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5) 각자도생(各自圖生) =========================================================================
단정홍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소동파가 직접 즉위를 축하하는 글을 써주고 아우인 소철이 읊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천하의 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오 년간 잘 추슬러 감히 어떤 나라도 대리를 침범할 수 없도록 힘을 갖춘다면 민국실록이라는 명분까지 손에 넣어 송에게 핍박받고 있는 묘족, 월족과 더불어 장강 이남 백성의 지지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때쯤 되면 능히 송, 서하에 뒤지지 않는 하나의 제국이라 칭할 만했다.
단정홍이 떠나고 며칠이 흘렀다. 그 사이 준경은 묘족, 여족과 함께 소동파를 위해 세워질 서원 건설에 나서고 있었다. 무승들도 저마다 아름드리나무를 짊어지며 구슬땀을 흘렸고, 여인들은 완성될 서원 바닥에 놓일 천을 짜느라 분주했다. 이소는 바느질을 처음으로 배워보는지라 매일같이 손끝에 피멍이 들었지만 그래도 스스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이 재미있었던지 전보다는 많이 웃고 있었다.
그런 공사 현장에 호연작이 나타났다.
“동관이 떠났습니다.”
며칠 간의 이야기를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섬의 서부를 샅샅이 뒤져 단정홍이 타고 온 배를 찾아냈고 그 배가 떠나기를 기다려 동관은 해상에서 급습했지만 서로 궤멸적인 손해를 입었다고 했다. 대리의 새로운 왕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모른 것이 가장 큰 실책이었다. 단정순을 모시기 위해 단정홍 혼자만이 온 것이 아니라 상당한 수의 호위병이 함께했고, 그들은 출발을 기다리며 인근 무인도에 대기하고 있었다.
단정순이 탄 배와 합류하기 위해 이들이 출발했을 때, 동관이 먼저 단정순이 탄 배를 공격했고, 배는 반파가 되었다고 했다. 단정순을 살리기 위해 단정홍은 화살비를 헤쳤고, 가까스로 호위선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사이 나머지 호위선이 죽기 살기로 동관의 선단을 공격하자 양쪽 다 엄청난 손해를 입고 물러났다고 했다.
동관이 포구에 도착하여 병력과 선단의 피해를 파악하니 무려 7할이 손상이었다. 힘들여 키운 사병까지 포함된 결과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박살 냈을 정도라고 했다.
거기에 포면과 적설이 며칠 내로 도착할 것이라는 보고까지 받자 더는 해남도에 남아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대리에서 그토록 엄중한 호위를 펼친 것이 실록을 대리로 가져가기 위한 행동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마도 동관은 도성으로 돌아가 추후를 도모할 심산인 것 같았습니다. 그는 소관에게 해남도 지휘사를 임시로 맡기고, 이후로는 추밀원부사의 명을 따르라고 말하고 급히 떠났습니다. 추밀원부사 일행은 삼 일 전에 도착하였고, 저는 따로 도성에서 명이 내려올 때까지 지휘사를 유지하도록 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파선을 뵙기 위해 직접 추밀원부사께서 내일쯤 이곳을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추밀원부사와 이미 이야기가 끝난 모양이었다. 호연작의 얼굴은 동관과 함께 있을 때와 달리 무척 밝아 보였다. 설명이 끝나자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공사를 진행했다. 호연작은 잠시 준경을 불러세웠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네.”
“무엇이 말입니까?”
“자네가 갈송을 때려잡던 그 순간 말일세.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실력을 숨길 수가 있었나? 소고를 상대로 고전했던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네.”
“그건.”
단정홍의 조언이 너무나 컸다고 설명하려고 했지만 호연작은 준경이 답변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나에게도 목표가 생겼네. 그동안 나태했던 마음을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수련하고자 하네. 말을 타고 질주하며 두 개의 채찍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때까지 말일세. 그때가 되면 나와 진정으로 겨뤄주지 않겠는가?”
“저도 바라던 바입니다.”
호연작이 절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준경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 방향을 정확하게 잡지 못했을 뿐이다. 말을 탄 상태에서 두 개의 채찍을 자유자재로 휘두른다면 얼마나 강해질까? 어쩌면 자신을 뛰어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때까지 자신 역시 얌전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호연작은 되돌아갔다. 내일이 되면 추밀원부사 일행을 인도하여 다시 이곳을 찾을 것이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사람은 하북삼절의 일인이며 검호라고 불리는 적설이었다. 그는 또 얼마나 강할까? 단정홍이나 이탁에 비해 무엇이 다를까? 어서 만날 생각에 두근거리기만 했다.
그런 준경을 보며 이소는 혀를 찼다.
“며칠 잠잠하더니 병이 또 도졌네요. 남자들이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남자라서 그럴 거야.”
자매는 이소가 뜨고 있던 천을 당겨주었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실수로 이소가 바늘에 찔릴뻔한 것을 보고 미리 막아준 것이다.
“모르겠어요. 정말 바보 같아요. 그날 이후로 언니를 한 번도 찾지 않았죠?”
부끄러운 질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이소는 또래가 가졌어야 할 당돌함과 발랄함을 이제야 발산하는 느낌이었다. 이곳은 고려보다도 더 개방적이었고, 남녀가 평등했다.
자매는 그냥 웃음을 보였다. 자신이 준경과 같이 있을 때면 이소도 항상 같이 있었다. 그것은 미묘한 감정일지도 몰랐다. 준경과 자신의 처지를 인정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준경에게서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혼재했기 때문이다. 준경이 자신을 품을 수 없었던 이유 중에 절반은 이소의 눈치 없음이 차지하고 있었다.
자매는 시선을 돌려 준경에게 향했다.
상반신을 훤하게 드러내고 둘이 들기에도 버거운 나무 기둥을 번쩍 드는 모습은 여족과 묘족 여인들에게도 볼만한 구경거리였던 모양이었다. 만약 자신과 이소가 준경과 한집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청혼이 몇 번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될 정도로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런 준경이 자랑스럽게 여겨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강함을 갈구하는 준경의 운명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언제쯤 그런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영원히 이뤄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계속 지켜봐야 했다.
하루가 지나고 동파서원의 건립현장에 수십 명의 낯선 인원이 들이닥쳤다.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파선께서 건재하신 것을 이렇게 직접 확인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추밀원부사께서 이런 오지까지 직접 행차하실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이다.”
임시로 자리가 마련되고 호연작과 뒤따르던 송군이 호위를 섰다. 그들을 보며 추밀원부사 포면은 손을 내저었다.
“다들 믿을만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리 경계할 필요 없네.”
“그것은 사실이오나 대인의 안전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소관이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호연작의 고집은 아랫사람으로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포면은 이미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었는지 고개를 흔들며 방금 나온 차를 들었다.
“검호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양입니다. 하하하.”
포면의 머리는 나이를 말해주듯 백발이었지만 웃음소리는 청년처럼 힘이 있었다. 그런 포면의 옆에서 함께 차를 들고 있던 노 무관이 맞장구를 쳤다.
“우리 모두 환갑을 넘겼으니 젊은 아이들의 걱정이야 이해할만하지. 나야 신경 쓸 것이 없으니 편해서 좋지만.”
포면 못지않게 백발이 성성한 무관이 검호 적설이었다. 준경은 대화 자리에 끼지 못하고 슬며시 호연작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환갑이 넘었다고 했음에도 팔 근육은 탄탄했고, 손 또한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동관이 도성으로 돌아갔다고 들었네만.”
차를 들며 소동파가 물었다. 동관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포면과 적설의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생각만 해도 거부감이 있다는 뜻일까? 포면이 천천히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동관이 대만에서 한 일을 오면서 들었습니다. 차마 목불인견의 상황이라고 그러더군요. 돌아가면 그 일을 따질 생각입니다.”
“그곳은 귀양지도 아니고 새외(塞外)나 마찬가지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손을 썼겠지.”
소동파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소수민족을 상대로 무자비한 살육을 벌인 전과가 이미 동관에게 여러 차례 있었다. 동관은 오히려 그런 일을 전공으로 포장하여 유능한 지휘관으로 인정받았다. 그것이 포면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지금이야 불장난에 불과하지만, 만약 요와의 전쟁에서 동관이 중임을 맡게 되면 참으로 큰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번에 동관이 대리와 싸워 큰 손해를 입었다고 들었는데 듣던 중 낭보였지요. 당분간 자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포면은 소동파와 함께 앉아 있는 우마르를 바라보았다. 포면은 품속에서 사등분으로 접혀 있는 종이를 꺼내 펼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그림인지 글자인지 알아볼 수 없는 기묘한 문양이 붓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틀 전에 귀빈이 타고 온 대식국 범선의 머리에 전에 없던 글자가 각인되어 있어 그대로 적어 왔습니다. 혹시 이 문양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까?”
우마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건 통역을 맡은 대식국 상인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기다려라.”
“기다려라?”
우마르와 통역의 눈가에는 언뜻 공포가 비치고 있었다. 포면이 통역이 말한 내용을 그대로 읊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들이군요. 하사신인지, 어쌔신인지 하는 놈들.”
준경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자 준경의 존재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포면과 적설의 시선이 준경을 향했다. 적설이 예리한 눈빛으로 준경을 한번 훑어보고는 소동파에게 물었다.
“저 어린 녀석은 누구입니까?”
환갑이 넘은 적설에게 준경은 손자보다도 어린 녀석에 불과했다. 준경은 발끈할뻔했지만,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꾹 참았다.
“고려에서 온 젊은 군관일세.”
“아!”
증포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포면과 적설은 그제야 준경에 대한 관심을 거뒀다.
“글자로 봐서는 바티니가 움직인 것 같습니다. 어쌔신은 몇 개의 분파가 있는데 각자 자신들의 암살 기호를 남기지요. 설마 했는데 이렇게 빨리 찾아내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전에 이야기로 듣기는 이 섬에도 무슬림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들이 소문을 듣고 알린 것 같습니다. 바티니는 시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일종의 용병이라 할 수 있는데 정통 시아파 어쌔신과 다르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니파 또는 기독교와도 손을 잡습니다.”
우마르의 설명에 일행은 더 깊은 설명이 필요함을 느꼈다. 어느새 준경에게도 자리에 앉도록 하여 함께 듣게 되었는데 궁금한 단어가 나올 때마다 묻고 또 묻고 하여 우마르가 아는 것을 모두 말했을 때는 어느덧 저녁이었다. 근처에 불을 지피도록 하고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아마 시리아 바티니에게 이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리와 시간을 따져볼 때 불가능하지요. 해남도에 존재하는 소수의 회족을 통해 우마르의 도착이 지역 본산에 알려졌고, 그 본산에 머무르고 있던 바티니, 또는 어쌔신, 그것도 아니라면 그들의 사주를 받는 상인, 밀정 등에게 알려진 것으로 추측합니다. 아마도 배에 글자를 새긴 것은 해남도에 존재하는 회족일 것입니다. 포구에서 짐꾼 노릇을 하는 자들도 있다고 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최소한 소식을 듣고 그들이 몰려오려면 반년은 족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사이 우마르가 듣고 싶었던 소식이 들려온다면 계속 이곳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됩니다.”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가 없는 것은 이미 해남도로 결정했을 때, 우마르에게 소식을 알리기 위한 상인이 대식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우마르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정체도 이미 설명을 하여 일행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킬리지 아르슬란.
아나톨리아에 기반을 두고 있던 룸 술탄국의 왕자였다. 룸이란 단어는 아랍어로 로마를 뜻하는데 이 지역이 오랫동안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기에 붙은 이름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시리아, 셀주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지고, 자신은 포로로 잡혔지만, 왕자는 언제고 다시 왕조를 일으킬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왕과 재상의 연이은 죽음으로 셀주크 제국이 분열되자 포로에서 풀려나 아나톨리아로 돌아온 그는 강력한 해군력을 자랑하는 스미르나의 힘을 얻고자 데릴사위가 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중이라고 했다.
“솔직히 자객의 강함을 증 대인에게서 들었지만 믿기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나까지 이곳에 와야 했는지.”
검호 적설은 여전히 의심의 눈을 지우지 않았다. 세 명의 금군 위사가 그들의 강함을 말하는데도 ‘그건 너희가 약해서 그렇다.’라는 말로 눌러버리니 감히 대꾸하지를 못했다.
“그들의 강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인질을 잡는 것은 예사고 독을 사용하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통역의 말에 검호 적설은 ‘그러니 자객이지.’라며 더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이제 나머지 이야기는 포면과 우마르 사이에서 조율할 문제였다. 그는 준경과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다.
“아까 중간에 이야기를 듣자니 동관이 자랑하는 삼협 중 갈송을 네가 베었다고?”
동관이 자랑하는 장수 세 명 중 두 명이 이곳 해남도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리에 적설은 더 캐묻고 싶었지만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어 꾹 참고 있었다. 준경은 적설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호연작이 끼어들었다.
“그때 준경의 활약을 보셨으면 검호께서도 깜짝 놀라셨을 것입니다.”
준경은 호연작의 칭찬이 쑥스럽기만 했다. 적설은 아깝다는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섬전수도 볼 수 있었을 것을 참으로 아깝구나. 나와 그는 정녕 인연이 없구나.”
적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단정홍을 만날 절호의 기회가 무산된 것이 안타까운지 연신 혀를 찼다. 삼절오은이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에 친분이 없는 한, 평생을 가도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준경은 그런 적설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어르신과 이탁 중 누가 더 강합니까?”
주변이 조용해졌다. 호연작은 아연한 표정이었고, 포면과 소동파는 우마르와 대화를 나누다 말고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설은 준경의 질문에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