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7) 척당불기(倜%26#20795;不羈) =========================================================================
(7) 척당불기(倜?不羈)
긴 쇠꼬챙이에 고기를 차곡차곡 꿰어놓고 불에 달구는 광경을 준경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고려나 송에서도 꼬치 요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리된 것을 먹기 좋게 끼워파는 용도였지 요리 전부터 꼬치를 활용하지는 않았다. 칼로 고기를 얇게 썰어 동그랗고 납작한 빵 속에 넣어 야릇한 향신료까지 첨가하니 고향에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맛을 느끼고 있었다.
“되네르 케밥(Doener kebab)이라고 하네. 입맛이 맞을지 모르겠군. 형제여.”
준경과 킬리지 아르슬란은 며칠 사이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동갑이기도 했고 서로가 해낸 업적에 존경을 품었기 때문이다. 13살부터 왕권을 찾기 위해 정략혼을 생각했을 정도로 시세 판단이 빠른 킬리지, 휘하 맘루크(Mamluk, 노예부대) 열 명과 겨뤄도 전혀 밀리지 않는 강함을 가진 준경. 평범한 이라면 한창 철없이 뛰어놀거나 가업을 잇고 있을 17세의 소년들이었다.
준경이 딱 하나 아쉬웠던 것은 킬리지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도 알았다.
롬 술탄국은 기본적으로 이슬람 수니파에 속하지만 시리아 셀주크 왕조보다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서쪽에 인접한 비잔틴 제국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비잔틴 제국이 아나톨리아나 시리아 일대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공격해올 때면 이들 기독교 출신을 용병으로 삼았다고 했다. 언제든지 적으로 돌변할 수 있음에도 그들을 놔두는 킬리지의 생각이 준경은 궁금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비잔틴 제국이 만지케르트에서 크게 패한 적이 있었네. 비잔틴은 동서를 잇는 막대한 교역 세금을 활용해 군사력 대부분을 용병으로 충당한다네. 거기에다 그들은 신무기인 ‘그리스의 불’이 함께하고 있지. 적들조차 돈을 주고 용병으로 고용하여 승승장구하던 비잔틴에 대항해 셀주크 역시 막대한 돈을 풀어 그들이 고용한 용병을 전투 중에 모두 매수해버렸네. 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사로잡히는 수모를 당했지. 용병 제도의 허점을 상대가 이용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하다니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그 전투 때문에 비잔틴 제국은 자존심이 상했고, 결국 지금의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네.”
“어이가 없군.”
송이나 고려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용병을 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들을 아예 주력으로 사용하다니, 그것도 이미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전통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리스의 불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아직 우리도 그 정체를 모르네. 비잔틴이 철저하게 그 정체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지. 300년이 넘도록 각국이 비잔틴을 염탐했지만, 누구도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그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
설명을 계속 들은 준경은 깜짝 놀랐다. 항아리에 걸쭉한 물같이 들어 있는 무기라 하여 기름을 넣은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리스의 불은 항아리가 깨지면 그 주위가 즉시 발화를 일으킨다고 했다. 더구나 물로 꺼지지 않는다는 것이 해전에서는 치명적이었다.
“안을 격자 형태로 나눠 불씨와 기름을 따로 넣어 실험해보기도 했지만 어림도 없더군. 겪어본 이들은 항아리에는 오직 액체만이 담겨 있다고 하니 앞으로도 그 정체를 밝혀내지 못하는 이상 대규모 해전을 섣불리 벌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지.”
준경이나 킬리지는 모를 것이다. 673년 첫 등장부터 무려 800년에 가까운 세월을 비잔틴 고유의 기술로 남아, 이슬람 침공의 위기에서 번번이 구원해준 무기라는 것을.
그때 중년의 무슬림 한 명이 킬리지에게 다가왔다. 그는 이곳에서 준경이 우마르 다음으로 가장 얼굴을 많이 마주친 사람이기도 했다.
“엘카네스, 군중십자군의 소식을 가지고 왔나?”
엘카네스는 킬리지가 롬 술탄국의 왕이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한 모사였다. 그는 매일같이 급변하는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한 후, 의견까지 내는 중요한 측근이었다.
“피에르라는 놈은 완전히 미친놈입니다. 군중을 통솔하기는커녕 성전을 위한 식량을 바치지 않았다고 같은 기독교인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무슬림 아이들에게는 신벌이라며 팔다리를 찢어 죽이고, 나무말뚝에 꽂아 화형을 시킨 사례도 있다는군요.”
킬리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분노한 호랑이의 눈빛이었다.
“기독교는 어찌 보면 우리와 한 형제 같은 종교다. 내 신하 중 기독교도도 적지 않다. 군중십자군은 그냥 종교를 악용하는 쓰레기들일 뿐이다. 기필코 가만두지 않으리라.”
“이미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수뇌 중 한 명에게 막대한 이득을 약속하고 섭외에 성공했으니 군중십자군은 결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준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군중십자군의 대다수는 평범한 백성이라고 했다. 그런 백성이 그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종교적 신념 때문에? 같은 기독교도를 죽이고, 어린아이까지 무차별 학살한다는 것은 아무리 신념이라고 생각해도 보아주기 어려운 행위였다.
엘카네스는 준경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신념이 아닙니다. 무지입니다. 무지가 악을 부르는 것이지요.”
“알지 못하기에 악을 행한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의지에 조금도 기댈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 없이 광인 피에르의 말에 복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악이 아니면 무엇이 악이겠습니까?”
준경은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며칠이 훌쩍 지났다. 킬리지는 마침내 출전할 때라며 결연한 표정으로 투르크 기병과 맘루크를 총동원하였다. 3만의 정예병이었다. 그러나 군중십자군은 8만에 달했다. 그럼에도, 전혀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 병사들이 진형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진다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네.”
준경은 며칠 사이 킬리지와 엘카네스의 움직임을 보며 여러모로 감탄하고 있었다.
군중십자군은 선봉과 본대로 나뉘어 있었는데 선봉을 책임진 것은 기사 레이날드였다. 선봉과 본대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한 엘카네스는 피에르가 있는 본대로 사람을 보내 은밀히 소문을 퍼트렸다.
-선봉을 맡은 기사 레이날도가 이미 니케아를 함락하여 금은보화를 독차지하고 있다.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한 번쯤 확인절차를 거쳤을 것이다. 그러나 군중십자군은 지휘자 피에르부터 시작하여 광기의 집단이었다. 그들에게는 어느 순간부터 종교적 신념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성은 마비되었고, 당장 선봉을 쫓아야 한다며 미친 듯이 행군을 시작했다.
1096년 9월 말, 그들은 니케아 인근에 도착해서 기사 레이날드를 만난 후에야 그것이 거짓 소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들이 움직이면 능히 니케아를 함락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당장에라도 금은보화가 자신들의 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들은 니케아를 향해 진군했다.
“이성이 마비된 시체들.”
준경은 평원을 가득 메운 군중십자군을 보며 연민이 떠올랐다. 적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자들이었다. 지금 저들은 스스로 죽음을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킬리지의 손이 허공을 갈랐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삼만의 정예군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복도 없는 전면전의 형태로 전열을 맞춰 뚜벅뚜벅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군중십자군은 욕심 가득한 얼굴로 뛰고 있었다. 서로가 부딪칠 때쯤이면 기운이 소진되어서 창이나 제대로 겨룰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신이 우리를 돌보신다!”
그 와중에 터진 기사 레이놀드의 외침은 군중십자군으로 하여금 헛된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격돌했다.
“내 상대는 영주 고티에다.”
킬리지가 선물로 준 건장한 갈색마의 배를 등자로 힘껏 때리며 준경은 달려나갔다. 인간 같지도 않은 상대를 도륙하고 싶었지만 양규 장군이 수패에 적은 ‘대인불사’란 문구를 되새겼기에 참는 것이 가능했다. 광기에 젖은 이들에게 광기로 대항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는 자신의 길을 걸어갈 따름이다. 그리고 그 길은 진정한 무인으로서의 완성이었다.
군중십자군의 지휘자는 크게 세 명으로 나뉜다.
은자 피에르, 베르사유의 영주 고티에 생자부아, 기사 레이날드였다. 준경은 그중 고티에를 상대로 결정했다. 원래대로라면 기사 레이날드가 상대될만하겠지만 엘카네스가 포섭한 인물이 레이날드라는 말에 목표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들었던 레이날드의 열렬한 독려는 사실은 도망의지를 없애기 위한 기만이라 할 수 있었다. 준경은 말을 달리면서도 어째서 이런 자들이 자칭 ‘성지 해방’을 외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누가 이런 자격을 이들에게 부여해줄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그리고 안도했다. 최소한 자신의 고국, 고려는 불교를 조건 없는 신봉과 유혈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8만의 대군이 3만을 포위한 것처럼 여겨졌을 때, 군중십자군은 당장에라도 니케아의 성문을 열고 금은보화를 챙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기분 좋은 상상은 거기까지였다.
“화살이다!”
3만의 정예병 중 후방의 궁수대가 일제히 화살을 피어 올렸다. 그들은 각각 20발이 정량인 화살통을 3개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전부 소진할 때까지 피어 올리자 평원은 삽시간에 지옥도로 변했다.
애초부터 제대로 된 장비가 없어 약탈로 이곳까지 이른 군중십자군이었다. 헝가리와 베오그라드를 지나면서 제대로 된 정규군을 만나면 큰 손해를 입었던 과거가 다시 떠올랐다. 잘못된 신앙심에 막혀 안 보이던 현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고 있다. 그들이 아나톨리아에 상륙하면 함께 행동하라.
각지의 십자군들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집결하기 시작하면서 지휘관 중에는 군중십자군의 지나친 행동을 우려하는 자도 있었다. 교황의 특사로 십자군에 파견된 아데마르 교주는 그런 우려를 이미 피에르에게 전달한 바가 있었다.
화살을 피해 산개한 군중십자군은 투르크 기병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맘루크는 퇴로를 막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자들을 상대로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묵묵히 도륙했다.
이제 금은보화의 꿈은 완전히 사라졌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우선이 되었다. 피에르는 추종자들과 도망을 선택했다. 전장이 워낙 넓어 두 지휘관은 피에르가 도망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기사 레이날드는 엘카네스와의 약속대로 ‘신의 이름으로!’를 쉬지 않고 외치며 휘하 군중십자군의 신앙심을 고취하며 끊임없이 공격시켰다.
바르세유의 영주, 고티에는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성자라 믿었던 피에르는 온데간데없었고, 기사 레이날드는 미친 듯이 공격을 주도했다. 혼란에 빠져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는 중에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하나의 인마(人馬)를 보았다.
맘루크나 투르크 기병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특이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치 실크로드를 건넌 동방의 대상인들을 연상케 했다.
“뭣들 하는가? 막아!”
영주의 명에 곁에 있던 다섯 명의 기사들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자는 경기병이었고, 자신의 기사들은 중기병이었다.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라 자신했다.
“으악!”
자신감은 불과 몇 번 눈을 깜빡일 사이에 패배로 판가름나고 말았다. 창 하나 막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동그란 방패를 절묘하게 움직여 돌파를 막아내고는 길게 휘어진 도와 방패, 발을 모두 동원하여 차례로 기사를 낙마시켰다.
그리고는 단숨에 자신에게 다다랐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 말 중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네놈이 고티에인가.”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자신이 짐작했던 대로 아마도 동방의 용병이 아닐까 싶었다. 설마 자신들을 막기 위해 동방에서 용병을 끌어들였다니? 고티에는 이 사실을 콘스탄티노플로 알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자신에게 도를 겨누는 이방의 기사는 흥분으로 가득한 전장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차가운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고티에는 목이 잘리는 순간 깨달았다. 그 차가운 눈빛은 뱀이 개구리를 노리는 그것과 같았다. 자신들은 인간이 아니라 한낱 먹잇감에 불과한 것이다.
왜 이곳까지 왔던가? 성지를 되찾아 두터운 신앙심을 보이기 위한 자발적 봉사였다.
“신이시여!”
고티에는 울부짖었다. 그러나 신의 대답은 없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남프랑스 제후들의 연합군을 시작으로 무려 9만의 병력이 운집해 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십자군이 전부 모이면 60만이 될 것이라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언장담에 어떡하면 이들을 자신 휘하에 둘 수 있을까 갖은 궁리를 다 짜내고 있었다.
십자군이 처음 명분으로 내걸었던 신앙 회복과 성지 탈환은 시작부터 그 뜻을 상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