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1 (7) 척당불기(倜%26#20795;不羈) =========================================================================
“젠장!”
다른 의미로 킬리지 역시 자신을 욕하고 있었다. 군중십자군과는 다르다는 소식을 들었건만 자신은 여전히 그들을 아래로 보고 있었다.
본대 중 가장 먼저 도착한 육천의 병력과 합류하자 킬리지는 즉시 반격을 준비했다.
“내가 전술은 잘 모르지만, 본대가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모르는 소리, 적들은 승리했다고 방심할 것이 틀림없어.”
준경은 저렇게까지 날뛰는 킬리지를 처음 보았다. 이럴 때는 그가 하고 싶은 데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모사 엘카네스가 있었다면 킬리지를 제어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지금 본대의 후미를 지휘하며 안전한 퇴각을 돕고 있었다.
이미 해가 서산을 기울기 시작한 시간, 레몽이 이끄는 대응군을 공격한 것은 야간이 되었다. 레몽은 갑작스러운 킬리지의 공격에 당황하여 큰 손해를 입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쳐들어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준경은 감탄했다. 킬리지의 결단이 옳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승리의 여신은 킬리지의 손을 완전히 들어주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공성이 마무리되자 다른 십자군 지휘관들이 레몽을 돕기 위해 전투에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엄청난 유혈 전투 끝에 새벽이 되어서야 서로 물러났다.
니케아의 수비군은 그런 킬리지의 후퇴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 먼 서쪽에서부터 십자군의 후속 부대가 또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쪽은 이날 전투의 여파로 이틀간 암묵적인 휴전에 들어갔다. 그 사이 킬리지의 본대가 모두 도착했고, 십자군 역시 노르망디 공작을 위시한 1만 이상의 병력이 새로이 합류했다.
그때부터는 지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십자군은 둘로 나뉘어 한쪽은 공성을, 한쪽은 킬리지가 니케아와 합류하지 못하도록 갖은 저지를 펼쳤다.
10일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전장에는 비잔틴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도착했다. 십자군은 환호를 외쳤지만 알렉시우스 1세는 딴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십자군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돌려보낸 후, 휘하의 장수 두 명을 소집하였다. 그가 가장 믿고 있는 장수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투르크인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황제가 도착하기까지 이천 명의 지원군을 거느리고 후방을 지키고 있던 인물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코를 포함한 하관을 황금 마스크로 가리고 있었다.
또 한 명은 백전노장의 분위기가 풀풀 풍겼다. 그는 황제를 대신해 비잔틴 군의 총 지휘를 맡은 자였다.
“타틱(Tatic) 현재 상황이 어떤가?”
황제는 황금 마스크를 쓴 투르크 기사를 친근한 애칭으로 불렀다. 투르크 기사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타티키오스(Tatikios)라고 부르십시오.”
“자네는 그게 문제야. 나는 자네를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어릴 적 시절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정말 말썽꾸러기였지.”
타티키오스.
별칭, 비잔틴의 검이라 불리는 사나이였다.
어릴 적 식구가 전부 비잔탄의 노예로 붙잡혔다가, 섬기게 된 사람이 놀랍게도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알렉시우스 1세였다. 알렉시우스의 아버지, 존 콤네누스는 타티키오스가 알렉시우스와 비슷한 또래였기에 놀이 동무이자 장차 수족으로 만들어줄 결심으로 철저한 교육을 병행했다.
노예라고는 하지만 마치 과거 로마의 귀족들이 수족을 만들던 방식처럼 알렉시우스와 타티키오스는 한 가족처럼 자랐고, 타티키오스는 어느덧 자신이 투르크인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타티키오스는 알렉시우스의 명에 따라 여러 전장을 전전했다. 과거 타티키오스의 활약으로 니케아를 수복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다른 지휘관들의 방심 또는 어이없는 실책으로 놓친 적이 있었다. 귀족들은 누구도 타티키오스를 원망하지 않았다. 기독교에 대항하던 마니교가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을 때도 타티키오스는 철저한 승리를 거두며 알렉시우스의 권위를 지켰다.
그가 얼굴을 반쯤 덮고 있는 황금 마스크를 쓰게 된 것은 어린 노예 시절, 형벌로 코가 잘렸기 때문이다. 알렉시우스는 자신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그런 일을 당했다며 항상 안타까워하여 성인이 된 후 그를 주교(Prelate) 반열에 올려주었다.
“제가 생각하기에 니케아는 한 달 이내로 떨어집니다. 십자군 수뇌부가 판단을 잘했습니다. 술탄이 니케아와 합류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고 있어 니케아의 사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술탄이 니케아를 수복할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냐며 불안에 떨고 있지요. 그들이 아직 억척스러운 것은 십자군이 니케아를 점령할 시 다른 도시처럼 무차별 학살을 저지르고 약탈을 할지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입니다.”
“흥, 신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들 같으니라고.”
알렉시우스는 주어를 생략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두 장수는 그 비난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현재 기독교는 신성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이 서로 양분하여 이념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비잔틴의 기독교가 낙관적이고 융통성이 있으며 때로는 극단적인 면이 혼재했다면 신성로마제국으로 대변되는 기독교는 원죄 의식에 사로잡혀 음울한 면이 있었다. 그런 대립으로 서로가 파문을 주고받는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알렉시우스는 온전한 니케아를 원했지 약탈과 살육으로 얼룩진 폐허의 니케아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말없이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백전노장의 장수를 바라보았다.
“마누엘 장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협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잔틴 총사령관 마누엘 보투미테스(Manuel Boutoumites)는 황제의 질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답을 던졌다. 그는 비록 몇 번의 결정적 패전을 기록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전투는 승리로 이끈 노련한 장수였다. 현재 비잔틴에서 마누엘 정도의 군사적 업적을 지닌 이는 타티키오스 정도에 불과했다.
황제는 마누엘의 답변이 만족스러운지 팔짱을 끼며 등을 기댔다. 십자군 전쟁이 어찌 되든 자신은 상관없었다. 잃었던 옛 영토만 고스란히 찾을 수 있다면 어떤 시늉이든 할 수 있었다.
“누구와 협상을 하란 말이오?”
“알면서 물으시다니, 짓궂으십니다. 당연히 술탄과 해야겠지요.”
십자군이 니케아를 함락하고 분풀이 대상으로 삼는 것을 철저히 막아야 했다. 레몽 등 소수 지휘관을 제외한 대다수와는 비잔틴의 옛 영토는 돌려주겠다는 확약을 이미 받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안전한 처리를 위해서는 비잔틴 제국이 공성에 참여하여 먼저 성을 함락하는 공적을 세운다면 십자군도 함부로 움직일 명분이 없었다.
“비잔틴은 니케아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서부까지를 차지하는 것으로 더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 니케아에 거주하는 술탄의 일족도 몸값을 요구하지 않고 무사히 돌려 보내주겠다. 술탄에게 그런 약속을 해주고 대신 우리 군이 공격할 때, 니케아가 항복하도록 요구하자는 말입니다.”
“그들이 받아들일까?”
“적을 늘리기 싫다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지금의 술탄이 니케아를 주도로 삼은 것은 불과 삼 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큰 애착이 있을 리 없습니다. 아직 영토도 충분합니다. 우리가 보여준 호의만큼 분노의 화살은 십자군에게로 돌리게 되겠지요. 훗날 니케아를 다시 노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입니다. 니케아를 되찾는 즉시 그 준비를 시작해야겠지요.”
“역시 마누엘이로군. 그 말이 옳다. 타티키오스!”
“하명하십시오.”
머리를 조아리며 명을 기다리자 알렉시우스는 양 손바닥을 탁자에 내려치며 외쳤다.
“십자군과 상의하여 우리가 한 번쯤은 전면에 나설 것임을 통보하게. 마누엘 장군은 은밀히 술탄에게 사자를 보내 협상을 진행하게. 타티키오스와 날짜를 맞춰 그날을 니케아 함락의 날로 한다. 성을 점거하는 즉시 십자군의 약탈과 학살에 대비해 모든 시민에게 문을 걸어잠그고 집안에 있으라고 명하고, 십자군의 성 출입을 막는다. 시간을 벌기 위해 수뇌부는 나에게 보내도록 하고. 모두 알아듣겠나?”
두 장군이 군례를 올리자 알렉시우스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날 저녁 비잔틴 제국 진영에서 킬리지에게 향하는 전령이 십자군 누구도 모르는 채로 소리소문없이 출발했다.
“내가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하는가!”
킬리지는 알렉시우스의 친서를 읽어보고 길길이 날뛰었다.
엘카네스는 그런 킬리지를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십자군의 숫자가 3만 5천에서 5만으로 늘어나면서 상대하기 난감해진 것이 사실이긴 했다. 자신들 역시 영지를 쥐어짜 병력을 뽑아내고 있었지만, 그 숫자를 따라가지 못했다. 더구나 섣불리 원정을 단행하며 다니슈멘드 왕조를 자극한 탓에 동부 방면의 영지들이 야금야금 먹히고 있었다.
킬리지가 롬 술탄국을 부활시키고 술탄에 오른지 겨우 3년 밖에 되지 않아 기반이 너무 약했다. 남은 영지라도 다독이며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킬리지는 확실히 젊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직접 친정에 나서 대규모 수송까지 성공하자 니케아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이미 킬리지에게 간언한 바가 있었다. 니케아에 연연하다가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킬리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며 계속 공격을 했고, 일시적인 성과를 얻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적과 양패구상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대로는 자멸뿐이었다.
“킬리지, 너답지 않다.”
팔짱을 끼고 잠자코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준경이 나섰다.
“나답지 않다고?”
“네가 니케아를 얻은 것이 고작 3년 전이다. 천 년을 이어가는 왕국도 위험한 역사는 있다. 일시적인 후퇴라고 생각해라. 더구나 비잔틴 황제는 시민의 학살을 막고 너의 가족과 재보를 조건 없이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너라면 반대의 처지에서 그럴 수가 있었겠느냐? 땅도 사람이 존재해야 값어치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겨야 할 때다.”
“끄응.”
킬리지는 허탈한지 자리에 앉았다. 승승장구를 달리던 자신에게 이런 시련이 닥쳐오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사람을 남겨라…….”
깍지를 끼고 한참을 생각하던 킬리지는 전령에게 소리쳤다.
“황제에게 전해라. 수락하겠다고.”
너무나 전격적인 돌변에 전령도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대신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그깟 3년간 모은 재보 따위는 필요 없다. 대신 나를 따르기를 원하는 관리들은 모두 니케아에서 내보내라. 그 정도는 황제에게 매우 간단한 일이겠지!”
원래는 가족과 재보를 무사히 보내주겠다는 것이었으나 킬리지가 재보를 관리로 치환하자 전령은 과연 그것이 이득인지 머리를 굴렸다. 얼마나 많은 관리가 킬리지를 쫓을지 모르겠지만 니케아의 재보는 짐작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십자군들이 농담 삼아 하는 말이 니케아가 떨어지면 재물이 가득 담긴 창고로 먼저 달려가겠다고 했을까!
킬리지를 따르는 자들이라 봐야 대부분이 투르크 인들일 것이니 차라리 깨끗하게 털어내는 것이 황제에게도 좋을 것이라 예상했다.
전령이 약속하자 킬리지는 거침없이 날짜까지 정해버렸다.
“6월 16일과 17일 사이, 공격을 감행하라. 비잔틴 군이 공격하는 탑의 방비를 허술히 하도록 지시하겠다. 6월 18일에서 19일 사이에 내가 니케아 점령을 인정하고 강화를 요청하는 사자를 보내겠다. 동의하는가?”
전령은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어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아직 내가 어리고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준경, 나와 함께 가겠는가?”
“킬리지, 너뿐만 그것을 느낀 것은 아니다. 잘 부탁한다.”
준경은 니케아 공방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압도적인 무력도 다수가 톱니바퀴처럼 이루어지는 진형에서는 별다른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다. 가끔 빈틈을 노려 괴물 같은 전공을 세웠지만 그건 개인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전공이었지, 천 단위를 넘어가는 전투의 전황을 바꿀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침내 약속했던 날이 밝았다. 지지부진한 전황에 분노한 알렉시우스 1세가 비잔틴의 검이라 불리는 타티키오스와 근위군을 투입시키겠다고 천명하자 십자군은 용단이라며 반겼다.
그러나 어떤 지휘관도 이 개월을 버틴 니케아가 비잔틴 군 참전 하루 만에 함락되리라고 예상한 자가 없었기에 믿기지 않는 현실이 눈앞에 닥쳐왔을 때, 그 충격은 더욱 컸다.
공세를 퍼부은 지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타티키오스는 성벽을 넘어 비잔틴 군의 진입을 도왔다. 다른 방면의 십자군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지지부진한 사이 이루어낸 놀라운 성과에 ‘아무리 비잔틴의 검이라지만 이렇게 강했나?’ 하는 의심이 십자군 지휘관 사이에서 맴돌았다.
타티키오스가 니케아 내성까지 점령하여 술탄의 가족까지 포로로 잡았다는 소식에 의심에 쌓인 수뇌부와 달리 십자군은 크게 환호성을 울렸다.
마침내 니케아 성벽에 백기가 올라갔고, 타티키오스가 그들의 항복을 수락했다. 이교도를 모두 도륙해야 한다는 수뇌부의 결정이 채 전달되기도 전에 이루어진 조치였다.
비잔틴 총사령관 마누엘이 황제를 호위하며 니케아로 진입했고, 병사들이 성문을 단단히 에워싸며 신나서 약탈에 나서려던 십자군 병사의 출입을 막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승리의 대가를 비잔틴이 모두 독차지할 셈인가!”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싸운 대가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허무한 현실에 수뇌부는 항의 방문을 결심했다. 그러나 황제는 한술 더 떠서 일방적인 포고문을 발표했다.
“니케아에 들어오는 십자군은 열 명 이상 무리지어 다닐 수 없다. 니케아의 모든 생명과 재산은 십자군과 비잔틴의 약속에 따라 비잔틴으로 귀속되어 비잔틴의 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젠장, 이걸 말이라고 하는가!”
레몽은 당장 니케아 내성으로 달려가 황제의 모가지를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비잔틴은 병사를 성벽에 배치하고 여차하면 십자군을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식량 지원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난처한 것은 십자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