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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50화 (50/257)

00050  (7) 척당불기(倜%26#20795;不羈)  =========================================================================

사실 중장기병은 여러모로 약점이 많은 병과다. 유목민들이 경기병을 선호한 것도 말을 다루는 것의 으뜸은 고도의 기동성이지 타격력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럽에서는 왜 중장기병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기동력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몽은 이제 그 장점을 이번 전투에서 유감없이 발휘할 작정이었다. 승리를 위해 내심 탐내던 물건까지 비잔틴 제국의 지원병들이 합류함으로써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기욤.”

“네, 숙부님.”

오백의 게르만 기병과 킬리지가 이끄는 이천의 투르크 기병이 격돌하기 시작했다. 투르크 기병은 멀찍이서 빙빙 돌며 화살을 쏘았지만 육중한 사각방패와 철갑으로 전신을 보호한 게르만 기병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게르만 기병 역시 경기병보다 속도가 느려 그들의 선회를 쫓아가지 못하고 점차 한 덩어리의 형태로 띠의 중간 부분을 도려내기 위해 예측 기동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오천의 보병이 산개하며 두 줄의 날개가 되자 마치 V자 형태 중 아래 꼭지 부분만 뚜껑이 열린 형상이 완성되었고 압박하듯이 전진을 시작했다.

“반드시 명심해라. 다수의 전투에서는 기사와 병사가 서로 떨어져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중장기병은 경기병과 달리 기동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투르크 기병이 기동력을 앞세워 선회 후 분산 돌격, 또는 화살을 퍼부을 때, 보병은 사슴뿔 형태로 방진을 이루고, 기병은 그 안에서 노닐며 오직 정면의 적만 상대하면 된다.”

일방적으로 게르만 기병을 몰아붙이던 킬리지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게르만 기병은 몇 차례의 공격 시늉 후 자신들을 미끼로 사용하여 선발대의 시선을 묶어 두었다. 그 사이 동과 서에서 방패 보병, 궁수가 열을 맞추어 점차 가운데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V자처럼 보이던 진형이 H처럼 변하면서 동서에 보병, 그 가운데 게르만 중장기병이 버티는 형상이 되었다. 그리고 A자 형태로 북쪽을 봉쇄하며 점차 좁혀 들기 시작했다.

게르만 기병이 실질적으로는 단단히 방비하며 투르크 기병의 예봉을 무디게 만들고, 그 사이 보병의 진형이 구축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공세에 나서자 준경은 웃음이 나왔다.

킬리지는 그런 준경의 웃음에 자신도 영문모를 웃음을 흘렸다. 조금 위험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의 진형을 상대해본 적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다. A자 형태로 봉쇄하는 것은 공격로를 한 곳으로 제한시켜 중장기병과 격돌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작전이었지만 저들의 중장기병 숫자가 자신들보다 너무 적었다. 작심하고 도망칠 각오를 한다면 얼마간의 피해야 있겠지만, 최소한 같은 피해를 줄 자신은 있었다.

“이제 이것을 써보겠군.”

준경은 곡도를 자신의 등 뒤에 꽂고, 안장에 걸려 있던 도리깨를 꺼내 들었다. 처음에는 왜 이런 무기를 쓰나 했다. 그러나 중장기병을 몇 차례 상대하면서 그들의 갑옷을 뚫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말에서 떨어트리기 위한 둔기(鈍器)가 필요함을 실감했다. 경기병과 달리 중장기병은 말에서 한 번 낙마하면 그 충격이 상당했다. 중압감에 사망까지 이를 수도 있었다. 발로 차고 방패를 밀어내고 몇 가지 방법을 써보았지만, 원심력을 이용해 후려치는 도리깨만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왔다. 준경은 수패의 끈을 왼팔에 고정했다. 기사들은 활을 쓰지 않지만, 보병은 활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창은 두꺼운 철 재질의 방패가 아니고서는 수패는 일격에 부서질 정도였기에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할 정도였다.

“내가 앞장서지!”

도리깨를 휘두르며 남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킬리지는 준경의 호쾌한 모습에 절로 신이 나는지 호탕하게 웃으며 뒤를 쫓았다.

“코레아.”

로베르의 시선은 정면에서 미친 듯이 달려오는 준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놈에게 조금 전까지 다섯 명의 기사를 잃었다. 너무나 어이없었던 것은 갑옷이 덮여 있지 않은 말의 눈과 귀를 노려 말에서 낙마시키는 수법을 썼다는 것이었다. 이후 같은 방법에 당하지 않게 되었지만, 기사와 겨루지 않고 설마 말을 먼저 공격하는 놈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기사의 긍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쓰레기 같은 놈.”

산맥 깊숙한 곳에 살며 아직도 원시 부족처럼 지내는 일부 프랑크족이나 게르만족을 상대할 때도 사람 대 사람의 대결이었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말을 공격하는 자는 없었다.

로베르는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히 죽여주리라고 생각했다.

“모두 준비해!”

그의 명령에 각자 품에 손을 넣어 솜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말의 귀에 단단히 틀어막았다. 준비가 끝나자 로베르의 창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가장 선두에 섰던 준경은 로베르의 행동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말의 귀를 막다니? 이건 마치 자신이 말을 위협하여 재미를 보았던 것처럼 같은 행동을 하겠다는 예시가 아닐까? 준경은 뒤쫓는 킬리지에게 외쳤다.

“조심해! 저들이 말의 귀를 틀어막았다!”

“뭐? 잘 안 들린다!”

워낙 빠르게 달리는 상황이라 킬리지는 준경의 목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투하!”

레몽의 손이 떨어지자 동서로 나뉜 보병 뒤편에서 허공으로 갈색 항아리 수십 개가 동시에 떠올랐다. 마치 새총 놀이를 하듯 네 명의 병사가 달라붙을 정도로 큰 새총 형태의 병기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저건?”

킬리지는 깜짝 놀랐다. 그는 바로 손을 뒤로 흔들며 주의를 당부했다.

“그리스의 불이다!”

그러나 충고는 너무 늦었다. 항아리가 바닥에 떨어지자 ‘쨍그랑’ 소리, 뒤를 이어 진한 연기, 폭음과 함께 주위에 화염을 생성했다.

“으악!”

달리는 길 여기저기에 폭음과 연기, 화염막이 생기자 말들은 깜짝 놀라 앞발을 들었다. 순식간에 투르크 기병의 대열은 엉망이 되었고, 로베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교도에게는 죽음을!”

로베르는 아껴두었던 힘을 대방출하며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게르만 기병들 역시 호응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불을 가장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대열이 삼분지 일쯤 지나갔을 때를 노렸던 것이라 준경이나 킬리지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니 절로 분노가 일었다.

A자 형태로 뒤를 단단히 막은 보병 중에서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피어 올렸다. 불길과 폭염, 연기 등에 막히거나 주춤한 사이 투르크 기병은 화살에 그대로 노출이 되었다. 경기병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천 옷을 입는 그들이었기에 화살 세례에서 멈춰 있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이런 수를 쓸 수도 있었구나!”

준경은 투르크 기병의 손실이 아깝긴 했지만, 그건 킬리지의 친구로서 느끼는 얄팍한 감정이었다. 그것보다 그리스의 불이라는 신무기를 직접 체험해보았다는 것이 더 흥분되었다. 만약 저 무기가 송이나 고려에서 쓰인다면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었다.

‘퍽!’ 소리와 함께 도리깨의 첫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한 번의 휘두름에 한 명씩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포위해서 잡아!”

여덟 방향에서 장창이 준경을 향해 날아들었다. 준경은 등자를 찬 발에 힘을 주며 안장을 밟고 일어섰다.

“아직 내가 부족함을 인정하마. 미안하다.”

일 년 가까이 자신과 동고동락한 갈색마는 자신의 운명을 짐작이라도 한 것인지 울음을 터트렸다. 여덟 개의 장창이 찔러 들어오자 준경은 정면에 보이는 기사를 향해 훌쩍 날아올랐다. 투구에 가려진 게르만 기사의 눈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다시 도리깨가 휘둘러졌고, 게르만 기사는 두꺼운 방패를 움직여 막으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비명과 함께 말에서 굴러떨어지자 준경은 말 고삐를 힘차게 잡아당겼다.

“날 따라와!”

누군가를 지칭하지 않아도 킬리지와 투르크 기병들에게 보내는 외침이었다. 중갑을 두른 말은 한번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무시무시한 기세로 정면을 뚫기 시작했다. 준경을 막기 위해 장창을 들이댔지만, 오히려 장창을 옆구리에 끼고 도리깨로 어깨를 때려 상대를 낙마시켰다. 그렇게 얻은 장창을 힘껏 정면을 향해 던져 달려오는 상대를 지체시켰고, 준경은 말이 거품을 물 정도로 힘껏 고삐를 채찍질했다.

그리고는 안장에 다시 발을 디디고 올라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단순한 제자리 뛰기였지만 말은 앞으로 좌충우돌하며 달려나가 밀집한 보병대를 들이받았다.

“여기!”

킬리지는 주인 잃은 말의 고삐를 낚아채 준경에게 건네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고삐를 낚아채며 등자의 한쪽에 몸을 기댔다.

“저런 것이 가능한가!”

로베르는 신출귀몰한 준경의 움직임에 오싹할 지경이었다. 포위된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들의 말을 훔쳐 타고 이제는 말의 한쪽에 기대어 랜스 차징을 시도하는 기사의 옆을 스치며 발로 밀어 낙마시키는 재주를 부렸다.

킬리지 역시 놀랐다. 1년 사이에 준경의 말 다루는 솜씨가 거의 곡예 수준에 다다른 것이다. 꾸준한 노력과 십자군 선발대를 상대하며 익힌 솜씨의 결합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른 성장세는 처음 보았다.

“나도 질 수는 없지.”

킬리지도 용맹하게 칼을 휘두르며 투르크 기병을 독려했다. 그때, 레몽의 손이 다시 내려갔다.

“젠장 또 온다!”

허공을 가르며 그리스의 불이 쏟아지고 있었다. 레몽도 이것이 쓸 수 있는 마지막 한 수였다. 될 수 있으면 남겨두고 싶었지만, 술탄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지금 쓰지 않으면 대체 언제 쓴단 말인가?

“빌어먹을!”

킬리지는 절로 욕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스의 불이라는 것을 이야기만 들었지 자신도 처음으로 겪는 물건이었다. 더구나 해상이 아닌 육지에서 겪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불꽃이 문제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폭음이 문제였다. 말들은 처음 듣는 폭음에 놀라 뒷걸음질치거나 아예 달리는 것을 주저했다.

이천에 달하던 투르크 기병이 어느덧 절반 이하로 줄어들고 말았다. 보병이 점차 밀집하고 로베르가 이끄는 기병이 우왕좌왕하며 대열을 이탈한 투르크 기병을 손쉽게 도륙했기 때문이다. 멈춰선 경기병은 결코 중장기병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다 필요 없다. 저놈만 잡을 수 있다면!”

레몽과 로베르는 이심전심이었는지 다른 장소에서 같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들은 준경과 킬리지, 그 외 살아남은 기병들을 쫓았다.

“막아!”

준경은 마지막 저지선을 달리고 있었다. 방패와 창으로 단단히 길을 막은 보병대가 눈에 들어왔다. 뒤를 힐끔 보니 로베르가 이끄는 게르만 기병이 죽도록 달리고 있었으나 속도 차이 때문에 뒤처져 있었다.

준경은 도리깨를 던져 버리고 등 뒤에서 곡도를 다시 뽑았다. 방패와 창으로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십자군과 격돌하는 순간 준경은 곡도로 사방을 휘저었다. 순식간에 준경 정면에 있던 네 개의 창날이 잘려 떨어졌다. 그리고는 말 고삐를 힘껏 집어 당겼다. 말이 십자군 머리 위에 진한 그림자를 만들며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 뒤로도 창은 정면과 허공을 향해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준경은 말이 창에 박히는 순간 등자에서 발을 빼며 몸을 뒤로 회전했다. 이미 선두에 선 자들의 창날을 제거했기에 준경은 닿는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별다른 타격은 없었다. 착지하자마자 바로 전면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어림잡아도 십여 명의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말 배에 창이 박히면서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갸우뚱 쓰러지며 내는 아우성과 준경의 전면에 있던 십자군이 칼을 맞으며 쓰러지는 소리였다. 준경은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쓰러진 자들을 밟으며 아직도 남아 있는 자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방패가 보이면 발로 찼고, 창이 보이면 창날을 잘랐다. 그렇게 전신이 드러나면 찔렀다. 방패병이 상처입고 방패를 떨어뜨리면 방패를 주워 있는 힘껏 밀어붙여 길을 만들었다.

그랬는데도 로베르와의 거리가 여전히 존재했다. 그만큼 준경의 행동은 빨랐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레몽도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악마가 있다면 저놈을 가리키는 말이겠구나.”

생각해보니 어쩌면 진짜 악마의 힘을 가진 자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아니 악마가 아니더라도 악마여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덜 추궁을 받을 테니까.

“준경!”

준경이 순식간에 정면에 길을 내자 킬리지는 말이 없는 준경을 자신의 뒤에 태우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손과 손이 서로 맞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준경은 달리는 말의 탄력을 이용해 킬리지의 뒤로 올라탔다.

이대로 달리면 니케아가 코앞이지만 지금은 공성이 한창이었다. 병력도 이제는 수백에 불과해 자칫 십자군에게 협공을 당할 수 있었다. 킬리지는 우회하여 다시 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로베르가 소리 지르며 쫓으려고 했지만 레몽은 전령을 보내 로베르에게 회군할 것을 명령했다. 비록 술탄과 코레아를 놓치기는 했지만, 최소한 일천 이상의 투르크 기병을 죽였다. 자신들도 합치면 그에 근접할 것 같았지만, 보병을 기병과 같은 대접으로 비교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승리였다.

“으아아!”

로베르는 준경과 겨루고 싶었지만, 그리스의 불로 말미암아 의도치 않게 갈라진 전장 때문에 겨룰 기회를 상실했다. 도저히 화가 나서 이렇게라도 소리치지 않고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오백 명의 기병 중 삼십 명이 준경 한 명에게 희생되었던 것이 이유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명백한 승리였지만 그 한 명에게 당한 것은 강한 치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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