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5) 각자도생(各自圖生) =========================================================================
“오랜만에 들어보는 발칙한 질문이구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리 기분 나빠하지도 않은 눈치였다.
“아마도 내가 질 것이다.”
다들 흠칫 놀라고 있었다. 대놓고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오직 포면만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고 있었다. 아마도 적설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준경 역시 의외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이에 따른 체력 차이가 있으니 단기전이라면 이기고 장기전이라면 진다는 식의 답변이 나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준경을 보며 적설은 빙그레 웃었다.
“단칼에 이탁을 벨 수 있다면 내가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 나를 상대로 이탁은 무조건 이대도강(李代桃?)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뒤지는 것은 오직 칼솜씨뿐 모든 것이 나보다 앞선다.”
알면서도 당한다는 말이 바로 지금과 같을 것이다.
“그래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일대일로 겨룰 마음이 없다. 그래서 그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나를 상대로 상당한 손해를 입게 되면 자신 역시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
준경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적설의 설명은 무인으로서의 자존심보다 살아남는 것이 승자라는 것을 잘 대변해주고 있었다. 지금 이곳까지 함께 온 송군의 눈빛이 형형한 것을 보면 아마도 고르고 고른 무예의 고수들일 것이다.
“좋을 나이다.”
준경을 보며 적설은 세월이 흘렀음을 실감했다. 자신 역시 저 나이 때에 강함을 신봉하며 피나는 수련을 했었다. 약관에 이르지 못한 나이에 단신으로 갈송이란 강적을 꺾고, 수백 명의 송군을 상대할 정도라면 세월이 지나면 더 강해질 것이다. 그것은 송에게 있어 득일까? 실일까? 이번 일만 아니라면 송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라 가정하면 이후에 준경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요라는 강적을 함께 맞이하고 있는 견해에서는 고려가 요를 상대로 선전해주는 것이 좋은 선택지였다.
“아직 논의가 끝나려면 먼 것 같으니 무인들은 흥이나 돋우도록 하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에게 수십 년간 아무도 던지지 않았던 질문에 답을 했으니 그에 대한 대가는 응당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저와 비무를 원하십니까?”
그거라면 당장에라도 자리를 만들어 붙어보고 싶었다. 검으로는 송나라 최고라고 불리는 무인이었다. 수패를 이용한 공격과 방어를 시험해보기에는 더 적합한 상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준경의 흥분이 적설을 다시 웃게 하였다.
“이 나이에 내 손자보다도 나이 어린 녀석과 드잡이질을 하란 말이냐. 마침 적당한 상대가 있다.”
적설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 실망도 했지만 그래도 적설이 내세우는 사람이 평범할 리가 없었다. 지켜보던 호연작은 그런 준경이 무척이나 부러워 얼굴에 티를 낼 정도였다. 하늘같이 우러러보는 적설에게 대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고려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곧 송군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연작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와는 이번에 처음으로 일을 같이하게 된 사이였지만 하는 행동이 재수 없다고 여겨 꺼리던 참이었다.
‘묵사발을 내주게.’
눈빛으로 준경에게 신호를 보내자 준경은 실소가 나왔다. 꼭 호연작의 눈빛이 아니었더라도 질 생각은 없었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약관 정도의 젊은 무관이었기 때문이다.
꽤 요란스러운 차림이었다. 무관 복색에 천을 덧붙여 화려하게 휘날리는 것 하며 가슴에 피리를 꽂고 있는 것도 특이했다. 무엇보다 그의 등 뒤에 매달린 기치가 참으로 남세스러운 행태였다. 그 기치에는 영재쌍창장(英才雙槍將)이라고 적어 자신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치에 적힌 말대로 두 자루의 창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동평이라고 하네. 영재를 넘어 곧 영웅이 될 사람이기도 하지. 자네는 나보다 조금 못생겼지만 그리 비관하지는 말게. 나 같이 잘난 사람이 흔한 것은 아니니.”
지금까지 준경이 본 사람 중에 가장 잘생긴 사람은 노준의라고 생각했다. 눈앞의 인물은 노준의에 비하면 떨어지지만, 충분히 미남자란 소리는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의 말투가 전의를 잃게 하였다. 한 대 쳐주고 싶을 정도로 느끼한 말투였다.
“잘난 척하는 버릇 좀 고치라고 그렇게 누누이 이야기했건만 약관이 되어도 변하는 것이 없구나.”
혀를 차며 적설이 말했다. 그러나 동평이란 무관은 적설의 말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하하하, 저 같은 천재 미남자가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머리가 좋아 사서오경은 이미 어릴 적에 섭렵하고, 음악에 손을 대니 못 다루는 악기가 없습니다. 무예는 어떻습니까? 아직 제 쌍창을 이기는 상대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포면이나 적설은 동평이란 무관의 성격을 아는지 그저 혀만 찰 뿐이었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혹시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허세가 대단하게 보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검호의 앞에서 무예를 논하다니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포면이나 적설이 왜 동평의 안하무인 함을 그대로 두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유가 있었다.
‘자부심이 강할수록 강해지는 놈이 있다. 그렇게 끌어올린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욱 노력하지. 녀석에게 허세는 달성하기 위한 목표나 마찬가지다.’
그런 사실을 몰랐다면 당장에 내쳤을 것이다. 그만큼 동평의 재능은 뛰어난 것이었기에 기대주로 육성하고 있었다.
어느새 둘이 비무할 만큼의 자리가 생겨났다. 일하던 묘족과 여족도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하던 일을 멈추고 주위에 둘러앉았다. 그중에는 이소의 손을 잡고 있는 자매도 있었다.
여럿의 시선이 모여지자 동평은 기분이 좋은지 창 하나를 바닥에 꽂고 남은 한 개의 창으로 현란한 묘기를 선보였다. 팔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창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렇게 돌리던 창이 어느 순간 멈춰지고 준경을 가리켰다.
“나는 하동의 동평이다.”
준경은 수패와 곡도를 들고 천천히 동평과 마주 섰다. 그리고는 곡도로 동평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고려의 준경이다.”
소개가 끝나자 동평의 창끝이 까닥거렸다.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내가 좋은 경험을 남겨주도록 하지.”
좋은 경험이라니? 준경은 피식했다. 동평은 이 비무가 지도 대련이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자신이 약해 보인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그 생각을 바꿔줄 필요가 있었다.
사양하지 않고 준경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기선을 잡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큰소리칠만한 실력이 있었던 것인지 동평은 여유롭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동평의 공격도 준경의 수패를 뚫지는 못했다. 수패를 뚫기 위해서는 먼저 준경의 공격을 확실히 피한 후에야 가능했는데 완벽한 자세를 잡을 틈을 준경이 주지 않았다.
공방은 빠르게 오십 합을 흘렀다. 숨이 조금씩 가파를 무렵 둘은 잠깐의 대치 상태로 들어갔다.
“제법인데? 이제 두 자루로 상대하도록 하지.”
바닥에 꽂아 두었던 창을 빼내 옆구리에 두 자루를 나란히 준경에게 내민 모습은 이제부터 전력을 다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준경은 오십 합이 흐르는 동안 동평의 움직임이 누구와 비슷함을 깨달았다. 그는 바로 단정홍이었다. 그와 비견할 만큼 동평의 움직임은 신출귀몰했다. 분명히 힘의 우위에서는 곡도를 휘두르는 준경이 앞섰지만, 속도 면에서는 동평이 앞섰기에 단 한 번의 위급한 상황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준경은 자신이 수패를 선택한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똑같은 노력을 들여도 어떤 이는 남보다 훨씬 발이 빠른 이가 있고 어떤 이는 힘이 더 세다. 그것이 곧 재능이고 적성이다. 자신이 창만 고집했다면 이미 동평에게 몇 번을 찔리고도 남았을 상황이다.
대신에 상대도 준경의 도를 한 번이라도 허용한다면 치명적인 손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준경은 곡도와 수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빠른 몸놀림을 이용한 쌍창의 공격은 어떤 것일까? 호연작도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동평은 자신보다 어린 녀석이었다. 그런데도 남들이 감히 도전하지 않는 쌍창을 다룬다는 것은 일가를 이루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어쩌면 쌍편을 다룰 수 있는 단초를 이 비무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다!”
동평의 쌍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울 햇살에 창끝이 반사되며 마치 두 개의 은광(銀光)이 허공에서 비산(飛散)하고 있었다. 눈으로 좇아가기 어려울 정도의 빠르기였다.
현란함에 눈이 현혹되면 당장에라도 준경의 몸 어딘가에 창이 틀어박혔겠지만, 쌍창을 쓴지 이십 합이 넘어가는데도 준경의 방어를 뚫지 못하자 동평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수패를 피해 준경을 찔렀다고 생각했음에도 수패에 박힌 세 개의 창날이 공격의 진로를 흐트러트렸다. 창과 창 사이를 꿰뚫었다고 생각해보자. 준경은 방패를 좌든 우든 상황에 맞게 흔들었다. 그럼 자연 창날 사이에 자신의 창이 걸려 진로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십 합이 더 흐르자 동평의 콧잔등에 땀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불어 숨이 차기 시작했다.
두 개의 창을 휘두르는 것이 한 개를 휘두를 때마다 더 어렵고 힘든 것임은 불문가지였다. 우직하게 방어에 전념하는 준경을 보며 적설의 눈이 반짝였다.
“저놈, 알고 있었구나. 동평의 약점이 무엇인지.”
동평의 체력이 그리 약한 편은 아니었다. 그것은 비무의 당사자인 준경이 더 잘 알았다. 그러나 체력이란 것은 상대적인 의미다. 준경은 동평이 자신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버티다 일격만 넣을 수 있다면 자신이 승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두 개의 창으로 휘두른다는 의미는 한쪽 팔로 창을 휘두른다는 의미였다.
‘오히려 한 개의 창을 쓸 때보다 압력이 약해졌다.’
빠르고 치명적인 공격들이었지만 가로막을 수만 있다면, 아니 설사 막지 못하고 한두 차례 뚫렸더라도 준경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생각은 단정홍의 조언과 이탁의 존재 때문에 가능했다. 자신과 이탁이 비슷한 전투 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라면 어떻게 싸웠을까? 상상했던 것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뿐이었다. 준경 자신도 그 성과에 놀라고 있었다.
단정홍과 이탁을 알기 전이었다면 허둥지둥하다가 동평에게 패했을지도 몰랐다.
‘두 개를 휘두르지만, 공격은 오직 하나로만 한다.’
또 하나 밝혀진 동평의 공격이었다. 방향은 달랐지만, 오직 하나의 창으로만 공격했다. 두 개로 한꺼번에 공격했을 때 몸에 빈틈이 생기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호연작은 그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구상하는 쌍편은 두 마리의 뱀이 각기 다른 목표를 노리는 것과 같았다. 동평이 휘두르는 쌍창은 단조로운 창 공격을 보완하기 위해 양수를 모두 써서 사각을 노린다는 장점이 있을 뿐, 단점도 적지 않게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준경처럼 방패를 잘 활용하는 자를 만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채찍은 방패에 가로막히더라도 구부러지는 공격이나 감는 공격이 가능하지만, 창은 그럴 수가 없다.
‘하긴 군부에서 방패를 쓰는 장수가 몇이나 된다고. 기껏해야 상대해볼 수 있는 것은 궁수를 보호하는 방패병일 텐데. 그리고 그런 방패병과는 비무 할 일이 없지.’
동평의 숨이 목에 차기 시작했다. 준경은 이제 참았던 힘을 뿜어낼 때라고 생각했다. 창이 공격해 들어오자 있는 힘껏 곡도로 창을 내리쳤다.
창날과 곡도가 마주치자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창대가 바르르 떨리더니 멀리 튕겨 나가버리고 말았다. 동평의 눈이 커졌다. 손끝에 전해진 충격이 지금까지 수세에 몰린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준경이 짓쳐들어오자 남은 창으로 방어를 위해 준경을 찔렀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수패에 먼저 가로막혔다. 이미 준경의 곡도는 거의 근접한 상황, 창을 돌려 창대로 준경을 밀쳐 내려 했지만, 생각만큼 창이 빠르게 빠지지 않았다.
‘이런!’
생각과 함께 강한 충격이 동평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곡도로 내려칠 것 같았던 준경이 발로 동평의 빈 옆구리를 강하게 후려친 것이다.
‘창날이 수패에 박힌 순간, 오히려 수패를 더욱 앞으로 내밀었다.’
빠르게 창을 돌리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창날이 수패에 생각보다 강하게 박혔고, 그것을 빼내는데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제야 준경이 수패를 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짐승의 가죽을 나무 방패에 덧댄 것이 수패다. 단단한 철을 놔두고 일부러 수패를 쓸 이유가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 수패를 쓰는 사람이 많이 사라진 이유다. 그런데 이런 묘용이 있었다니.’
만약 철로 된 방패였다면 자신의 창 공격을 그리 빨리 방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벼운 재질이기에 빠른 공격에도 쫓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동평은 자신이 준경을 경시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