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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43화 (43/257)

00043  (6) 유월비상(六月飛霜)  =========================================================================

뒤를 쫓아 송군과 묘족, 여족의 연합군이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을 내질렀다. 새들이 놀라 파드득 날아올랐고, 들짐승들은 우왕좌왕하며 자신들의 거주지를 내주어야 했다.

“커억!”

열 명째였다.

준경의 곡도는 자비를 몰랐다. 한 번의 공격을 수패로 막으면 여지없이 한 명의 생명을 빼앗았다. 준경의 팔, 다리를 잡기 위해 용감하게 뛰어든 자도 있었지만, 오히려 팔과 다리를 잘리며 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이놈들!”

동평과 호연작이 마침내 도착하여 준경을 편들었다. 그들이 길을 만들자 준경은 중년의 만랍을 보았다. 그를 향해 걸었다. 준경을 저지하기 위해 다시 여럿이 덤벼들지만 호연작이 준경의 등을 밀며 소리쳤다.

“아우에게 양보하지, 어서 가보게!”

그런 말조차도 준경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만랍이 죽기 전에는 시선조차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손이 본능을 따라 움직였다. 가로막는 자는 누구도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두려움을 눈동자에 담은 자도 생기기 시작했다. 용기가 사라지자 손은 무거워지고 행동은 굼뜨기 시작했다. 준경은 더욱 수월하게 그런 자들의 목숨까지 취했다.

“알라흐(al-il?h)!”

준경 일인을 도무지 막지 못하고 피해가 막심해지자 중년의 만랍은 샴시르를 높이 치켜들고 준경을 향해 돌진했다.

“그것이 너의 신이냐?”

기세 좋게 돌진하는 것과는 달리 움직임이 기민한 것을 빼놓고는 별 볼 일 없는 칼솜씨였다. 두 차례의 부딪침만으로도 준경은 알 수 있었다.

발로 배를 차서 중년 만랍을 넘어트렸다. 쓰러진 몸 위에 발을 얹고 준경은 칼끝을 목 위에 얹었다. 이 정도면 두려움에 떨 만도 했지만, 종교의 힘인지 초연하기만 했다. 오히려 준경을 향해 자신들의 언어로 훈계하듯이 떠들어댔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어봤자 준경에게는 일말의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가 쓰러진 순간부터 외곽은 싸우는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이 장소만큼은 고요했다. 지켜보던 이 중에는 노인도 아이도, 여자도 있었다.

결국, 이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살아남더라도 극소수가 될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준경의 곡도가 움직였다.

“으악!”

중년 만랍은 고통에 겨워 몸을 꿈틀거렸다. 어느새 그의 하복부 중앙은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통에 눈물을 찔끔하며 준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며 분노의 일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준경은 말없이 곡도를 다시 휘둘렀다.

“크억!”

손가락질했던 오른 손목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피가 다시 뿜어졌고, 준경의 바짓단은 온통 핏물로 물들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이 중 한 명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준경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준경은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노인이었다. 젊었을 적의 기운은 온데간데없는지 그저 마음만으로 휘두른 창은 하품이 날 정도로 느렸다. 준경이 잠자코 있자 용기를 얻었는지 하나둘 들고 있던 창을 준경에게 찔러 들어갔다. 중년 여인도 있었고, 준경보다 어리게 보이는 소년도 있었다.

“이것이 너의 신이 원하던 것인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간신히 정신만 유지하고 있는 중년 만랍에게 준경은 그런 말을 남겼다. 동시에 가슴을 누르고 있던 압력이 사라졌다. 준경이 발을 떼고 자신에게 창을 들이댄 모든 이를 학살하고 있었다.

노인의 허리를 베고, 중년 여인의 목을 갈랐다. 두려워하는 소년의 배에 수패 창날을 꽂아 넣었다.

지도자가 사로잡히자 지켜보고만 있던 자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준경의 망설이지 않는 잔인함에 자신들 역시 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생긴 것이다. 준경은 이를 드러냈다.

“처음부터 이래야 했다.”

만랍은 피눈물을 흘리며 준경의 살육 현장을 지켜보았다. 동평과 호연작이 청진사 경내까지 돌입하자 뜻밖의 광경에 깜짝 놀랐다. 주변은 피의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아무리 못해도 오십 이상의 사람이 준경과 만랍의 주위에 시체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중에는 노인도 있었고, 여인도 있었으며, 소년도 있었다.

“이블리스(Iblis)!”

아랍에서 악마를 가리키는 단어였지만 준경이 알 리가 없었다. 준경은 그가 이블리스를 외칠 때마다 전신을 하나씩 끊어갔다. 비명이 연이어 터졌고, 준경이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호연작은 준경의 등 뒤로 돌아가 허리를 붙잡고 만랍에게서 떨어트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준경의 팔꿈치가 호연작의 얼굴을 찍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라 호연작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핏물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사이 준경은 만랍과 얼굴을 가까이하고는 하얗게 웃으며 코를 베어냈다. 다시 비명이 터졌고, 동평의 안색이 시뻘겋게 변하며 준경을 막아섰다.

“복수는 이미 끝났다. 지금 자네가 하는 일은 광기야. 광기라고! 지금 자넨 미쳤어!”

어디 한군데가 부러지지 않고서는 준경이 이 잔인한 행동을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초장부터 쌍창으로 맹렬히 공격하여 준경을 쓰러트리려 했다. 그렇게 싸우고도 기운이 나는지 준경은 예전 동평과 겨루었던 움직임을 능가하여 자신을 공격한 창을 팔뚝에 끼고 그대로 복부를 발로 힘껏 걷어차 버렸다. 호연작과 마찬가지로 핏물에 뒹굴게 된 동평은 정말 화가 나서 폭발했다.

“괴물이로구나. 고려에서 저런 괴물이 나올 줄이야.”

호연작이 정신을 차리며 중얼거렸다. 해남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무골(武骨)이라는 것일까?

준경은 자신을 방해하는 존재가 사라지자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로 다시 만랍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만랍의 눈은 이미 빛을 잃고 있었다. 계속된 출혈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나의 신은 아직 징벌을 끝내지 않았다.”

준경은 증명해야 했다. 자매의 죽음 앞에 맹세한 자신의 의지가 이들의 종교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그러기 위해 짧은 기간이었지만 육체를 혹사했다.

“이렇게 쉽게 끝이 나면 안 된단 말이다!”

준경의 곡도가 만랍의 가슴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이미 죽었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난도질당할 때마다 펄쩍 뛰었다. 얼마나 칼질을 했을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만랍의 시신 위로 쓰러졌다.

“어린 녀석이 무장으로서 너무 완벽하다 싶었는데 이놈도 결국 사람이었구나.”

검호 적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만랍을 난도질하느라 정신없는 준경의 뒤통수를 칼집 채로 내려쳐 기절을 시키고는 호연작, 동평에게 준경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이 녀석을 들쳐메고 먼저 내려가거라. 뒤처리는 내가 할 것이다.”

동평은 불만스러운지 쉽사리 다가가지 않았고, 호연작이 먼저 다가가 준경을 둘러맸다. 호연작이 적설에게 말했다.

“정말 귀신이 들린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그리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자가 죽었다. 그것도 자신은 무력한 상태에서였지. 어찌 책임감이 들지 않겠느냐?”

“부처는 분노에 대하여 분노로 갚지 말라고 하셨지요. 저도 징벌의 필요성은 인정합니다만 이건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수가 부처의 말을 들먹이다니 조금 뜻밖이로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만약 내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이 아이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입니까?

지금 준경의 행동은 장수가 취할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치졸한 복수였다. 만약 타국으로 원정 중에 일어난 살육이라면 반란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준경의 행동을 군부의 어른이자 경험 많은 장군인 적설이 두둔한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오늘날 법을 만들어 법으로 심판하게끔 하는 것이 왜냐?”

“그거야 사적인 복수가 횡행하면 당한 자는 또 다른 복수를 꿈꾸게 되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권력자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생긴 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네?”

호연작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적설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보통 가해자는 피해자보다 강한 경우가 많다. 또는 서로 동등한 입장이라면 수양이 부족한 경우다. 만약 객점에서 술값을 내기 싫어 손님과 주인 사이에 칼부림이 났다고 보자. 그는 술값이 없다면 애초부터 객점을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종교와 신념도 마찬가지다. 저들은 생명보다 종교를 우선순위에 두었다. 그런 자들에게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자비란 언제나 통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논리로 남을 재단하는 자들이 우리를 토끼로 보았다면 사실은 우리가 호랑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다.”

“그것으로 이들의 죽음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나는 정당화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착각하지 마라. 이건 저들이 먼저 걸어온 싸움이다. 저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우치기 전에는 손해만 난다는 것을 똑똑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송은 지금껏 요와의 전쟁을 피하려고 공물 외교를 펼쳤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것이 언제까지 갈 수 있다고 보느냐? 결국, 그런 외교가 주변국에 나약하다는 인상만 심어주고 말았다.”

“하지만, 이 중에는 노약자와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손에 창이 들려 있었지. 창을 잡은 순간 이들도 병사다. 요나라가 언제 우리 사정을 봐주며 공격한 적이 있더냐?”

강경한 말이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심정적으로 호연작은 불편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비정상적인지도 몰랐다.

호연작과 동평이 물러나자 병사 일부를 청진사 수색에 내정하여 샅샅이 뒤졌다. 나오는 문헌과 서신들을 통역에게 번역하도록 이르고 중요한 내용은 즉시 알리도록 했다.

“정확하게 정체는 몰라도 대식국 귀빈이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팔렘방에 전달된 모양입니다. 마지막으로 받은 서신에 따르면 인근에 자리한 시아파에서도 귀빈이 해남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수피는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갈등으로 여겨 귀빈에 대한 것은 그냥 묻어두는 것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통역의 말에 적설은 눈매를 좁혔다.

“그거야 우마르의 배에 자객이 글자를 적었을 때, 짐작했던 사실이 아닌가? 다른 쓸만한 소식은 없나?”

“그들 종교에 관한 것은 아니고 국가 간 분쟁을 우려하는 내용의 서신이 한통 있었습니다.”

“국가 간 분쟁? 어디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수피가 세력을 떨치고 있는 스리비자야 왕국이 이웃 마타람 왕국과 치열한 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게.”

청진사 주변을 모두 정리하니 포로는 한 명도 구할 수 없었다. 팔백 명에 이르는 수피가 모두 죽었던 것이다. 일부는 살아남을 수 있었음에도 알라를 외치며 죽음을 선택했다고 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적설은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딘가로 숨어들었다면 두고두고 해남도의 골칫거리가 되었을 것이니 이번 기회에 깨끗하게 뿌리 뽑은 것이 차라리 나았다. 이제는 외부에서 침입하는 것만 막으면 해남도는 청정 지역으로 남을 것이다.

통역이 알려준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적설은 같은 내용을 포면과 소동파, 우마르 등을 모아놓고 다시 한 번 읊도록 했다.

내용은 이랬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중계 무역으로 성세를 누리다가 70년 전, 인도 촐라 왕국의 공격을 받아 조금씩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수마트라 섬을 다스리는 스리비자야 왕국이 조금씩 쇠퇴하는 사이 바로 이웃 섬, 자바에 자리한 마타람 왕국이 흥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리비자야 왕국보다 더 싼 무역 세금과 향료 제도와 인접한 이점을 앞세워 무역 상인들을 대거 끌어들였다.

“마타람 왕국은 인도에서 전래 된 힌두교를 믿고 있다고 합니다. 회교와 불교가 양분하고 있는 스리비자야 왕국이 곱게 비칠 리 만무합니다. 같은 힌두교 국가임을 내세워 인도 상인들도 마타람 왕국과의 교역을 우선하고 있으니 스리비자야 왕국의 불만이 치솟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곧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통역이 정세를 말하고 자리에 앉자, 적설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귀빈을 쫓는 시아파와 감히 동파서원을 공격한 수피파를 한꺼번에 공격할 기회입니다.”

“마타람 왕국으로 사람을 보내 전쟁을 종용하자는 말인가?”

포면의 질문에 적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귀빈이 믿고 있는 수니파는 그곳에 없는가? 팔렘방이 무역의 중심지라고 하지 않았나?”

“귀빈에게 직접 들어보지요.”

통역이 포면의 질문을 우마르에게 묻자 우마르는 손을 휘저으며 연방 설명을 해댔다. 적설은 이미 상인 겸 통역에게 대강의 사정을 들었기 때문에 세운 계획이었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시아파는 팔렘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고, 수니파는 팔렘방 바다 건너에 있는 믈라카(Melaka)를 경유지로 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 양쪽을 다 사용하기는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다들 믈라카로 옮겨가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시아파나 수피도 믈라카로 옮겨갈 수 있지 않겠는가?”

포면의 질문은 타당했다. 통역이 다시 답했다.

“황우봉에 세워진 청진사도 그 규모가 800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컸습니다. 하루아침에 세워질 수 있는 건물은 결코 아니지요. 그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재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합니다. 뒤를 밀어주던 스리비자야 왕국이 몰락하게 되면 더더욱 중원으로 신경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시아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믈라카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하고 다른 곳을 찾아 떠돌 가능성도 있습니다.”

상당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난제가 있었다. 누군가 마타람 왕국으로 가야 했다. 포면은 자신이 그럴 정도의 권한이 있는지부터 해석해봐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장수를 딸려 보내는 것도 문제구먼.”

적설은 팔짱을 꼈다. 마타람 왕국행은 포면이 월권을 들어 거부하면 무산될 가능성도 컸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만약 호위 장수라도 보내야 한다면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섬과 섬의 전쟁. 결국, 해전이란 말인데.”

그것이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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