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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53화 (53/257)

00053  (7) 척당불기(倜%26#20795;不羈)  =========================================================================

그는 장기전으로 나가기로 하고 근거지를 코니아에 마련하기로 했다. 코니아는 아나톨리아고원의 남쪽에 자리한 도시로 높은 해발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감히 쳐들어오기 어려운 곳이었다. 아타톨리아 남부를 기반으로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적극적으로 막으리라 자신의 이름 ‘사자의 검’에 맹세했다.

준경이 깨어났을 때는 코니아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미안하네, 엘카네스를 구하지 못했어.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형제여, 자네는 충분히 몫을 다했네. 자네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병사들이 자네가 빨리 깨어나기만을 기도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가? 아르슬란(사자)이란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바로 자네일세. 이제 자네가 깨어난 것을 보니 한숨이 놓이네. 나는 코니아에서 우마르를 만나 ‘물건’의 사용을 논할 것이네. 십자군에게는 끔찍한 형벌이 되겠지.”

물건이 또 언급되었다. 준경은 궁금했지만 코니아에 도착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회복이었다.

그런 이유로 십자군은 도릴라이움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난 후, 한동안 킬리지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더구나 킬리지 본영에서 발견한 식량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곧 악몽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나톨리아 서부를 석권한 킬리지의 영향력이 니케아의 상실과 잇단 패배로 절반 가까이 상실되기는 했지만, 남서부는 여전히 킬리지의 영역이었다.

대패한 경험을 되살려 일부 경기병을 십자군 이동 경로로 달리도록 하여 모든 주민을 대피시키고 약탈의 대상을 모두 태워버리는 초토화 작전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소수 부대를 편성하여 십자군이 향하는 길목마다 매복하고 귀찮을 정도로 집요하게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의 행군을 늦춰 식량 소비를 빠르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십자군은 분통이 터졌지만, 화살 공격만 하고 내빼는 경기병을 잡을 도리가 없었다. 거기에 지금은 뜨거운 여름이었다. 초토화 작전의 영향으로 물과 식량이 점차 떨어지기 시작하자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죽은 십자군보다 행군 중에 죽는 십자군이 더 많아졌다. 그들을 돕기 위해 인근 기독교 일부가 비용을 마련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내륙이 아닌 해안가였다면 그들의 승리를 담보로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의 상선들이 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다음 행선지이자 공격 예정지 안티오크를 향해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성서가 기록한 고귀한 안티오크를 이교도들로부터 해방하면 지금의 고난도 모두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해방은 곧 학살, 약탈과 동의어였지만 이교도를 많이 베는 것이 오히려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던 자들에게 ‘자비’란 힘센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식량이 부족해지자 같은 십자군 시체를 뜯어먹는 일도 벌어졌기 때문이다. 제대로 땅에 묻히기 위해서는 지인들이 같은 십자군을 상대로 흥정을 벌어야 할 정도였다.

한 달을 행군한 끝에 마침내 아나톨리아와 시리아를 구분하는 마지막 장벽, 타우루스 산맥을 앞에 두었다. 그리스 신화와 수메르 신화, 성서에 이르기까지 이 산맥은 여러 이야기를 노래해 왔다. 이 산맥 양편의 기후가 아주 다른 것이 사람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상상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십자군 수뇌부는 서둘러 산맥을 넘으려 했다. 산맥을 넘으면 지중해 최동부 해안이 펼쳐지고 해안가를 따라 먹음직스러운 도시들이 즐비했다.

도릴라이움 전투 이후 묵묵히 길 안내만 했던 타티키오스는 이쯤에서 자신이 개입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순순히 산맥을 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산맥을 넘는 것이 최단 거리지만 킬리지의 매복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평원과 달리 산에서의 매복은 치명적이다. 십자군 수뇌부는 반신반의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산맥을 넘어가겠다는 급진파와 산맥을 동쪽으로 멀리 우회하여 돌아가자는 신중파로 갈라졌다. 급진파는 상대적으로 소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거느린 군대만을 가지고 산맥을 넘겠다고 했고, 십자군 수뇌부는 그들에게 선발대의 자격을 주고 자신들은 우회를 결정했다.

타티키오스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결정하는 사이에도 며칠이 흘렀고, 십자군은 점차 쇠약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교도들은 십자군과 계속 부딪치며 양패구상으로 빠져들었다. 비잔틴에게는 여러모로 유익한 원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십자군 본대의 선두에 서서 우회로를 안내했다. 그리고 그곳은 로마의 옛 속주이자 카파도키아 왕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파도키아의 영역을 지나가자 그들은 킬리지에 버금가는 괴롭힘을 십자군에게 선사했다. 그러자 비잔틴과 타티키오스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안티오크까지만 다다르면 타티키오스를 죽여 버릴 것이라는 과격한 발언까지 공공연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나 타티키오스는 위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며 이건 여정 중에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이라고 태연하게 답했다. 십자군은 화가 나도 지금은 묵묵히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십자군 수뇌부는 산맥을 넘기로 한 자들이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었다면 억울하여 말도 못했을 것이다. 산맥을 넘기로 한 기사는 두 명이었는데 보두앵과 탕크레드였다. 이들은 수뇌부 중에서 비교적 젊은 편에 속하는 신진들로 패기가 있었다.

그들은 의욕적으로 산맥을 넘었고, 그곳에서 킬리지의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산맥을 넘자 십자군이 벌써 나타난 것에 놀란 중소도시들이 순순히 항복했다.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그들의 소문에 제풀에 놀란 것이다.

보두앵과 탕크레드로서는 그야말로 신의 축복이었다. 십자군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인근을 평정하며 기반을 다졌다. 한 달이 지나 십자군 본대가 이곳으로 도착했다.

그 사이 보두앵은 사랑하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는데 충격을 받아 십자군 탈퇴를 결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점령한 도시를 넘기는 조건으로 형인 고드프루아에게 병사를 빌려 동쪽의 에데사로 향했다.

에데사의 영주는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기독교 영주로 인근 이교도와 전쟁 중이었는데 아내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던 보두앵은 그를 도와 에데사를 진정한 기독의 성지로 만들겠다는 충동적인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그 사명감에 반한 영주는 그를 양자로 삼고 에데사의 차기 주인이 되도록 했다.

십자군으로서는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전력을 추스른 그들은 마침내 남하를 시작 니케아 공방을 치른 지 3개월 만인 1097년 10월 20일,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한 거대 장벽,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타티키오스는 안티오크의 거대한 모습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정확히 12년 전, 이곳까지가 비잔틴의 영토였다. 셀주크 왕조의 강력한 공세에 빼앗겼고, 절치부심하여 마침내 이곳까지 다다랐다. 이곳까지 함락시킨다면 자신이 십자군과 함께할 이유는 없어진다. 연락을 취했으니 해상을 통해 황제의 지원 병력과 수송 물자가 도착할 것이다. 니케아와 마찬가지로 안티오크 공방에 한발을 걸쳐 십자군에게 양도를 요구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수뇌부는 더 속지 않으리라 이를 갈고 있었다. 그들은 비잔틴의 수송 물자만 받으면 즉시 타티키오스를 위협하여 추방할 것을 몰래 결의했다. 그러면서도 태연히 타티키오스와 함께 믿음을 결의하는 기도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신은 이들의 기도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렇게 신만 알뿐 그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이미 준경이 그들보다 앞서 5일 전에 안티오크에 입성했다는 사실이었다. 갑작스럽게 원인 모를 병에 시달리게 된 킬리지를 대신하여 준경은 ‘물건’을 안티오크로 가지고 왔다. 십자군을 무너트릴 비장의 무기였기에 그것의 수송은 정말 뛰어나고 믿을만한 자가 담당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준경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인가?”

안티오크의 태수, 야기 시안은 사람 키만 한 크기에 두꺼운 천으로 둘둘 싸여 있는 물건을 어루만졌다. 그는 말리크샤 1세의 맘루크였는데 신임을 받아 7년 전에 이곳 총독이 되었다. 그러다 말리크샤가 죽고 제국이 분할되자 그는 자연스럽게 이 일대를 다스리는 지방 영주가 되었다.

십자군이 안티오크로 진군한다는 소식에 전전긍긍하며 각지로 파발을 보냈지만, 지원을 약속한 것은 소수였다. 그런데 지원을 부탁하지도 않았던 의외의 세력에서 지원군을 파병했다. 바로 롬의 술탄, 킬리지였다. 처음에는 준경을 킬리지의 맘루크 전령 정도로 대했던 야기 시안이었지만 지원군이라는 말에 자신의 처지를 비웃는 것이냐며 호된 질책을 했었다.

그러나 준경이 야기 시안의 근위병 열 명을 잇달아 꺾자 진지한 얼굴로 킬리지의 전언을 받아들였다.

“정말 믿을 수 없군. 이것이 성창(holy lance) 롱기누스라니.”

무슬림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물건이었지만 십자군에게는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 물건의 진품 여부가 의심스러웠지만, 위대한 학자 우마르가 보증했다는 말에 야기 시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요한복음 19, 34)

준경은 창의 내력을 들었을 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전설이라고 생각했다. 신성한 누군가를 죽였기 때문에, 또는 그 피가 묻었기 때문에 성창이 되었다니, 고의화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했다면 자다 깼느냐며 한심한 눈초리를 보냈을 것이다.

준경은 다시 코니아를 떠날 당시를 떠올렸다.

킬리지는 우마르와 재회한 자리에서 물건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우마르는 많은 피를 부르리라고 예견했으나 킬리지는 그것이 자신이 바라는 바라고 외쳤다.

과연 그 물건의 영향이었을까? 킬리지는 그 물건을 펼쳐서 직접 만져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열병에 걸렸다. 야기 시안 역시 처음에는 펼쳐서 모양을 보려고 했지만 킬리지의 사례를 듣고 포기했다.

“우마르가 조언했습니다. 안티오크 정교회의 총주교를 수감하고, 태수에게 충성스러운 시리아 정교회를 제외한 그리스,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추방하라고 말입니다.”

“우마르가?”

“안티오크 정교회의 총주교를 수감하기 전에 성창에 대한 정보를 살짝 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그는 추방당하는 정교회 신자를 통해 십자군에게 알려 안티오크의 점령을 재촉하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안티오크를 향한 십자군의 공세가 더욱 거셀 텐데.”

“십자군은 오랜 행군으로 처음보다 훨씬 약해졌습니다. 차라리 그들에게 무모한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진력을 소진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성창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가 차지하든 말썽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십자군의 자멸을 부르리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보세.”

야기 시안이 고민하는 동안 준경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킬리지에게도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이 불편하기만 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킬리지, 나는 너의 부탁을 이행했다. 부디 뜻을 이루길 바란다.’

준경은 이곳에 와서 기대하던 전투를 실컷 치렀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종교 갈등과 동료 간 탐욕, 불신, 배신을 적과 아군을 떠나 숱하게 보았다. 타티키오스와 결전을 치르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갈 때라고 생각했다. 킬리지는 자신을 두고 떠날 것이냐며 준경을 잡으려고 했지만, 준경의 뜻은 이미 굳었다. 이곳은 자신이 오래 머물만한 곳이 아니었다.

우마르는 그런 준경에게 한 가지 정보를 알려주었다. 동방의 이민족이 보물로 여기고 있는 민국실록의 원전이 있을만한 장소를 찍어 준 것이다. 그로서는 그것이 보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준경에게는 자매를 떠올리게 하여 오히려 아픈 생각만 남았지만 말이다.

준경은 우마르의 추측이 혹시 소동파가 알려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우마르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과 소동파는 오랜 시간 개인적인 연구를 통해 알아낸 것이라 자신과 소동파가 생각하는 장소는 다를 수도 있다고 했다.

소동파는 단정홍에게 5년 기한의 약속을 건 바가 있었다. 송이 답보를 거듭한다면 실록의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기 어려운 약속이기도 했다. 설마 그 사이에 모든 것이 답보만 할 수 있을까? 때로는 진보도 이루어질 수 있다. 꼬투리를 잡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함정이 있었다. 단정홍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나 약속의 주체가 소동파이기에 그런 수를 쓰지 않으리란 믿음을 가지고 약속에 응했다.

‘우마르는 두 장소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민국의 태조가 역사상 처음으로 열국을 모아 천하의 운명을 논했다는 고대 도시, 하마단. 또 한 곳은 의외지만 문무대왕릉.’

하나같이 신비의 장소였다. 그나마 문무대왕릉은 한 번 시간을 내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마르는 추측의 이유로 옛 고려 땅에서는 유일하게 신라의 공주만이 태조의 왕후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전까지 왕의 무덤 양식과 다르게 수중릉을 고집했다는 것을 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무덤의 축조 시기가 가장 수상하다고 말했다. 문무대왕릉은 681년에 만들어졌고, 당시는 당나라 3대 황제 고종이 집권하던 시기로 당 건국 초기였다. 고종은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까지 멸망시킨 왕이었다.

정관의 치가 민국의 치에 못 미친다는 일부 사가들의 의견에 분노하여 태종 이세민부터 시작된 민국 기록의 삭제가 절정에 달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우마르는 소동파가 어디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신의 추측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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