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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44화 (44/257)

00044  (6) 유월비상(六月飛霜)  =========================================================================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준경은 한동안 멍한 나날을 보냈다. 복수한 것 같기는 한데 미진한 마음이 계속 가슴 한쪽을 허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땀이라도 흘려보자며 재개된 동파서원 건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그래도 공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자매를 그토록 사랑했던 것일까? 몇 번을 자문해보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봐야 맞을 것이다. 그럼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던 것을 상실했다고 여겼기 때문일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소는 준경의 광기를 소문으로 들었지만, 준경이 깨어났을 때, 단 한 마디만을 남겼다.

“잘했어요.”

그런데도 그리 기쁜 표정은 아니었다. 복수했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왜 일을 저지르는 자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남의 가치는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이소는 그것이 너무나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달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동파서원은 문을 열었고, 많은 사람이 기뻐하며 축하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는 동파육이라는 새로운 요리가 선보였는데 이름이 어쩐지 소동파와 같아 다들 쳐다보니 소동파는 나이답지 않게 당황스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내가 황주(?州, 호북성)로 유배를 간 적이 있지 않았나? 어느 날, 돼지고기를 쪄먹으려고 직접 요리를 하고 있던 참이었네. 당시에는 아들들이 유배지까지 올 수 없던 상황이라 내가 모든 것을 다해야 하는 시기였지.”

선풍도골 같은 용모의 소동파가 직접 돼지고기를 찐다? 주변에서는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 친우 한 명이 적적한 나를 달래주려 방문을 해주었네. 둘이서 바둑 한 판을 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아뿔싸, 불 위에 올려놓은 돼지고기를 깜빡하지 않았겠는가? 연기가 자욱한 고기를 버리기가 아까워 양념하니 탄 맛과 조화를 이뤄 내 입맛에 무척이나 맞더군. 그 사실이 황주에 널리 알려지자 창피하게도 동파육이란 이름을 붙여 팔더군. 내가 두려운 것은 학문보다 음식의 창시자로 남을까 그것이 걱정일세.”

유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은 의도에서 나왔던 요리가 아닌 만큼 잔치에서 동파육의 요리법을 재현한다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소동파는 이 자리에서 동파육을 재현하여 모두에게 맛보도록 하고 있었다.

준경은 동파육을 한점 집었다. 달곰한 맛이 입안을 휘감는 것이 처음 느껴보는 맛이었다. 음식 맛과 함께 새삼 자신과 소동파를 비교해보게 되었다. 소동파는 뛰어난 능력과 청렴결백한 인품에도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바로 조정의 탐관오리들이다. 그들은 소동파를 중앙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숱하게 좌천을 시키고 유배를 보냈다. 그럼에도, 소동파는 항상 낙천적이었고, 맡은 임무는 충실히 해냈다. 그런 와중에 고려에서 김부식 같은 이들이 열렬하게 존경할 정도로 명성도 쌓았다. 마치 잘못된 요리법이었음에도 그 명성으로 말미암아 황주에서 유명한 요리가 된 이 동파육은 바로 소동파 자신의 인생역정이 아닐까?

‘자매. 너 역시 내가 과거에 연연하며 한심한 남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겠지? 나는 너를 지키지 못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오히려 너에게 목숨을 구원받았지.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자매, 네가 나를 구한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허전했던 마음도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동파육을 먹으며 준경의 표정이 오만가지로 바뀌다가 끝에 이르러 평정을 찾는 모습을 보며 적설은 미소를 지었다. 난 놈은 확실히 난 놈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것이다. 뛰어난 자질이 있음에도 단 한 번의 실수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적인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재를 숱하게 봐왔다. 인생 살면서 완벽한 인생이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떨어질 때도 있다는 굴곡을 인정하지 못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지.’

적설의 노년에 한 가닥 즐거움이 생겼다. 그때까지는 살아보겠다는 의욕이었다. 그는 유쾌하게 동파육을 먹기 시작했는데 먹다보니 조금 이상한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고 보니 동파육의 유래가 내가 알던 것과 다른 것 같은데. 설마, 저 아이를 위해서?’

만약 그렇다면 소동파의 마음 씀씀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아니 다를까 포면이 소동파의 설명을 반박하고 나섰다.

“내가 아는 사실과 다르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제가 알기로 18년 전, 서주의 관헌으로 계실 때, 홍수가 나자 군대를 소집하여 재빨리 제방이 터지는 것을 막은 덕분에 백성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돼지고기를 선물했고, 파선께서는 그 돼지고기를 홍소육(??肉)으로 조리하여 함께 고생한 병사와 주민에게 나누어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병사와 주민은 그 홍소육을 회증육(回?肉, 감사한 마음을 담은 고기라는 의미)이라 불렀고, 항주의 관헌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에도 서주에서와 같이 제방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붕괴를 서둘러 막자 항주 주민도 서주의 예를 본받았고, 그렇게 다 같이 맛본 회증육에 파선의 이름을 붙여 기리기로 했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동파는 부인도 긍정도 하지 않고 그저 웃음을 보였다. 준경은 포면의 설명에 동파육을 먹던 손을 내려놓고 그런 소동파를 바라보았다. 정말 짧은 마주침 사이에 소동파의 오른쪽 눈이 찡긋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소동파가 자신을 배려했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알았다. 지금 자신의 허전한 마음에 앞으로 나갈 의욕을 만들어 준 것이 설사 거짓된 이야기였다 할지라도 그것을 진실로 생각하며 받아들이고 마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한순간, 마음은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거짓임에도 선한 의도가 담겨 있음을 이제는 이해하기 때문이다.

준경은 동평과 호연작에게도 머리를 숙여 당시의 일을 사과했다. 준경의 사과에 동평과 호연작은 피식 웃었다.

“우리에게 사죄하는 일은 오늘 죽도록 술을 마시는 것일세. 이제부터 무조건 두 잔일세.”

벌주였지만 준경에게 벌주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쁜 마음으로 벌컥 들이키자 지켜보던 이소는 부러움이 느껴졌다. 자신도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저 무리에 끼어 함께 술을 마시고 말을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밤이 되어도 잔치는 끝날 줄 몰랐다. 준경은 이미 인사불성에 가까워져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시는 단계였다. 호연작과 동평도 얼굴이 벌게진 채로 주거니 받거니를 계속하고 있었다.

포면은 소동파, 적설, 우마르와 함께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는 잔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가장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미 회족의 준동을 막아낸 전공이 있고, 그들이 앞으로 더욱 거세게 준동할 것이란 확증도 있네. 그것을 막기 위한 사전 조치이니 누가 추밀원부사를 탓하겠는가?”

포면은 이미 한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상태였다. 믿을만한 적임자에 빨리 불러들일 수 있는 인물을 찾다 보니 오직 한 사람만이 조건에 들어맞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선택이 잘한 것인지 계속 고민했었다. 실수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로 탐관오리들이 중용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동경에는 증 대인도 있고, 여차하면 내가 가진 철권도 내어줄 것이니 애꿎은 걱정은 그만 하시게.”

황제가 내려준 사면권을 가지고 있지만 한 번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생활이 그저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작품 활동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낙천적인 성격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사면을 받고 정계로 복귀했을 것이다. 포면은 마침내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술 한 잔을 결의의 뜻으로 쭉 들이켰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포면은 포구에 도착했다. 일행 중에는 준경도 있었다. 이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소동파가 만류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서화를 배워보지 않으련?”

소동파의 제안은 평상시라면 이소에게 꿈만 같은 일이었겠지만 준경과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동파는 친할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운 손으로 이소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이야, 너도 알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준경에게 짐만 된다는 사실을. 너와 준경의 미묘한 사정은 잘 알고 있으나 여정이 위험하다. 준경을 돕고 싶다면 지금 나와 이곳에 있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소동파의 설득에 이소는 넘어갔다. 동파서원에 머물며 여족, 묘족 등과 함께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준경으로서도 훨씬 마음 놓이는 조치였다.

준경은 적설 등의 계획을 알게 되었을 때, 무조건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떼를 썼었다. 물론 적설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준경은 우마르를 보호하기 위한 고려의 사자였다. 우마르를 보호하여 송이 우마르에게 받을 지식을 함께 공유 받고자 하는 동맹의 상징이기도 했다.

물론,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다면 준경 같은 하급 무관이 오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상황이 급반전된 것은 이틀 전에 동파서원에 전해진 급보 때문이었다. 포구에 고려 전선(戰船) 오십 척이 기항했다는 소식이었다. 우연인지 포면이 기다리던 인사가 도착했다는 소식도 함께였다.

준경은 동파서원을 떠나면서 열 명의 무승에게 동파서원과 이소의 안위를 부탁했다. 무승 중에는 환속하여 이미 여족이나 묘족의 여인과 신방을 차린 사람도 있었기에 이미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했다.

그렇게 포구에 도착하니 준경은 오랜만에 보는 고려 군기(軍旗)에 가슴이 뭉클한 생각이 들었다. 장관이었다. 오십 척, 아니 그 이상이 될지도 몰랐다. 그 중 10척 정도는 매우 컸는데 그 크기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포면이 도착하자 항해 물품을 싣느라 분주하던 고려군 사이로 지휘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추밀원부사께 고려 형부시랑(刑部侍郞) 김한충(金漢忠), 인사 올립니다."

“군기주부동정(軍器注簿同正) 강증(康拯)이라 하옵니다.”

형부시랑이면 4품, 군기주부동정은 7품의 직급이었다. 형부시랑은 평소 장수의 역할도 겸임하며 2명을 선임할 수 있었기에 1명이 도성에 남으면 1명은 외정을 나갈 수가 있었다. 군기주부동정은 말 그대로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전황에 따라 장수로 활약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 특히나 문관 출신이 무관을 지휘하는 기조가 송과 고려 모두 비슷한지라 실제 전투는 강증이란 자가 지휘한다고 봐야 했다.

그 둘은 중년으로 김한충은 문인에 가까웠고, 강증은 강건한 무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포면이 나이를 물으니 김한충은 53세, 강증은 48세라고 했다.

뒤이어 해남도에 기항한 이유를 김한충이 설명했는데 준경은 고려의 역량이 그 정도까지 되는지 알지 못했는지라 깜짝 놀랐다. 지금 준경의 차림새는 송군의 옷을 차려입고 있어 고려 장수들도 미처 준경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숱한 전투를 치르면서 처음 고려에서 입고 갔던 옷은 일찌감치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지국(交趾國)을 다녀오는 중에 풍랑을 만나 어쩔 수 없이 해남도에 기항했다고 했다. 교지국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순간, 포면과 적설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 이유를 고려 장수들은 아는지 설명하는 내내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교지국은 바로 베트남을 가리켰다. 1009년 베트남에 새롭게 들어선 이씨 왕조는 북송의 책봉을 거부하고 자주를 선포했다. 북송은 신종의 즉위 후, 재상 왕안석의 주도하에 베트남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준비를 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베트남은 1075년,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장군 이상걸(李常傑)의 지휘하에 수륙 양공을 펼쳐 흠주(欽州), 염주(廉州), 옹주(邕州) 일대를 어지럽혔고, 송은 반격했지만, 그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을 영토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베트남 이씨 왕조를 인정하고, 일정부분의 영토를 양보해야 했다.

그러니 동시대를 경험했던 포면과 적설의 인상이 찡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규모를 보니 안남국(安南國)과 관계라도 맺은 모양이군.”

송은 교지국이라는 말보다 안남이란 말을 사용했다. 교지는 현재 자신들의 영역이었기에 베트남의 세력이 그보다 남쪽이라는 어감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포면의 짐작에 김한충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송이 알아서 좋을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입으로 확인해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당시 고려는 여러 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었다. 베트남뿐만이 아니라 태국, 유구, 일본과 거래가 있었고, 그 같은 내용은 역사에 잘 기록되어 있다.

고려 수군은 횡행하는 해적들로부터 상선을 보호하고 내륙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는데 고려 전기의 수군 활동을 보면 역대 우리나라 수군 중 가장 강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수군의 가장 큰 적은 여진 해적이었고, 무역로를 노리는 고려 해적, 송 해적, 대만 해적, 동남아시아 해적, 마지막으로 왜구가 뒤를 이었다. 그만큼 국제적인 활동을 펼쳤기에 수상전 능력은 당대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당시 일본은 자국을 침범하는 고려 해적 때문에 골치였다고 역사서에 적고 있는데 알고 봤더니 그들이 여진 해적이었고, 고려 수군이 그들을 격퇴하여 사로잡힌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는 것을 보고 의심을 풀었다고 한다. 때로는 여진 해적 중에서 고려 수군에 투항하는 예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발해인도 섞여 있었는데 여진이 단순히 말만 타던 부족이 아님을 인식하여 여진 해적만 전담하는 수군이 북방 양계 중 동계에 배치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포면이 대면하고 있는 김한충과 강증이 이번 원행을 순조롭게 마치고 도성에 보고하면, 다음 임무가 동계에 배속되어 여진을 방비하는 일이었다. 천리장성이 완성되면서 육로를 통한 약탈이 어려워지자, 배를 타고 멀리 계림(경주) 근처까지 노략질하는 여진 해적의 횡포를 더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포면 일행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적설은 고려 전선의 위용을 보며 저들을 어떻게 하면 잘 구슬려 마타람 왕국으로 보낼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준경이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따라나선다고 했으니 잘 엮으면 방법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원래의 계획은 자신들이 부른 인사에 준경, 동평을 붙여 10여 척의 군선을 붙여주려는 것이었지만, 자신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주로 본토와 해남을 방비하는 정도의 연안 군선보다 월등히 큰 오십 척의 군선을 보는 순간 기존의 계획은 머릿속에서 모두 날아가 버렸다.

그만큼 이맘때 고려 조선술은 대단했다. 군선의 종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대선(大船)과 과선(戈船)이었고, 지금 적설의 눈앞에 펼쳐진 고려 군선들이 이 범주에 속했다.

고려사에 이르길 914년에 이미 ‘태조가 전함 100여 척을 더 건조했는데 그중 배 10여 척은 각각 사방이 16보이며 그 위에 이중 단을 세웠고, 전체 길이가 말이 달릴 만했다.’라고 적었다. 1보가 대략 6자임을 고려하면 배의 길이는 37m에 조금 못 미치는 길이다. 배수량으로 따지면 400톤에 이른다. 콜럼부스가 대서양을 건널 때, 탔던 배가 233톤인 것을 생각하면 고려 전기의 수군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현대로 따지자면 해양경찰의 경비함정 중 중형함에 해당하는 크기다.

그리고 그 정도가 되어야만 파고 2m에서도 안전하게 항행할 수 있다. 그런 사실은 원과 고려가 일본 원정을 단행했을 당시 폭풍에 침몰당한 배가 현대에 인양되며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수군 60명에, 운항을 위한 선원이 30명. 90명의 정원이니 50척만 따져보아도 4500명…….”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 수군 전체에 비하면 작다고 할 수 있었다. 고려 초기 일본과 교역을 먼저 요구하며 사신을 보냈다가 고려가 거절을 당한 적이 있었다. 거절 직후 일본은 대마도와 규슈 일대의 방비를 서둘렀다. 고려 수군 500척이 정벌에 나섰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외교를 통해 해결되기는 하지만 그 위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고려 초기 왜구가 감히 준동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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