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1 (6) 유월비상(六月飛霜) =========================================================================
(6) 유월비상(六月飛霜)
“자매 언니!”
준경이 스스로 허벅지를 찌르며 일어나자 넋 놓고 있던 이소도 현실로 돌아와 자매를 안았다. 너무나 갑자기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자매의 눈동자는 준경을 흔들며 보였던 급박한 눈동자였다. 이소의 눈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자매의 목에 가는 비침이 꽂혀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언니!”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지인이었다. 그런 지인이 너무나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이소는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이소의 절규를 자양분으로 준경의 분노는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허벅지의 고통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래처럼 끓어오르던 고통스러운 호흡이 멈춰지고 무호흡의 상태로 들어간 준경의 표정은 분노를 지나쳐 무심 그 자체였다.
“무엇 때문에 우리를 공격했는지 이유를 알아야 한다!”
준경을 먼저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포면과 동평 등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검호 적설이 직접 검을 빼들고 회족을 향해 덤벼들었다. 기습으로 송군과 여족, 묘족의 희생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선 것이다. 준경의 발 역시 땅을 박차며 회족에게 향했다.
‘슉’, ‘슉’ 하는 소리와 함께 비침이 바람을 가르며 준경과 적설에게 쏟아졌다. 두 사람이 대처하는 방식은 차이를 보였다. 적설이 검으로 일진광풍을 일으키자 비침이 검의 기류에 휘말려 주변으로 튕겨져나갔고, 준경은 수패를 앞으로 내밀어 방어를 선택했다. 삽시간에 ‘푹’ 소리가 여러 번 들렸다. 보지 않아도 수패에 수십 개의 비침이 꽂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점차 회족에게 가까워지자 누군가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그러자 그들은 지금까지의 우세도 버려두고 뒤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휘파람을 분 자는 자신들의 언어로 이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는데 지금 준경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어딜!”
기민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우림 속으로 대다수가 사라지자 적설은 이대로는 쫓을 수 없다고 여겼는지 눈앞에 들어온 한 명의 등 뒤로 자신의 검을 던졌다. 검을 던져 상대를 맞추는 것은 굉장한 숙련이 필요한 기술이었지만 적설에게는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커헉!”
적설의 검을 맞고 회족 하나가 쓰러지자 마지막으로 후퇴하던 휘파람을 분 이가 그 회족의 목을 끊기 위해 다가갔다. 인질을 남기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준경 역시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준경은 자신이 휘파람을 분 이보다 간발의 차이로 늦을 것 같아, 들고 있던 수패를 부메랑처럼 던졌다.
그러나 수패로 평소에 날리는 훈련을 전혀 해보지 않았던 터라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의 시간 지연은 만들 수 있었다. 준경의 수패에 달린 창이 회전하며 날아들자 휘파람을 분 이의 움직임도 수패의 방향을 주시하느라 조금 느려졌기 때문이다. 그 사이 적설이 나이답지 않은 기민함을 과시하며 상처입고 쓰러진 회족에게 허공을 한 바퀴 돌며 다가갔다. 허공에서 거꾸로 도는 사이 회족의 등에 박혀 있던 자신의 검을 빼어 바닥에 착지했을 때는 상처입은 회족과 휘파람을 분 자, 사이를 가로막을 수 있었다.
휘파람을 분 이의 판단은 빨랐다. 손을 품에 넣어 무언가를 적설에게 뿌린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꽃가루 같은 것이 순식간에 전면에 뿌려지자 적설은 그것이 아마도 아까 연기의 주재료일 것으로 생각했다. 뒷발로 쓰러진 회족을 걷어차며 자신 역시 뒤로 크게 물러났다. 안전한 거리가 확보되었다고 생각하자 휘파람을 분 이를 계속 쫓으려는 준경에게 소리쳤다.
“너 혼자 쫓아봐야 거꾸로 당할 뿐이다. 복수를 도와줄 테니 지금은 이놈을 살려 습격의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준경은 적설의 외침을 무시하고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회족의 뒤를 끝까지 쫓고 싶었다. 해남도에 도착하기 전의 자신이었다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해남도에 와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자매는 죽었다. 그러나 자신은 살아 있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복수는 유효하다. 그것은 냉철한 이성이 아니라 최상의 몸 상태에서 최상의 복수를 하기 위한 분노의 갈무리였다.
준경은 수풀에 떨어진 수패를 줍고는 적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상처입고 신음하는 회족을 들쳐멨다.
“저놈들의 본거지를 반드시 알아내 주십시오. 복수는 제가 합니다.”
“이놈의 영혼까지 벗겨놓을 것이니 그것은 염려 말아라. 우리 아이들이 많이 다친 이상, 이 복수는 너만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도 채무가 생긴 셈이다.”
준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분노로 점철된 눈빛을 깊이 갈무리할 뿐이었다. 공사 현장에 도착하자 살아남은 이들은 죽은 이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자매의 시신을 수습하려던 묘족들 틈에서 이소는 자매의 시신을 내놓지 않기 위해 작은 두 팔로 꼭 껴안고 있었다. 죽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준경은 들쳐멨던 회족을 바닥에 내려놓고, 이소의 두 팔을 자매의 시신에서 떼어냈다. 이소는 반항하려고 했지만, 준경의 두 눈에서 끝을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느껴져 감히 손에 힘을 싣지 못했다.
준경은 두툼한 손을 자매의 얼굴로 가져가 뜬 눈을 쓸어내렸다.
처음으로 자매를 보았던 날, 선죽교에서 마치 달의 여신이 강림한 것 같은 환상적인 춤을 구경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이소가 말했었다.
-음력 2월 15일이 되면 묘족은 도화절(跳花節)이라는 잔치를 연다고 해요. 나무에 꽃이 만발하면 그 주위를 둘러싸고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신다고 하지요. 자매는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어요.
꿈에 그리던 고향에 왔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도화절을 함께 보낼 수 있을 터였다. 준경은 은근히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었다는 뿌듯함과 함께.
-묘족은 단풍나무에서 태어났다고 해요.
첫날밤이 지나고 묘족의 사당이라 할 수 있는 백화봉에 올라 단풍나무와 민 태조의 부조 앞에서 준경의 무사 기원을 자매는 빌었다.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의 무사 기원을 빌었어야 했다. 어리석은 여인아!’
두툼한 손이 얼굴을 다시 쓸어내렸다. 준경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일자로 다물어져 있던 입가가 조금은 호선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민 태조여, 그대가 진정 관음보살의 현신이라면 이 여인을 살려주시오.’
간절한 외침이었지만 현실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기도 했다. 누군가 준경의 손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자매의 부모와 동생이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매의 시신을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기원은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가해자에게도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오라버니.”
이소가 그런 준경의 손을 잡았다. 이소의 손은 매우 차가웠고, 미세한 떨림이 계속 이어졌다. 준경은 이소를 내려다보았다. 이소가 자신을 오라버니라 부른 것은 자신의 기억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부르라고 했지만, 그동안 절대 사용하지 않았던 단어를 이소가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제 이소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마저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준경은 이소의 머리에 남은 손을 얹었다. 그러자 이소의 차가운 손에서 느껴지던 떨림이 점차 사라졌다. 준경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약속하마. 오늘 이후로 내 눈앞에서 내가 아는 어떤 누구도 죽지 않게 만들겠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준경과 이소가 손을 잡고 있는 동안 누구도 그 곁으로 범접하지 못했다. 둘의 교감에 감히 방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누구나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준경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는 자매를 잃기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눈치를 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동평이 다가왔다.
“아까 휘파람을 분 놈이 우두머리인 것 같네. 아까 이쪽으로 소리치고 사라졌지 않는가? 파선께서 말씀하시길, ‘멈추지 않는 한, 다시 오겠다.’라고 했다는군.”
“멈추지 않는 한 다시 오겠다?”
우마르를 죽이고자 했으면 잠깐의 기습 후 그렇게 황급히 후퇴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공격할 것임을 예고했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지금 그것 때문에 아까 잡아온 회족을 심문하고 있네. 묘족과 여족도 화가 단단히 나서 그런지 사실을 실토하더라도 살아남지는 못할걸세.”
당연히 그럴 것이다. 빨리 사실을 털어놓는 것만이 그나마 고통 없이 죽는 방법일 것이다. 그때 소과가 달려와 준경과 동평을 불렀다.
“지금 잡혀온 회족이 모든 것을 자백하고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유가 밝혀졌다. 준경은 이소의 손을 꽉 잡은 채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심문 장소에 다다르자 다들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나마 준경을 반겨준 것은 검호 적설이었다.
“장하다.”
“무엇이 말입니까?”
“네 나이 또래에 분노를 갈무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복수는 죽은 자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몫이니 완벽한 때를 기다리며 분노를 아껴두는 것이 좋다. 나는 네 녀석이 그대로 회족을 쫓을 것으로 생각했다.”
준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쫓고 싶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멸하고 싶었다. 참은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자신이 죽으면 의지할 곳을 잃어버리는 이소가 눈에 밟혔는지도 모른다. 자매는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쫓을 수 있습니까?”
적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입니까?”
“너 혼자만이 나설 일이 아니다. 일이 제법 심각해졌다.”
사정을 듣기 위해 주변의 모든 이들이 수습을 하다말고 한자리에 모였다. 아직 안색이 창백한 소동파가 설명을 시작했다. 다들 다른 이들에게 맡기려 했지만, 소동파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로 말미암아 벌어진 일인데 내가 설명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마르나 포면이 아닌 소동파와 연관된 일인가? 준경은 소동파에게서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인지 주시했다.
“여족(黎族)은 오랫동안 해남의 주인으로 살아왔다. 일천 하고도 이백 년 전, 한 무제께서 이곳에 군현을 설치한 이래 중원과 교류가 이어졌고, 상당 부분 한화(漢化)가 되었다. 묘족 역시 마찬가지다. 오백 년 전 민국이 멸망하고 이민족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자 묘족 일부는 해남으로 이주하여 지금까지 터전을 일구고 살아왔다. 이들은 여족보다도 더 한화가 이루어져 풍습은 고유의 것이나 문물은 중원의 것을 받아들였다. 쿨럭.”
잠시 찬바람이 불자 소동파는 기침했고, 소과는 옆에서 소동파를 부축하며 우려 섞인 표정을 지었다. 곧 기침이 멈추자 소동파의 설명이 이어졌다.
“회족은 여족이나 묘족보다 더 늦게 이곳에 발을 디뎠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년 전의 일이지. 본래는 비단길을 타고 전래 된 지라 감숙(甘肅), 청해(靑海)에 주거를 두고 있었으나, 바닷길이 열리면서 새롭게 해남에 나타난 자들이 지금 우리를 습격한 회족의 연원이다.”
북쪽의 회족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들과 연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송으로서는 그들을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귀중한 교역 자원들이기에 비단길을 점거한 서하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세력 다툼입니까?”
준경은 역사 강의를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저 자매를 죽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확실한 것은 이들의 습격은 우마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 하나였다.
“아니다.”
준경의 질문에 소동파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