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6 (6) 유월비상(六月飛霜) =========================================================================
이틀간 전방위 설득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김한충과 강증은 준경까지 나서서 증언하자 정교하게 짜맞춘 이야기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이 모두 거짓이었다면 이들이 속아 넘어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고려가 안남국과 친교를 맺은 사실을 송이 안남국으로 책봉사를 보내기 전까지 비밀로 해주겠다는 약속은 김한충과 강증, 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관운이 늦어 마흔이 넘어서야 승급하기 시작한 그들이었기에 불운한 일로 질책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또한, 숙종과 신료들이 고민스럽게 생각하던 송나라 사절 문제를 이쪽에서 먼저 해결해주겠다고 하니 그 역시 반가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준경과 우마르의 등장으로 왕의 밀명을 알게 된 인물 소수가 되었다. 우마르의 보호를 통해 고려가 받을 수혜를 적은 문서가 공개되었고, 숙종을 대신해 윤관이 서명한 것을 확인하자 더 의심하는 것은 불경에 가까운 것이라 말했다.
“이것은 양규 장군이 쓰던 수패가 아닌가?”
“양규 장군이라면.”
또 한 번, 김한충이 놀랐던 것은 준경이 들고 있는 수패의 정체였다. 준경 역시도 고색창연한 수패가 범상치 않은 내력을 가졌으리라 짐작했지만, 전설처럼 회자하고 있는 양규 장군이 직접 쓰던 수패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세 개의 창날 아래, 수패 안쪽에는 양규 장군께서 생전에 가장 좋아하신 경구를 적어두고 있다고 하네. ‘대인불사(大人不賜)’가 바로 그것이지.”
준경은 서둘러 창날 아래 가죽을 살짝 뜯어 확인했다. 김한충의 말대로 대인불사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왜 지금까지 직접 가죽을 뜯어보지 않았을까? 자매나 이소가 그 일을 대신해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물건이면서 관심이 너무나 없었다는 사실에 준경은 스스로 머리를 때렸다.
자신은 이 물건을 요나라에 도착한 후, 고영창에게서 받았다. 만약 고영창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 수패는 고영창이 직접 썼을 것이다. 어떻게 양규 장군의 물건이 요나라까지 흘러들어 갔을까?
김한충의 설명이 미진하지만 그래도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1010년 요의 성종이 직접 고려로 출병하자 양규는 완강이 저항했다. 성종은 양규를 무시하고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강조를 직접 상대하여 격파하였고, 그 기세를 몰아 양규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끝까지 저항을 선택한다. 성종이 양규를 무시하고 도성인 개경으로 직접 진군한 사이, 양규는 후방 곽주(郭州)에서 적을 공격하여 몰아내고, 그로부터 약 한 달간 7전 7승을 기록하며 1만의 적을 사살했다.
“성종은 불같이 화내며 애전(艾田)에서 양규 장군을 끌어들일 미끼를 세우게 되네. 양규 장군의 기습은 성공적이어서 일천의 거란군을 베었으나 뒤이어 닥친 대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했지.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항전을 외치다 전사하자 성종은 그 기개에 감탄해 양규 장군의 시신을 고이 유족들에게 보내주었지. 그러나 양규 장군이 애용하던 수패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성종이 기념으로 삼고자 했는지도 모르지. 준경 별가에게 수패를 준 사람이 발해 귀족 출신이라면 그가 요직에 오르는 조건으로 수패를 선물로 준 것일 수도 있네.”
“대인불사라…….”
준경은 벌어진 가죽 틈새로 보이는 희미한 글자를 보며 그 뜻을 생각했다.
대인불사란 장자의 우화에 등장하는 단어였다.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과도 유사한 단어인데 말 그대로 대인은 공평무사함을 지향한다는 뜻이었다. 흔히 소인은 팔이 안으로 굽고 대인은 편을 가르지 않는다는 비유로 쓰이곤 했다.
무인으로서 대인불사란 뜻은 어떤 식으로 쓰일까? 무에 이르는 길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심한 마음에 있다는 뜻은 아닐까, 준경은 생각했다. 분노는 큰 힘을 주지만 궁극에는 파멸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성을 잃고 미처 날뛴 것을 생각하면, 그때의 자신은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사흘이 지나고 모든 보급품을 실은 고려의 전선, 오십 척이 일제히 남쪽으로 기수를 잡았다. 그들이 떠나자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포면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약속한 사항을 빨리 이행하기 위해서는 한동안 서류와 씨름해야만 할 것이다. 동경의 증포에게 이곳에서의 일을 설명하는 임무는 동평이 맡았다. 동평은 짧은 시간 동안 깨달은 바가 적지 않은지 적설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경험과 수련을 병행하겠다고 했다. 제법 정이 들었는지 호연작은 동평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그때는 동평도 준경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인물이 되어 있으리라고 맹세했다.
남쪽으로 거침없이 항행하는 고려 전선에서는 해남도에 남은 이들과 다르게 일말의 걱정을 담고 있었다. 만약 포면이 손을 털어 버린다면 자신들은 반역자가 될 소지도 있었다. 김한충과 강증의 걱정을 덜어주는 것은 황정견의 몫이었다.
“그럴 사람들이 아니니 걱정 놓게. 잘못되면 어디 적당한 무인도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수적으로 나서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겠구먼. 서기는 내가 하도록 하지.”
황정견의 위명 역시 고려에 알려졌었다. 현재 송나라는 중국 전체 역사를 모두 합해도 최고라 칭해도 좋을 서예가들이 속속 나오던 시기로 소동파와 황정견은 그중에서도 단연 선두에 있는 문인들이었다. 그들의 그림과 글을 받는 것이 평생 자랑이라고 여길 정도였으니, 황정견이 스스로 서기를 자처하겠다는 것은 수적으로 변신하라는 농담보다 더 파격적인 언사였다.
황정견의 말에 김한충과 강증은 피식하고 웃었다. 아마도 수적 질로 벌어들이는 보물보다 황정견이 서기로서 작성한 글이 수백 년이 흐르면 더 값진 보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잘못되면 황정견 자신을 팔겠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 수표가 어디 있을까? 고려로 망명이라도 한다손 치면 기뻐 날뛰는 귀족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항해는 지루함의 연속이다. 특히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라 준경의 지루함은 더했지만 배 위에서 홀로 수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흔들리는 갑판에서 중심을 잡고 가상의 적을 상대로 곡도와 수패를 움직였다.
가끔 준경과 겨뤄보고자 하는 수군들도 있었지만, 며칠 간 한 명도 이기지 못하자 괴물이라며 감히 다가오는 자가 없었다.
“수군은 이 정도인가?”
수군은 현재 2군 6위 휘하로 중앙군에 속했다. 왕건 당시 해안가의 호족들이 수군을 사병처럼 부리고 있었고, 그런 호족에게 부탁하여 적을 격퇴하는 식으로 명령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수군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급조할 수 없는 병과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성종이 2군 6위를 편성하면서 천우위(千牛衛) 휘하에 해령(海領)을 두었고, 그것이 고려 수군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화포가 없던 시절인지라 충돌에 의한 파선(破船) 또는 접현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대세였다. 불화살을 통한 공격도 있었지만 이미 이 시기는 불화살을 막기 위해 과선(戈船)이란 것이 등장했다. 거북선의 원형과 같은 배로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배 주위를 창칼로 두르고 철판을 덧대 화살 공격을 방비했다.
이런 과선이 선봉이 되고, 대선이 후방에서 지휘를 담당하는 형태가 바로 고려 수군의 전술이었다.
15일간의 항해 동안 김한충은 황정견과 붙어살다시피 했다. 문인인 그로서는 이런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지휘는 강증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황정견과 시서화를 논했다. 시서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둘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꿈같은 기회였지만 준경 같은 경우는 오히려 강증과 더 친해졌다.
강증은 송의 관리들이 준경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을 들었고, 실제로도 수군과의 대련을 통해 그 실력을 보았으므로 이번 일이 끝나면 자신과 함께 동계로 가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떠보는 중이었다. 준경의 고향이 곡주 출신이니 더욱 환영할만했다.
“아직 백 명을 구하기에도 부족합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나름대로 준경이 정한 강함의 정의였다.
절체절명의 상황, 자신의 강함으로 몇 명까지 구해낼 수 있을까? 준경은 냉정하게 스스로 관조했다. 지금 자신의 위치는 일천의 적을 상대로 열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백 명에 이른다면? 탈출은 어려워지고, 상대해야 할 적들은 많아진다.
“허, 듣도 보도 못한 계산법이로군. 일천 명의 적에게서 아군 열 명을 구하는 것도 엄청난 전공이거늘. 백 명을 구하는 힘을 얻고자 한다니, 별가의 그 욕심이 참으로 부럽구나.”
서른이 넘어서 간신히 음서제를 통해 장수로 입문한 강증이었다. 뒤늦게 관운이 트여 승진하고 있었지만 마흔이 넘어 이제 7품이었다. 패기만만한 준경의 결심이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준경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저는 만인지적(萬人之敵)이 되고자 합니다.”
“만인지적!”
눈이 튀어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삼국지 시대는 고려에서도 흥미롭게 생각하는 역사였다. 수많은 영웅이 명멸했던 시대를 노래하는 사가들이 많았고, 그중 만인지적이란 단어는 관우나 장비 정도의 무장만이 받은 최고의 찬사라고 할 수 있었다.
고려 초, 최고의 맹장이라던 양규도 작심한 요나라의 대군을 극복하지 못했다. 준경은 수패를 어루만졌다. 자신에게 양규가 쓰던 수패가 이어졌다.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한 가지 확고한 의미로 자리 잡았다.
“만약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저는 승리할 것입니다. 그것이 늦게나마 양규 장군의 수패를 이은 자의 사명일 것입니다.”
“내게 혼기가 늦은 딸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자네를 잡았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구먼.”
강증은 준경의 결의를 들으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마타람 왕국의 수역에 진입했다. 먼 해역까지 나와 고기를 낚던 어부들은 거대한 군선들의 출현에 놀라 노를 저어 달아났고, 서둘다 배가 전복한 한 어민을 구해 이곳의 사정을 전해들었다. 고려 수군 중에는 통교를 위해 각국 언어에 능한 자들이 상당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마타람 왕국은 불교 경전을 중원에서 수입하는 경우가 잦아 한문을 읽을 줄 아는 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럴 경우는 필담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겁에 질린 어부를 진정시켜 들은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어부에게 주먹만 한 은덩이를 집어주고 돌려보낸 후, 배를 해상에 멈춰놓은 채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마타람 왕국에 내전이 일어났다니…….”
예상할 수 없는 사태였다.
어부의 이야기로는 자바 섬의 서쪽, 순다 끌라파(Sunda Kelapa, 자카르타) 일대는 스리비자야 왕국의 관할 하에 있고, 그곳을 벗어나 자바섬의 삼분지 이에 해당하는 땅이 마타람 왕국의 관할이었다. 전대 왕이 죽기 전에 아들 둘에게 나라를 반으로 갈라 주었는데 그것이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각자 중심지의 이름을 따서 동쪽은 장갈라(Janggala), 서쪽은 케디리(Kediri)라는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는데, 마타람 왕국의 수도를 포함한 일대가 장갈라의 영역이었으므로 역량 자체는 장갈라가 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서쪽의 스리비자야 왕국이 내전을 틈타 세력을 떨치기 위해 인접한 케디리를 압박하면서 케디리는 동서 양쪽에서 협공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행선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스리비자야 왕국을 쇠퇴시키는 것이 목적이니 스리비자야 왕국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을 케디리를 도와야 한다는 의견과, 마타람 왕국의 수도를 품고 있는 장갈라를 도와 케디리를 합병하는 것이 스리비자야 왕국을 견제하는 데 더 낫다는 의견의 대립이었다.
그들의 정보를 더 자세하게 모으는 것이 급선무라는 의견이 가장 공감을 얻어 그들의 전력을 비교하기 위해 며칠간 인근 어부들을 위협하여 정보를 캐냈다.
“수군은 정말 별 볼 일 없군.”
자바 섬 인근은 모두 연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촘촘하게 섬들이 배치되어 있다 보니 대양 선박이란 개념이 별로 없었다. 이슬람, 인도 상인이 자주 출몰하면서 대양 선박, 또는 대형 선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카누 같은 형태로 10명 내외가 탑승하는 배가 다수를 차지했다. 그 때문에 수상전은 거의 백병전의 형태였다.
육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온다습한 기후의 영향 때문에 철기보다 덜 민감한 청동기가 아직도 주 병기로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기록 문화도 발달하지 못해 거대한 석비를 세워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이 남아 있었다. 종이가 습기를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살은 조심해야겠군.”
거의 모든 부족이 마비독이 함유된 화살을 쓴다고 했다. 맞아도 당장 죽지는 않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죽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왕이나 고위 귀족 휘하에 대형 선박과 제대로 된 철기 부대가 있긴 하지만 그 수가 매우 적어 일천을 넘지 않으리라고 어부들이 입을 모았다. 녹이 스는 철기를 대체하기 위해 상당량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의 청동 거울이 이곳에서는 대단히 유용한 무역 물품이었다. 미와 실용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부들은 은덩이보다 청동 거울을 보며 침을 흘렸을 정도였다.
그렇게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최종적으로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날이 왔다.
“확실히 케디리가 장갈라에 비해 불리한 것이 사실입니다. 스리비자야 왕국과 장갈라 사이에 끼어 전력이 분산되어 있으니까요.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리가 개입한다면 극복하지 못할 전력 차도 아닙니다. 육지에서는 철기를 쓰는 자들이 적고, 해상에서는 그냥 무시하고 밀어버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시대의 고려는 확실히 해상 강국이라 자부할만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강증의 자신감은 바로 그런 실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려운 이를 도와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 비록 장갈라가 수도를 포함하고 있다지만, 케디리의 지형을 보니 지금의 열세만 극복하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네. 우리가 굳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지금의 위기는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네. 그렇다면 말해 무엇하겠나? 일시적 부진에 빠진 케디리를 도와 있는 대로 생색을 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지.”
황정견은 그 근거로 케디리의 환경을 들었다. 동쪽과 서쪽, 양쪽에 각기 화산이 자리하고 있어 산을 넘어 케디리로 진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케디리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브란타스 강이 지나는 평야 유역은 오랜 화산 활동의 영향으로 상상할 수 없는 비옥함을 품고 있다고 했다. 또한, 케디리는 불교도가 많은 장갈라에 비해 힌두교인이 대다수라고 했다.
“인도 상인들이 스리비자야 왕국을 외면하고 마타람 왕국을 선택한 것은 같은 종교를 믿고 있기 때문일세. 나야 불교가 흥한 것이 더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이곳은 인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지. 인도의 촐라 왕조가 스리비자야 왕국을 공격한 지 백 년도 채 지나지 않았네. 우리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인도가 그 자리를 메울 가능성이 크네.”
황정견의 의견은 사리가 분명하고, 현실에 입각한 것이라 많은 이들이 지지의사를 나타냈다. 만일 고려의 개입으로도 전황을 바꿀 수 없다면 수도라는 정통성을 지닌 장갈라를 지지하는 것이 맞겠지만, 고려 수군의 출현은 마치 양 떼가 노는데 나타난 산중 호랑이 같은 존재였다. 누구도 맞설 수 없다면 최대한 많은 이득을 뽑아낼 수 있는 곳과 손을 잡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고려는 전통적인 불교 국가였지만 수교 상대를 따지지는 않았다. 지극히 현실적인 무역을 지향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케디리를 지원하여 장갈라를 멸하고, 스리비자야 왕국을 공격한다!”
김한충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휘봉으로 탁자를 강하게 때리자, 모인 이들이 군례(軍禮)하며 뜻을 받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