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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37화 (37/257)

00037  (5) 각자도생(各自圖生)  =========================================================================

단정홍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라고 여겼기에 준경은 화색이 감돌았다. 그런 준경의 표정이 밉살스럽다고 느꼈는지 단정홍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아악!”

피하려고 했지만, 워낙 가까운 거리가 피할 틈도 없이 모래 알갱이 하나가 이마를 때렸다. 따끔함에 눈물이 쏙 나올 정도였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착각하지 마라. 아직 나를 상대하기에는 멀었으니까, 네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경험과 숙련이다.”

그 말이 맞았다. 비록 단정홍이 천적이라는 단어까지 써주며 추켜세워주었지만, 이번 전투는 상당한 운이 따라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준경의 표정이 금세 진중해지자 단정홍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기대를 걸어볼 만하구나. 이제 마을로 가자. 너를 구하느라 내 일정이 지체되었다.”

단정홍이 거암에서 훌쩍 뛰어내려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준경 역시 서둘러 쫓았다. 죽을 기세로 달렸지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단정홍과의 거리를 조금도 따라잡지 못했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하자 준경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무리가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대장이다. 살아 있었군요.”

평소 낙천적인 함보도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지 준경의 귀환에 그제야 숨을 크게 쉬고 있었다. 양욱이 미안한 표정으로 준경을 바라보자 준경은 양욱의 허리를 툭툭 치며 웃었다. 자매와 이소 역시 무승들에게 소식을 듣고 꽤 마음을 졸였는지 한숨을 내쉬었고, 이소는 준경의 가슴을 작은 주먹으로 치기도 했다.

“자매 언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미안.”

자매를 바라보며 겸연쩍게 뒷머리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소동파는 단정홍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아도 단정홍이 나타난 것이 준경과 무관하지 않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제가 벌인 일이라고 떠들썩하게 알렸으니 아마도 그들은 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해안가에 숨겨놓은 배를 찾고자 벌써 뒤지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어서 떠나고자 합니다. 그런데도 제가 파선을 찾아온 것은 한 가지 약속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왕야께서도 실록을 원하십니까?”

실록의 이야기가 소동파에게서 흘러나오자 주변은 조용해졌다. 지금까지 단정홍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만약 강제로 소동파를 겁박하려 한다면 막아야 했다. 그건 금군 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대파라고 할 수 있는 동관이 실록을 가지는 것도 막아야 하지만 대리를 대표하는 단정홍이 실록을 가지는 것도 막아야 할 일이었다. 이제 얼마간을 더 버티면 증포의 대리자가 도착하니 그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그런 시선들을 느꼈는지 단정홍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제가 강제로 파선을 윽박지르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나 봅니다. 저는 실록보다 오히려 파선께 볼일이 있습니다.”

실록에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들려 긴장하고 있던 자들은 참았던 숨이 몰려나왔다.

“형님께서 보위에 오르는 날, 명망 있는 인사의 축하를 받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귀양 중입니다.”

“압니다. 그래서 소개장을 하나 써주셨으면 합니다.”

“소개장? 누구에게 말입니까?”

“동생분을 모시고 싶습니다.”

지켜보던 세 명의 금군 위사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소동파는 지그시 단정홍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기쁨보다는 우려를 담고 있었다.

“왕야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겠지요?”

단정홍은 소동파의 질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대수로울 것이 없지 않으냐는 표정이었다. 그런 단정홍과는 다르게 소동파의 얼굴이 굳어지자 다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즉위식에서 실록의 일장을 낭독해주셨으면 합니다. 대리는 민의 정신을 이어 새롭게 태어날 것임을 천명하고자 합니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입니까?”

“과야.”

“네, 아버님.”

소동파는 자신의 곁을 항상 지키고 있는 셋째아들의 이름을 불렀고, 아들은 충직하게 대답했다.

“지필묵을 준비하거라.”

“곧 올리겠습니다.”

소과가 잠시 소동파의 곁을 떠난 사이 준경은 의문을 가진 모두를 대신해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 그리 심각한 일입니까? 일국의 왕이 즉위하는 자리, 명망 있는 인사에게 축사를 부탁한다는 것이 그리 결례가 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축사하는 쪽에서도 영광이 아닐까요? 실록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읊어만 달라는 것인데.”

“읊어달라고 하니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소동파는 뒷짐을 쥐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우 철(轍)은 나와 함께 진사에 급제한 뒤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러다 나와 함께 신법에 반대하여 좌천되었지. 지금은 영빈선생이라 불리며 고문학에 매진하고 있다. 성격이 곧고 남의 의견을 버리지 않아 나는 그런 아우를 항상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그 설명만으로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어 무리는 눈을 멀뚱멀뚱하고 있었다. 소동파의 탄식이 이어졌다.

“실록의 일장 내용을 짐작하는 사람은 있어도 원전(原典) 그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정확하게 내용을 알고 있는 경우는 필사본으로 보았거나, 원본을 보았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게 해당하지. 이제 알겠느냐? 왕야의 부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소는 작은 탄성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뭐가 뭔지 그저 눈알만 굴리고 있는 준경의 귀를 잡아당기더니 설명했다.

“파선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원전이나 필사본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일장 내용을 읊을 수가 없다고요! 즉, 실록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고 천하에 밝힌 셈이 되죠.”

소철의 안위가 위협받게 될 것이고 소동파 역시 실록을 노리는 자들로부터 위험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요나라가 이들의 신병을 인도해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소철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대리에 눌러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대리는 그를 보호함으로써 민국의 유지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확인시킨다. 제아무리 요나라가 강대국이라 하더라도 대리까지 오려면 송을 거쳐야 했다. 요가 송을 통해 협박해도 송이 군사적인 행동을 하기에는 요와 서하를 얼마만큼 믿을 수 있느냐가 작용할 것이다. 대리는 소식과 소철, 두 명의 명망 높은 학자를 고스란히 품에 앉을 수 있고, 차후 실록의 확보에도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묘족과 월족을 품으려고 하시는군요.”

국경선이 있다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 지도 상에 그어진 선일 뿐이다. 대리와 송나라 사이의 국경이 그러했다. 수많은 이민족이 험지와 습지에 거주하며 자신들의 전통을 지켜나갔다.

“대리는 지금껏 그 힘을 온전히 합치지 못했습니다. 귀족들이 난립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두 번의 반란을 겪으며 귀족들은 상당수 정리되었습니다. 이제 형님께서 보위에 오르시면 지금껏 대리의 왕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실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중원을 꿈꾸지 않습니다. 다만, 인접한 성도로와 광남서로 만큼은 탐이 납니다. 묘족과 월족은 우리 백족과 문화도 비슷하고 그곳의 지형은 방어하기에도 쉽습니다.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요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송의 신경은 온통 북쪽에 쏠려 있다. 남쪽에서 자신들이 준동한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홍은 확신하고 있었다. 준경은 그런 단정홍이 달리 보였다. 국가의 대사를 논하기 시작하자 무예를 가르치던 열정보다 야심이 크게 보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었지만 조금 슬프기도 했다.

“대리라면 자격이 없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송이 무너지면 다음 차례는 대리가 될 것입니다. 순망치한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드넓은 중원에 비하면 성도로와 광서남로는 척박한 변경에 불과합니다. 오대십국 시절에도 장강 이북의 국가가 항상 천하를 좌지우지했습니다. 수고보다 얻는 것이 없다면 그들은 남부 진출을 포기할 것입니다. 더구나 요나라는 기병이 중심입니다. 숱한 산과 물의 연속인 남부 지역은 그들의 전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성도로는 성도를 중심으로 하는 촉 땅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광서남로는 바로 이곳, 해남도를 포함한 중원 최남서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수십 년간 두 번의 반란으로 실추된 대리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단정홍의 야망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너무나 무리수가 많았다.

진본이나 필사본을 직접 원하지 않은 것은 그것을 소동파가 가졌는지도 의문이었고, 무엇보다 그 내용을 천하의 명망가가 읊어서 정권의 명분을 인증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소식과 소철의 명성은 이미 천하에 널리 알려진바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진실이 아니라고 소리칠 수 있는 명사는 몇 되지 않았다.

“지금 장강 이남은 송에 대한 불만으로 팽배합니다. 누군가 봉기를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아국은 그런 송을 대신해 충분히 백성을 감쌀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요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해마다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있었고, 그 공물은 고스란히 농민들에게서 흘러나왔다. 풍부한 물산을 자랑하는 장강 일대의 백성은 해마다 늘어만 가는 세금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눈앞에서 자신들의 것을 가로채는 도둑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소과가 지필묵을 대령하자 소동파는 붓을 들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단정홍에게 말했다.

“아우에게 즉위식에 참석하여 명문(名文)을 읊도록 하겠습니다. 그 내용은 제가 직접 쓰도록 하지요.”

“실록은 읊지 못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단정홍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과거 소동파가 단정홍에게 빚을 진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단정홍은 자신의 청을 소동파가 받아들여 줄 것으로 확신했는데 뜻밖에 소동파가 태도를 달리하자 조금 믿기지 않는지 미간이 몰렸다.

“유예를 하고자 합니다.”

“유예라니요? 즉위식을 미루자는 말입니까? 설마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겠고, 실록을 읊는 것을 유예하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왕야의 짐작이 맞습니다. 지금 송은 어진 임금의 영도 아래 신법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지금의 신법은 예전 과격한 개혁의 실패를 깨닫고, 더 온건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지요. 그러니 5년만 기회를 주시지요. 만약 5년 뒤에도 송이 한치의 발전도 없다면 실록 원전이 있는 장소를 알려 드리지요.”

소동파의 선언에 단정홍은 더욱 미간을 모았고, 세 명의 금군 위사는 기겁했다. 만약 위에서 알게 된다면 반역죄로 몰릴 정도로 소동파의 발언은 과격한 것이었다. 준경은 마치 이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귀를 파고 있었다. 심각한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당최 자신과의 연관성을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소를 알려준다는 뜻은 직접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어찌 천하의 보물을 수중에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저 그곳에 있을 것이라 짐작할 따름입니다.”

“짐작? 그럼 지금까지 연구하신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입니까?”

“민의 사대 서고 중 세 곳이 불에 타고 한 곳 역시 화마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충직한 관리인들은 그런 때를 대비해 여러 개의 필사본을 준비해둔 뒤였지요. 당시의 필사본이라면 현재 진본이라 불러도 무방합니다만 권마다 옥새가 찍힌 원본의 진가에는 그래도 미치지 못하지요. 이후 필사본이 천하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기에 원본의 행적은 더욱 오리무중에 빠졌습니다만 그래도 계속 그 자취를 연구하다 보니 보이는 것이 있더이다.”

“흐음.”

단정홍은 고민에 빠졌다. 기실 자신들의 뜻대로 된다고 해도 지금의 대리는 반란의 여파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어수선한 상황을 일소하기 위해 송과의 전쟁을 생각해냈고 그 명분으로 매우 좋은 것이 민국의 유지를 잇는 것이었다. 송이 결코 전력을 다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던 것인데 만약 요나라가 서하를 움직이고, 송의 군사 행동을 묵인해준다면 자신들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 최악의 상황이 거의 있을 수 없다고 여겼지만, 미래라는 것은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5년이라, 5년.”

5년 정도라면 국내를 수습하고 힘을 모으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사이 송이 자신들을 경계하며 남부에 군대를 배치할까? 요나라가 갑자기 멸망하지 않는 이상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송은 점점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단정홍은 믿고 있었고 그렇다면 소동파의 제안을 수락하는 것이 크게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실록의 원본을 가질 수 있다면 여러모로 활용할 곳이 많았다.

“혹시 그 사이 파선께서 선계에 드신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소동파의 나이가 적지 않음을 의식한 것이었다. 단정홍의 질문에 자신의 의견을 수락할 뜻이 있다는 것을 파악한 소동파는 그제야 표정이 풀렸다.

“여기 삼남 과가 증인입니다. 아우에게도 알려둘 테니 만약 제게 불의의 일이 닥치거든 상의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파선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단정홍이 손을 모으자 소동파 역시 손을 모아 그들이 서로 뜻을 교환했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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