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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36화 (36/257)

00036  (5) 각자도생(各自圖生)  =========================================================================

“으아아아!”

바닥을 구르는 갈송의 수급을 뒤로하고 몰려드는 송군을 향해 준경은 크게 소리쳤다. 그것은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데로 이루어진 전투였고, 가능성을 확인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마치 사자후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함성은 송군을 주춤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준경은 수패를 단단히 동여매고 곡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말을 잃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송군을 상대로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준경의 발이 땅을 박찼고, 북쪽에서는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불이다!”

송군은 느닷없는 화재에 깜짝 놀랐다. 그것도 자신들의 퇴로를 막는 불이었다. 자신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음을 인식하며 무기를 버리고 남쪽 오지산을 향해 도망치는 자도 있었다.

불을 지르자 열 명의 무승이 함성을 지르며 준경에게 합류했다. 아니 이제는 무승이라고 보기에는 어색할 정도로 짧은 머리들이 자라나 있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인상에 덩치마저 큰지라 송군은 기세에서 눌려 숫자를 활용하지 못하고 점차 쓰러져갔다.

준경은 송군이 임시로 머물던 진영에서 군관들이 탈법한 말 몇 필을 발견했다. 그중 가장 강건해 보이는 말을 보니 화살을 담는 전통이 안장 양옆으로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갈송이 타던 말이 아닌가 싶었다. 말에 올라타려 하자 말은 주인이 아니라며 거부했지만, 준경은 완력으로 제압하고 올라탔다. 야생마나 특별한 명마가 아닌 이상 힘 싸움에서 이기면 말을 다루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말에 올라타자 땅에 발을 디디고 있을 때보다 시야가 넓어지고 지친 기운이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준경은 거추장스러운 전통을 떼어버리고 등자로 힘껏 말을 걷어찼다.

같은 갈색마였건만 준경이 타던 말이 남방 계통의 작은 말이었다면 지금 준경이 탄 말은 북방에서 키워진 말이었다. 털은 윤기가 흘렀고, 달리기 시작하자 숨소리는 경쾌했다. 말발굽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선율이 되어 흘렀고, 준경은 그 선율에 따라 춤을 추는 무희가 되어 있었다. 손이 흔들릴 때마다 송군의 수급이 어김없이 허공으로 솟아올랐고, 얼마를 죽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을 때, 끝까지 살아남은 송군은 두 손을 번쩍 들며 항복을 외쳤다.

그때쯤 호연작도 정신을 차리고 절반 정도 남은 송군을 살려달라고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패잔병을 이끌고 돌아가면 호연작에게 적지 않은 책임이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호연작이 스스로 나선 이상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공신의 핏줄이고, 소동파가 조금 거들어 준다면 아마도 징계의 수위는 상당히 낮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준경이 결단을 내릴 시간이 없었다.

북쪽에서 일어난 화재를 뚫고 달려오는 수십 기의 기마(騎馬)가 있었다. 그 뒤로 수를 셀 수 없는 송군이 화재를 진압하며 길을 열기 시작했다.

호연작은 돌연한 사태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고, 호연작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송군 포로들은 구원군이 왔음을 깨닫고 환호성을 지르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무기를 줍기 시작했다.

준경이 무승들을 향해 소리쳤다.

“양욱, 모두를 이끌고 먼저 도망쳐!”

준경이 수십 기의 기마를 향해 고삐를 당기자 양욱을 비롯한 무승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오지산 방면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기세를 틈타 사기가 떨어진 송군을 몰아붙였던 것이지 제대로 된 지휘관이 있었다면 자신들이 설치지도 못했던 상황이었는데 원군까지 나타났으니 크게 불리해진 것을 직감한 것이다.

북부 숲의 화마를 뚫고 나오는 기마는 무리하게 통과한 흔적이 역력하여 전신에 그을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정예라는 것을 뽐내는지 안광만은 기가 살아 있었다. 준경은 전투 중에 습득한 창을 수패가 고정된 왼손에 잡고 일직선으로 뻗었고, 오른손에는 곡도를 잡았다.

화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준경의 돌진이 이어지자 기병은 산개하려 했지만, 미처 피할 여유가 없었던 가장 전면의 기병 둘이 창과 곡도에 동시에 공격당하며 그대로 말에서 떨어졌다. 준경은 기병의 끝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다. 대열이 두 갈래로 완전히 쪼개지자 반전하여 우측의 적을 쫓기 시작했다. 좌측의 적들은 등에 멘 활을 풀러 준경을 향해 조준했다. 준경은 우측 대열의 후미를 앞지르며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곡도가 수평으로 뻗자 피하려고 몸을 움직였던 적은 자신의 몸이 돌연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낙마했다. 준경이 수평으로 그은 것은 바로 말의 옆구리였던 것이다. 동시에 등자로 자신의 말을 힘껏 찼다.

휙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 자신이 있던 자리에 수 개의 화살이 지나갔다. 다시 후미를 따라잡은 사이 전면에서는 양 대열이 반전하며 팔자 형태로 준경을 포위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준경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고삐를 힘껏 내리쳤고, 등자로는 사정없이 말 배를 찼다. 말의 주력을 극한으로 짜내며 적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근접했고, 곡도와 창으로 단숨에 처리했다.

“와아아아!”

기병을 따라 화마를 통과한 송군과 원군에 기운을 얻은 호연작의 송군까지 큰 소리를 지르며 준경을 원 형태로 포위하기 시작했다. 수십 기의 기병 중 이제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준경은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도망을 치고자 더욱 말을 재촉했다. 강건한 말도 준경의 계속된 기동 요구에 숨을 헐떡였다.

그러던 말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달리던 방향으로 엎어지기 시작했다. 준경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앞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참고 일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말의 엉덩이에 하나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주변으로 여러 개의 화살이 박힌 것으로 보아 말의 본능으로도 미처 피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화살이 한 번에 날아든 것으로 보였다.

“큭!”

낙마하면서 오른쪽 어깨를 다친 것인지 곡도를 잡은 손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준경은 그래도 곡도를 놓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다리를 다치지 않은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막아서라!”

준경의 전면에는 항복했던 송군이 원기를 되찾고 호연작의 지휘 아래 준경을 막아서고 있었다. 호연작은 준경을 보내주고 싶었지만, 준경이 낙마하는 것을 본 순간부터 표정이 어두워졌다. 준경은 모르겠지만, 방금 소리친 사람은 바로 이탁이었다.

이것이 동관의 심계일까? 갈송과 거리를 두고 군대를 출병시켰던 것이 분명했다. 휘날리는 기치가 그것을 증명했다. 동관은 자신이 거느린 송군 모두를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동관과 이탁이 점차 준경에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만약 성동격서를 적이 노렸다면 동관과 이탁은 포구에 남아 있는 것보다 갈송을 쫓아 성동격서 중 어느 하나를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안전한 방법이기도 했다. 주변의 참상으로 보아 섬전수의 짓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뜻밖에도 어리게 보이는 한 명의 무인이란 것에 짐짓 놀라기는 했지만 섬전수의 방수 중 일인일 것이라고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이탁이 한발을 내디딜 때마다 준경은 거대한 기세를 느꼈다. 마치 태산을 앞에 두고 있다면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절망감이었다. 천하의 명마에 올라탔다고 하더라도 저자는 이길 수 없다는 공포감이 몰려왔다. 애써 그런 마음을 떨어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크악!”

준경이 독 안의 든 쥐라 생각하며 포위망을 구성했던 송군은 자신들의 뒤에서 무엇이 치닫고 있는지 보지를 못했다. 갑작스러운 동료의 비명이 연이어 이어졌고, 포위망 일부가 허물어졌다. 이탁이 그 광경을 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섬전수!”

준경의 시선이 허물어진 포위망으로 향했다. 쾌속한 발놀림으로 삽시간에 자신의 앞까지 당도한 그는 바로 단정홍이었다. 이미 떠난 것으로 알았던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나타난 것이 의아하던 찰나에 이미 준경의 몸은 단정홍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평범한 이에 비하면 큰 체구에 속하는 준경의 몸을 가볍게 매고 단정홍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탁이 그를 가로막으라고 소리쳤지만, 포위망이 완성되려는 찰나 단정홍의 손이 번쩍이자 가로막던 송군이 우르르 쓰러지며 길을 만들었다. 그들의 전신에는 하나같이 철환이 박혀 있었다.

“이탁! 오늘은 내가 바빠 직접 상대를 못 해주겠다만 대리로 오면 기꺼이 상대해주도록 하마!”

비아냥에 가까운 조롱을 던지며 단정홍이 오지산으로 사라지자 이탁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단정홍! 네놈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동관은 다른 의미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정홍과 방수가 성동격서를 한 것이 아니라 방수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가 위험에 빠지자 직접 나섰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은 단정홍의 제자로 추정되는 앳된 얼굴 무인의 실전연습 대상이 된 것인지도 몰랐다.

“제자조차 이렇게 강하단 말인가? 섬전수를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분칠하여 하얀 동관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밀랍인형처럼 여겨졌다. 호연작이 주섬주섬 다가와 피해를 보고했을 때는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호연작의 면상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쓸모없는 놈이 명줄만 길구나.”

주변 병사들이 호연작의 행동을 증언해주지 않았더라면 내통했으리라 의심해도 충분한 상황이었다. 수모를 당하면서도 머리를 숙이며 죄를 청하는 것을 반복하자 동관은 호연작에게서 신경을 끊고 오지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섬전수의 절기라면 충분히 철환으로 소고와 갈송을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을 잘 다루고 창과 곡도, 수패를 기가 막히게 썼다고 하니 제자가 아니라 실력이 뛰어난 방수일 수도 있습니다. 섬전수가 실록을 찾기 위한 시간을 벌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탁 역시 분이 풀리지 않는 눈치였다. 방금은 섬전수를 가두기에 준비가 너무 부족한 상황이었다. 단 한 번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면 자신의 철권으로 그를 끝낼 자신이 있었다.

동관은 하얀 얼굴에 대비되는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지금부터 서쪽 해안가를 샅샅이 뒤집니다.”

“서쪽 해안이라 하시면?”

“실록을 얻었다 해도 대리로 가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하지요. 분명히 타고 온 배가 감춰져 있을 것입니다. 감시를 숨겨두었다가 섬전수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명적(明笛)을 울려 바다와 해변 양쪽에서 포위망을 구축한 후 대협께서 끝을 내주십시오.”

몸놀림이 재빠른 섬전수를 육지에서 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배를 타고 해남도를 떠나는 순간을 노리면 간단한 일이었다. 자신들이 있는데도 섬전수가 태연히 나타난 것을 보면 이미 목적한 바를 이뤘다고 봐도 타당했기 때문이다.

“들었느냐?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 해안을 샅샅이 뒤져라. 이번에도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숙이고 있던 호연작을 발로 걷어차며 이탁이 명령했다. 수족 같던 갈송과 소고를 불과 며칠 사이에 전부 잃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기에 죽어도 무방했던 호연작에게 화가 돌려졌다. 호연작은 속으로 '참을 인' 자를 되새김했다.

‘네놈들보다 출세하겠다. 그리고 강해지겠다.’

집념은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추밀원부사 포면과 검호(劍豪) 적설이 도착하면 그 줄을 잡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때 준경을 어깨에 멘 단정홍은 완전히 추격권을 벗어난 상태였다. 거대한 암석에 올라 주변에 인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준경을 내려놓았다. 준경은 땅에 닿자마자 먼저 단정홍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리로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악!”

단정홍의 손이 번뜩였고, 다친 준경의 어깨에 철환이 날아들자 준경은 어깨를 부여잡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단정홍은 그런 준경을 향해 혀를 찼다.

“물에 빠진 놈 구해줬으면 감사가 우선이 아니냐?”

준경은 실책을 깨닫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단정홍은 여전히 혀를 차고 있었다.

“네놈같이 무식한 놈은 생전 처음 봤다. 형님을 만난 후 파선께 따로 논의할 것이 있어 되돌아왔다가 네놈이 말을 타고 하산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 싶어 뒤쫓은 것이 네놈의 생명을 살렸다.”

단정홍은 형인 단정순에게 실록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단정순은 단정홍과 상의하여 실록의 행방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소동파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로 했다. 그 제안을 전달하기 위해 왔다가 우연히 산 아래로 내려가는 준경을 보았던 것이다.

“아무리 네놈이 기마에 적합하다고 하여 금세 익숙해지기가 그리 쉬운 일이겠더냐? 쥐꼬리만 한 자신감으로 돌진하는 것을 보니 내 가슴이 다 철렁일 정도였다.”

“다 보셨으니, 어땠습니까?”

준경은 무엇보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준경을 보며 단정홍은 피식 웃었다.

“나에게 말은 편리한 이동수단이었다. 싸워야 할 때는 두 다리와 두 손이 전부였지. 헌데 네놈은 말이 없으면 안 되겠더구나. 평원이 아니면 네놈은 함부로 싸워서는 안 된다. 즉, 반쪽짜리다.”

전 같았으면 준경은 반쪽짜리라는 말에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웃었다. 단정홍의 화법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반쪽짜리라는 말은 오히려 찬사에 가까운 말이었다.

“최소한 평원에서만큼은 네놈을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더구나. 제아무리 빠른 발걸음도 말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고 지속력도 떨어진다. 수패에 더 익숙해진다면 내 지법도 별 효용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단정홍에게 적의가 있었다면 지금 준경은 죽어야 했다. 그것은 단정홍의 다음 말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네놈은 나의 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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