용하고 있었으므로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문에 두 자루의 칼을 뉘어둔 곳이 접선지라고 했겠다.”

정확한 근거지를 듣지는 못했지만, 입구 상단에 두 자루의 칼이 누워 있는 형상이 작게 그려져 있으면 그곳이 하사신들의 안가(安家)라고 했다.

말을 타고 돌아다니기에는 집들이 너무 빽빽하여 준경은 킬리지가 챙겨주었던 보석을 팔아 흑우를 마방에 맡겼다. 처음에는 제대로 돌봐줄까 싶었는데 신용이 없으면 이곳에서 장사할 수 없다는 말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준경은 나오면서 그들의 면면을 잘 기억해두었다. 만약 흑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들부터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흑우가 너무 중요해서라기보다 믿음을 사기 치려는 자에게는 합당한 대가가 돌아가야 한다고 준경은 믿었다. 사기꾼들이 횡행하는 것은 사기죄의 대가가 작기 때문이다. 다 없앨 수는 없어도 최소한 자기를 건드리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

퍽!

두 자루의 칼이 문 위에 보이자마자 준경은 발로 문을 차고 실내를 순식간에 훑었다. 다섯 명의 남자가 돌연한 습격에 놀라 탁자나 발밑에 두었던 칼을 분분히 들고일어났다. 준경은 그들이 칼을 잡을 시간을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칼을 잡으려던 손목 네 개가 순식간에 베어지자, 가장 늦게 손잡이를 잡은 자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어느새 자신의 손목에 준경의 곡도가 얹어져 있었다.

“으악!”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손목이 그대로 잘리자 사내는 잘린 손목을 붙들고 고통에 뒹굴었다. 준경은 다시 칼을 휘둘렀다.

다섯 번의 비명이 다시 들렸다. 그들의 발목도 하나씩 끊어 버린 것이다. 한쪽 팔, 한쪽 다리를 잘리자 그들은 바닥을 뒹굴며 고통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도저히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준경은 그제야 문을 걸어 잠갔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는 했지만, 점차 잠잠해지는 것이 자신들이 위험해질 것 같아 급히 피하는 것이라고 발걸음으로 알 수 있었다.

“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는 것이오!”

고통 속에서 제법 용감한 자가 하나 남은 손으로 준경을 삿대질했다.

“크악!”

그의 손목이 다시 허공에 솟구쳤다. 그는 잘린 팔목을 붙잡아줄 손을 모두 상실했기에 고통을 달래고자 팔목을 배에 비비며 뒹굴었다.

“하사신의 본거지가 어디냐?”

거두절미였다.

“하사신이라니? 잘못 찾아왔소. 이곳은, 컥!”

반문하는 자는 발목이 잘렸다. 그제야 다섯 명의 사나이는 자신들이 평생에 두 번 볼 수 없는 사신을 만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경은 자매를 떠올렸다. 비록 하사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종교의 광기가 자매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래서 복수를 위해 대식국에 온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은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소수의 기독교인 역시 자신을 이방인이라 부르지 않고 형제라 부르며 평등한 시선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십자군과 하사신, 해남도에서 만난 수피 광신도들은 어떠했는가? 과연 이들이 자신이 이곳에서 일 년간 겪어온 평범한 사람들과 같다고 할 수 있는가?

준경은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죽어도 마땅한 범죄자들이다. 물론 개중에는 억울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다는 이유로 죽지 말아야 한다면 자매는 왜 죽어야 했는가? 자신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이 아니다.

“악마!”

한 사람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곧 아무 말도 못 하게 되었다. 준경이 그의 입에 곡도를 쑤셔 넣었기 때문이다.

“내가 악마라면.”

준경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너희는 악마의 동조자다. 너희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우리는 당신을 모른다! 컥!”

다시 입가에 칼이 쑤셔졌다.

“한 가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너희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대신 똑같은 질문을 반복할 때마다 구멍을 찾아 하나씩 쑤셔주마. 처음에는 입이었지만, 그다음은 코가 될 것이고, 다음이 귀다. 마지막은 어디냐고?”

준경은 입가가 크게 베어져 넙치같은 기괴한 형상이 되어버린 사내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눈은 남겨둔다. 서로 어떻게 당하는지 똑똑하게 지켜봐야지. 끝까지 답을 말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그대로 떠날 것이다. 너희는 손가락질당하는 수모를 받으며 사막에 버려지겠지. 왜? 나는 너희의 피로 이렇게 적을 것이다. ‘내 아내를 죽인 쓰레기 같은 자들.’이라고 말이다.”

“…… 악마!, 네놈은 악마다!”

다시 준경의 칼이 그 입을 쑤셨다. 벌써 세 사람의 입을 찢었다. 남은 두 사람은 바들바들 떨며 준경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막기 위해 손을 휘저었다.

“하사신의 본거지는 어디냐? 이 도시인 것을 알고 왔다.”

“몰라, 모른다고! 나는 정말 모른다고!”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정말 모르는지 억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물까지 흘리며 준경에게 호소했지만, 손이 움직였고, 어느새 그의 입은 잠잠해졌다. 단지 고통스러운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너 하나 남았다. 그래 너희는 진짜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너희는 살아가면서 정말 억울한 일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나?”

평범한 사람들이 집에 칼을 들고 있을 리 만무했다. 아니 어쩌면 호신을 위해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담소를 나누면서 손을 뻗어 잡을 수 있는 곳에 놓아두지는 않는다.

준경은 신음이 조금 잠잠해지자 입이 잘린 네 명 중 한 명을 발로 차서 뒤집은 후, 칼을 엉덩이에 가져갔다.

그는 애써 몸을 흔들었다. 그는 뭉개진 입으로 뭔가를 계속 설명했는데 왜 마지막에 한다고 한 절차를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준경은 그대로 칼을 꽂았다. 남자가 낼 수 있는 최고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이 모두 몸서리칠 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준경은 피에 묻은 칼을 사내의 엉덩이에서 빼고 유일하게 입이 남은 자를 가리켰다. 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종교적 신념도 지금 이 순간 마비된 것 같았다.

“말해.”

그에게 있어 준경의 속삭임은 나직했지만, 천둥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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