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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33화 (3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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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각자도생(各自圖生)

일 년 전, 권신 고승태가 보정제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이후, 가장 유력한 계승자였던 단정순은 고승태를 피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해남도였다. 대리와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송의 영역이기에 대리에서 직접적으로 손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내일이면 우리는 대리로 떠납니다. 파선께서 대리에 베풀어준 호의를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송의 장수를 제가 죽인 것으로 하였습니다. 동관은 제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알아도 감히 대리까지 오지 못할 것이고 참고 넘기며 실록을 다시 찾으려 할 것입니다. 파선을 돕는 무관과 여기 고려 군관의 행적이 발각되지 않았으니 다시 기회가 온 셈입니다. 아마도 또 다른 장수가 출진하였다가 죽게 되면 동관은 뜻을 접고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탁을 보내야 할 것인데 그러면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말은 결국 호연작과 준경이 삼협 중 이탁을 제외한 일인을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능력에 부족함을 느낀 준경은 수련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자연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었다.

이소나 자매는 자신감 없는 준경의 표정을 처음 보았다. 도대체 상대가 얼마나 강했기에 그런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런 준경을 보며 단정홍이 웃음을 보였다.

“그래도 송의 무관을 통해 그 강함을 체험했으니 좋은 경험을 한 셈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을 알면 동관은 암살 가능성을 생각하여 이탁을 절대 떠나보낼 수 없다. 최악은 동관이 직접 두 명의 장수를 이끌고 나서는 것인데 겁이 많아 항상 완벽한 자리에만 나타나는 동관이 직접 나설 일은 없다고 봐도 좋다. 운이 좋다면 각개격파 당할 것을 우려하여 본국에 지원을 요청한 후 한동안 잠잠할 수도 있겠지.”

“만약 나머지 한 명이 신중한 성격이라 이번처럼 홀로 떨어져 있다가 위험을 맞이한 것을 교훈으로 삼는다면 병사들로 인의 장막을 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내부에 이미 사정을 훤하게 아는 자가 너희 편이지 않느냐? 독을 쓰든, 자고 있을 때를 노리든, 너희는 강력한 패를 아직 들고 있는 셈이다. 너희가 위기에 빠졌던 것은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단검에 독이라도 바르고 나왔다면 오히려 승리했을 것이다.”

단정홍의 설명에 준경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것도 전쟁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야 맞았다. 그러나 자신과 호연작은 충분히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방심했다가 오히려 죽음의 위기에 빠졌다.

“표정을 보니 제법 느낀 점이 있는 모양이구나. 고집을 피워 남자의 자존심 운운했다면 나는 이 길로 떠났을 것이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도 인연이니 한 시진 정도 너희를 지도해주마.”

단정홍은 준경만 가리킨 것이 아니라 양욱도 함께 가리켰다. 소동파는 단정홍의 호의에 기뻐했다. 삼절오은에게 직접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인에게는 꿈과 같은 혜택이었다. 준경도 그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 강해질 수 있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무승들은 아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준경과 양욱은 단정홍을 쫓아 한적한 곳으로 걸었다. 인적이 없는 적당한 곳에 서자 단정홍은 잘려진 나무 밑동에 걸터앉아 두 명에게 말했다.

“각자 가장 자신 있는 병기를 읊어봐라.”

“저는 계도를 씁니다만 육장이 편합니다.”

양욱이 먼저 대답했고, 준경은 잠시 고민을 해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 역시 수족을 이용한 박투가 편합니다만 잘 다루고 싶은 병기는 있습니다. 아직 손에 익지 않았지만 수패입니다.”

“그럼 가서 수패를 가지고 오너라.”

도나 창 같은 병기에 익숙하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소고에게 압도적으로 패한 상황에서 그런 병기를 잘 쓴다고 하기에도 참으로 민망했다. 그래서 준경은 수패를 꼽았다. 계속해서 수패를 써먹을 생각을 하며 왕진에게 지도까지 받았음에도 아직 제대로 실전에서 활용해본 적이 없었다. 이것저것을 다루는 것보다 이제는 죽더라도 한우물만 파야겠다고 생각했다.

준경이 장내를 벗어나려고 하자 뒤에서 단정홍이 소리쳤다.

“혹시 말도 한 필 구할 수 있다면 간 김에 끌고 오너라.”

마을에 말이 몇 필 있는 것을 준경은 알고 있었다. 마을로 돌아와 소동파의 도움으로 제법 튼튼한 갈색마를 한 필 구하고 수패와 도를 챙겼다.

다시 원래의 장소로 돌아오니 양욱의 눈이 밤색으로 변한 채 바닥에 그려진 발자국을 열심히 따라 밟고 있었다. 발걸음이 제법 어려운지 똑같이 밟으려고 노력하는데도 미묘하게 걸음이 달라졌다.

“발경의 위력에만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 진각을 위한 발걸음에 힘만 들어간다. 발경의 위력이 조금 준다고 상대가 받을 타격이 많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요는 힘의 분배다. 맞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양욱은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해서 단정홍이 알려준 걸음걸이를 반복했다. 단정홍은 시선을 돌려 준경을 바라보았다.

“수패가 꽤 그럴싸하구나. 유래가 있는 물건으로 보인다.”

일반 수패와 다르게 정성을 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했기에 준경에게서 잠시 수패를 받아들고 손으로 매만지며 마감에 단정홍은 경탄하고 있었다. 그는 수패를 준경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좋다, 이제 말에 타라.”

준경은 순순히 말에 올라탔다. 그런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말에 탄 적은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도와 수패를 동시에 들고 수련을 위해 말을 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치 부족했던 한 가지가 채워진 느낌이 들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네놈의 신체 단련은 괜찮은 수준이다. 그런데 너무 균형만 생각하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다. 나 역시 도를 들고 싸울 수는 있지만, 지공을 이용한 암기 수법에 비하면 초라할 지경이다. 아무리 균형을 생각한 체형이라도 그중에서도 더 뛰어나게 잘할 수 있는 몸놀림이란 것이 있단 말이다. 농경민이 만들어낸 무예와 북방 기마 민족이 만들어낸 무예가 다 같이 신체를 극한으로 단련시키지만, 단련의 쓰임새가 다르듯이 말이다. 너 자신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두 다리보다 네 개의 다리가 더욱 든든하게 여겨지지 않느냐?”

말과 밀착하며 말이 느끼는 숨소리, 고동이 느껴졌다. 그저 이동의 목적으로만 타던 말이었는데 두 손에 도와 수패를 들고 있으니 천하를 오시하며 당장에라도 도륙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성격이 자존광대(自尊廣大) 할수록 강해지는 부류가 있다. 말에 올라타면 말 아래의 사람은 작게 여겨지고 당장에라도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게 되지. 아까 병사들의 벽으로 송의 장수가 둘러싸여 있다면 어찌해야 하느냐고 물었었지? 두 다리로는 어렵다. 그러나 네 개의 다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지. 말을 다루는 수렵 민족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기병 일백으로도 능히 일만의 보군을 상대할 수 있는 그 강함. 네놈의 허벅지를 보아라. 모든 무예의 기본은 하체의 튼튼함이지만 네놈의 허벅지는 비정상적으로 두텁다. 처음부터 네놈은 말을 탔어야 했다.”

어쩌면 고려라서 그것이 불가능했는지도 몰랐다. 방벽을 쌓고 방벽을 중심으로 선 수비 후 공격에 나서는 고려군의 전술은 고구려를 이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방어적인 전술이었다. 넓은 만주 벌판을 종횡하며 숱한 수렵민족과 말을 달린 고구려의 무예에 말을 배제한 동작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어색할 정도였다.

단정홍이 손가락을 준경에게 향하자 반사적으로 수패로 몸을 가렸다. ‘텅’하는 소리와 함께 철환이 수패에 맞고 떨어졌다.

“화살을 비처럼 쏟아 붇지 않는 이상 말은 화살에 잘 맞지 않는다. 그럼 네가 방어해야 할 면적이 줄어든다. 상반신만 가릴 수 있으면 충분하게 되지. 그 차이는 크다. 여력을 공격에 쏟아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준경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다. 생각해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말이 정면에서 달리게 되면 화살이나 기타 공격에 적중 당할 가능성은 매우 적어진다. 말이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면에서 말이 노출되는 부위가 가장 최소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상반신이 훤하게 노출된 기수를 노리게 된다. 사람은 정면에서 가장 많은 면적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이 주변의 수풀이 무성한 것이 네놈에게는 행운이다. 수풀이 적병이라 생각하고 이 근방을 계속 돌아라. 도와 방패의 쓰임새를 계속 고민해라. 나는 네놈의 틈을 노려 돌을 던질 것이다.”

한 시진은 폭풍같이 지나갔다. 준경은 주변을 빙빙 돌며 도를 내려치며 수풀을 베어 갔다. 제대로 된 도약 거리 없이 장애물인 나무를 피하고 수풀을 베는 것은 순식간에 전신을 젖어버리게 할 정도로 말을 섬세하게 움직이면서 쉬지 않고 손을 놀려야 하는 일이었다. 준경은 그제야 수패의 손잡이가 일반적인 ‘ㄷ’자 형태뿐 아니라 위아래로 가죽끈이 달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말 위에서 한 손은 고삐를 잡아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수패를 잡는 손이 고삐를 잡아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려면 수패가 팔뚝에 고정되어야 했다. 섬세하게 덧댄 가죽과 가죽끈은 팔뚝에서 쉽게 밀려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했고, 고삐를 끄는 와중에 가볍게 팔목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방어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무기를 든 반대쪽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몸을 비틀며 무기를 휘둘러야 했는데 수패에 달린 세 개의 창날이 반대편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 되었다. 몸놀림을 최소화하여 체력을 아끼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량살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어느새 무아지경에 빠져 전장의 장수처럼 호쾌하게 수풀을 베어 가는 와중에 단정홍의 공격이 이어졌다. 단지 말 위에서 수패를 들어 방어한다는 것 그 하나의 차이밖에 없었건만 지켜보던 양욱이 입을 벌리고 구경했을 정도로 귀신같이 방어하고 있었다. 열 차례의 공격을 방어하고 주변의 수풀을 준경이 거의 베어내자 단정홍이 소리쳐서 준경의 행동을 막았다.

“어땠느냐?”

“마치 말이 제게 알려준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파공성이 일 때마다 말은 저에게 공포를 전달했습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구나. 아무리 수벽타를 연성했다고 해도 말을 탔을 때의 자세는 선천적인 재능과도 연결된다. 말을 수단으로 보느냐, 아니면 함께 하는 동료로 보느냐 하는 것이지. 말을 이해하는 자는 가장 유능한 정찰자와 동행하는 것과 같다. 말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좌우에서 일어나는 일을 독립된 시력을 통해 개별 사안으로 판단할 수 있고, 그 시력은 사람이 쫓을 수 없다. 더구나 야간에서도 시력은 사람보다 훨씬 낫다. 청각은 어떠한가? 말의 양 귀는 따로 움직이며 소리를 모으는데 한쪽 귀로 앞쪽의 소리를 듣고 다른 한쪽으로 뒤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후각 역시 뛰어나 자신보다 강한 자의 냄새를 감지한다. 무엇보다 말에게는 본능적인 육감이 존재한다. 말의 가죽은 인간보다 두껍지만, 그 표면에는 허공에 뜬 파리의 존재도 감지할 수 있는 신경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을 시승자가 온전히 교감할 수 있다면 그는 능히 일인군단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일인군단.”

가슴이 설레는 단어였다. 그런 준경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갈색마는 주변에 흐트러진 수풀을 되새김하며 한가롭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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