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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40화 (40/257)

00040  (5) 각자도생(各自圖生)  =========================================================================

그래도 당장 지금의 상황이 민망한 것은 사실이었다. 최대한 대범하게 일어나 일성을 내질렀다.

“제법 한 수가 있구나. 이 몸은 원래 말에 올라 쌍창을 휘두르는 것이 진정한 특기다. 장수들은 원래가 마상 전투로 진가를 인정받는 법이지. 마상에서 겨뤄볼 테냐?”

준경으로서는 오히려 기꺼운 말이었다. 준경이 덥석 받아들자 금세 준경이 탈 말이 앞으로 끌려 나왔다. 그 말에 올라타자 준경은 새로운 기분을 느꼈다. 이곳에서 타는 말들은 고려에서 잠깐 탔던 말들과 다르게 강건함과 역동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전마(戰馬)가 크게 사육되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 성립 이후 몽골의 요구 때문이었다. 탐라도(제주도)에 대규모 목장이 건설된 것도 차후의 미래인 셈이다.

현재의 고려 목장 사정은 통일 신라, 그 뒤를 잇는 후삼국 시대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전마를 키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료(馬料)인데 그것을 대부분 요와 송에서 수입하고 있었기에 기병 육성이 상대적으로 타국에 비해 비싸고 어려웠다. 말들도 충분히 먹고 자라지 못해 북방 종마들에 비하면 그 체구가 작았다.

새로운 말에 타자 탐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말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을 사귀는 것과 같았다. 비록 갈송을 죽이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말을 희생시켰다. 그것은 아직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병기, 도구로 보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이 모자라서였다고 더욱 마음을 채찍질했다. 언제고 자신이 참전하는 전장에서 모두를 살리고도 이길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정진, 또 정진을 해 나가리라 마음먹었다.

말에 올라탄 동평은 아까 일격을 먹었을 때, 의기소침했던 것도 잠시, 기운을 금세 되찾은 기색이었다. 그것도 그의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좀처럼 오래 나쁜 기분을 끌고 가지 않는다는 것.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당장에라도 달려갈 것 같은 태도로 동평이 외쳤다.

“준비되었는가?”

준경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켜보던 호연작은 곧 동평이 낭패를 당하리라 확신했다. 갈송을 상대할 때의 준경은 그야말로 무인지경이라는 말을 실천에 옮겼다. 말에 탔을 때, 더 강해진 준경을 보며 자신도 더 노력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는데 동평이라고 그때의 상황과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럇!”

동평이 순식간에 튀어 나갔다.

한 차례의 겨룸이 있었고, 작은 비명과 함께 말에서 떨어진 것은 동평이었다. 손에 땀을 쥘 시간도 없이 허망하게 끝난 마상 격투였다.

검호 적설도 이런 결과는 예측하지 못했는지 방금 장면을 복기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창과 곡도가 부딪치는 순간, 말의 얼굴 앞에서 수패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말의 특징을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본능적인가?’

말은 초식 동물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감각을 곤두선다. 평소 익숙하지 않은 소리나 냄새, 또는 경험한 위협적인 형태를 보면 도피하기 위해 급히 뛰거나 방향을 바꾸게 된다. 의도인지 아닌지 몰라도 준경의 행위는 바로 그 같은 행위였다.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수패가 눈앞을 가리자 말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떨었고, 창날까지 보이자 더욱 흥분했다. 저것이 자신을 위협할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자 안정된 자세가 무너졌고, 타고 있던 동평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시시하게 끝나버린 결전에 동평은 정말 허세꾼이 되어버렸다. 정신을 차렸음에도 차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래도 일어나기는 해야 했다. 슬며시 눈을 뜨자 준경의 손이 자신 앞에 놓여 있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어야 했다. 그러나 천성이 그런 것인지 동평은 준경의 손을 힘껏 잡아당겨 일어났다. 하마터면 준경이 자빠질뻔한 그런 정도의 힘이었다.

“하하하, 이것 참, 후배에게 제대로 망신살이 뻗쳤군.”

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는 동평이 밉게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검호 적설이 그런 동평에게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런 배알도 없는 놈. 오냐오냐했더니 결국 망신만 샀구나. 동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네놈을 전출시켜 버릴 테다.”

“전출? 바라던 바입니다. 될 수 있으면 동평부(東平府)로 보내주시지요. 인근 양산박 도적들의 폐해가 심하다고 하니 수련도 할 겸 싹 쓸어버리겠습니다.”

“흥, 그런 생각이라면 북경대명부로 보내 요나라 국경에 세워버릴 테다.”

마치 조손 같은 분위기에 주변은 훈훈한 웃음이 감돌았다.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 같지 않았지만.

비무가 그렇게 끝나고 적설에게 두 사람이 다가가 앉자 적설은 술을 찾았다. 지켜보고 있던 자매가 술을 가져다주고 술을 한 순배 돌리려 하자 준경이 팔을 잡아 제지했다. 동평의 눈이 가늘어졌다.

“묘족 여인으로 보이는데 아우와 관계가 있는가?”

후배에서 아우로 변하는 것을 보며 준경은 내심 실소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고의로 한 것이 아니라 성품 자체가 그런 듯이 보였다. 오히려 지켜보던 호연작이 주먹을 불끈 쥘 정도였다.

“제 내자입니다.”

준경의 말에 적설도 자매를 돌이켜볼 정도였다. 고려 군관과 묘족 여인이 결합한 예는 처음 보았던 탓이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이소만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준경이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배우자라고 지칭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탓일 것이다.

자매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흘렀다. 노예, 또는 첩, 시비라 생각하며 지냈다. 자신과 한번 합방을 한 이후로 다시 방사를 치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준경은 자신을 내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준경을 믿으면서도 무심한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존재했는데 보답을 받은 느낌이었다.

“참한 내자를 두었구나. 내 마누라에 비하면 참으로…….”

“크흠!”

검호 적설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자신의 신세 한탄이라도 늘어놓으려는 찰나, 포면의 헛기침이 이어졌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적설이 포면에게 말했다.

“국가의 대사를 논하지 않고 한낱 야사를 엿들으려는가?”

“한낱 야사가 국가의 정의와 관계가 있다면 제가 들을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허허, 고약한지고.”

적설은 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중에 동평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포면의 누이가 적설의 정부인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준경은 자매, 이소와 함께 얼마나 웃었는지 몰랐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동평은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나는 아우가 부럽구먼, 연상에 연하에 다 갖춰두었으니 그야말로……. 어이쿠!”

어느새 자매의 곁에 와 있던 이소가 참지 못하겠는지 있는 힘껏 동평의 무릎을 발로 찼다. 동평이 술을 마시다 말고 새소리를 내며 잔에 있던 술을 흘렸다. 적설은 그것을 보면서 ‘못난 녀석.’이라며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동평이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엄지손가락을 이소에게 내밀었을지도 몰랐다.

소동파와 우마르, 포면 사이에 길었던 논의도 모두 끝나자 술자리에 합류했다. 삽시간에 마을 잔치처럼 화하자 본래 축제를 좋아하는 묘족은 아예 오늘을 축제의 날로 정해버렸다.

소동파는 기분이 좋은지 아들, 소과를 옆에 앉히고 마음껏 술을 즐겼다. 시를 읊고 싶었는지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의 시를 경청했다. 그만큼 그의 시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다.

소동파는 술을 먹고 얼굴이 붉게 물들었음에도 목소리는 주변을 떨어 울릴 만큼 낭랑했다.

“야음동파성부취(夜?東坡醒復醉), 귀래방불삼경(歸來?佛三更). 가동비식이뢰명(家童鼻息已雷鳴), 고문도불응(敲門都不應). 의장청강성(倚杖聽江聲), 장한차신비아유(長恨此身非我有). 하시망각영영(何時忘?營營), 야란풍정곡문평(夜?風靜穀紋平). 소주종차서(小舟從此逝), 강해기여생(江海寄餘生)이라.”

-밤에 동파서원에서 술이 깨었다가 다시 취하여 돌아오니 하루가 지나 다시 한밤이 되었다. 아들은 이미 천둥처럼 코를 골고, 내가 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다.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강가에서 물소리를 들으니 이 몸에 진짜 내가 있지 않음을 한탄한다. 언제라야 풍진 같은 삶을 잊을 수 있을까? 밤이 깊어질수록 바람은 잦아들고 잔물결이 사라진다. 작은 배가 있다면 여기를 떠나서 강과 바다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구나.

시가 끝나자 여운이 감돌았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소동파의 시는 많은 뜻을 품고 있었다. 그중에서 아들 소과는 얼굴을 붉히며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제가 언제 천둥처럼 코를 돌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버님이 문을 두드리실 때 제가 답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억울했는지 소리가 제법 컸다. 그런 소과에게 소동파는 혀를 차며 말했다.

“원래 제 눈에 들보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일 년 전, 정월 보름 다음 날, 있었던 일을 내가 읊어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앗! 아니…… 아닙니다!”

소과는 매우 놀라 두 손을 손사래 쳤다. 서른 줄의 장년이 그런 모습이 재미있는지 이소는 쿡쿡하며 웃었다. 준경이 보기에도 코를 곤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여자와 자고 있어 아버지가 온 것을 몰랐다던가…….

다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소과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낙인이 찍힌 뒤였다. 소과를 안주 삼아 술잔이 부딪치니 그야말로 유쾌하기 짝이 없는 잔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호연작은 묘한 냄새를 맡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잔치를 지켜보고 있던 송군들도 이상한 냄새에 코를 킁킁거렸다.

술을 마시지 않았던 자매도 그 냄새를 느꼈다. 그리고는 매우 놀라며 주변을 향해 외쳤다.

“모두 피하세요!”

자매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여족과 묘족 역시 매우 놀라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술을 먹은 이들은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준경 역시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피할 생각보다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이소는 장삼으로 얼굴을 막으며 준경을 흔들었다.

“누군가 협죽도(夾竹桃) 연기를 피웠대요! 이 자리를 피해야 해요!”

“협죽도?”

말을 하자마자 벌써 숨이 턱턱 막혀오기 시작했다. 준경은 먼저 소동파를 쳐다보았다. 소동파도 거의 숨이 넘어갈 것처럼 괴로워하고 있었다. 준경은 호연작을 쳐다보았다. 호연작은 경비를 위해 술을 먹지 않아 다행히 움직임은 기민했다. 준경과 눈이 마주치자 소동파를 구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모두 숨을 참아!”

위기를 알고 검호 적설이 소리쳤지만 이미 크게 숨을 들이켠 사람들은 목을 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소는 준경을 잡아끌며 외쳤다.

“협죽도 연기는 범위가 작다고 해요!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거에요. 지금은 뒤로 물러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셔야 해요!”

협죽도.

생긴 것은 화려한 꽃이지만 벌레도 꼬이지 않는다는 독성 강한 식물이었다. 제주도에서도 자라는 식물로 한때, 그 독성을 모르고 키운 덕분에 죽은 이들이 숱하게 있었다는 악마의 식물이었다. 잎, 줄기, 뿌리, 수액, 꽃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독을 내포하고 있어 꽃말이 ‘조심’이란 명칭이 붙을 정도였다. 협죽도 한 송이가 청산가리를 훨씬 능가하는 독성을 가지고 있는데 태우는 것만으로도 그 효과가 나타난다고 했다.

준경은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게진 상태에서 협죽도 연기까지 맡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양귀비를 들이마신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느샌가 이소를 밀치고 자매가 다가와 준경을 흔들었지만, 준경의 정신은 점차 심연으로 향하고 있었다.

묘족과 여족 중 경험 많은 자들은 장내에 쓰러진 자들을 연기 범위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중얼거렸다. 사냥에나 쓰이는 협죽도를 도대체 어떤 부족이 자신들에게 사용했을까?

그리고 그 정체는 곧 드러났다.

정체불명의 괴물 문양을 그린 탈을 쓰고 나타난 원주민들이 그들을 포위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가에 대롱을 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여족과 묘족들이 소리를 치며 경고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외부인 중 극히 일부분이었다. ‘회족이다! 독침이다!’ 이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소동파도 축 늘어져 위독한 상황이었다.

회족 입가에 달린 대롱에서 ‘슉’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림을 울리는 비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송군이 속속 쓰러지기 시작했고, 호연작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갈피를 잡고 있지 못했다.

“일단 후퇴다!”

간신히 정신을 유지한 검호 적설의 명에 살아남은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족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연기의 위협이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살아남은 송군과 묘족, 여족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꽤 많은 사람이 마을 안쪽으로 순식간에 구원되었다. 그중에는 소동파와 소과, 우마르, 포면, 동평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현장에 남아 있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여족과 묘족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다. 호연작이 이끄는 송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준경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자신의 뺨을 후려치며 정신 차리라고 소리치던 자매가 푹 쓰러지며 자신의 품에 안겼기 때문이다. 곁에 있던 이소도 뜻밖의 상황에 놀라 신형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자매…….”

이미 자매의 동공은 흐려져 있었다. 준경은 도무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소 역시도 지금 상황이 현실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준경은 손을 더듬더듬 움직여 수패를 잡았다. 수패를 거꾸로 잡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수패의 창날로 자신의 허벅지를 찔렀다.

“으악!”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고통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믿을 수 없는 비극에 대한 분노였다. 눈물이 흘렀다. 앞으로 잘해줄 날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 독 기운에 일어설 수조차 없던 몸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눈물이 흘렀다. 눈물의 색을 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피눈물일 것으로 생각했다.

“다 죽이겠다!”

회족이 온 이유는 우마르를 노렸던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저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 작품 후기 ============================

작품설정에 수패에 대한 이미지를 표현해보았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수호지에 대한 설정은 차후에 설정란에 추가해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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