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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32화 (32/257)

00032  (4) 식해(食%26#37282;)  =========================================================================

그것은 곧 인식의 변화였다. 아무리 파락호 같은 무인이라도 일정 경지에 이른 자가 뚜렷한 주관 없이 경지에 오르기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실증해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알 것을 알았으니 죽는 것이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죽어라!”

만도가 일직선으로 내리그어지자 준경의 눈이 절로 감겼다.

그 순간, 한 줄기의 파공성이 들렸다.

준경의 감겼던 눈이 뜨여지자 만도는 저만치 날아간 상태에서 그대로 손을 든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소고의 모습이 들어왔다.

“웬 놈이냐?”

소고는 믿을 수 없는지 주변에 대고 소리를 쳤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중인은 어느새 소고 앞에 나타난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각진 턱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인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남자라고 보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홍색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 복식이 마치 관복과 비슷했다.

“대리(大理)가 이곳에 무슨 일인가?”

“아마도 그대들이 나선 이유와 비슷하겠지.”

“실록을 노리고 왔는가?”

“실록?”

중년인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해남도에 민국실록이 존재했는가?”

소고는 아차 싶었다. 중년인이 슬며시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자신의 답을 끌어내기 위해서 얕은수를 썼던 것으로 보였다. 소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떤 놈인지 모르겠으나 나를 농락했으니 곱게 돌려보내지는 않겠다.”

대리국이 있는 운남에서 해남도까지는 지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교역도 가끔 이루어지는 상황이었으니 대리의 관인이 나타난 것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매우 미묘한 시점이었다. 실록의 향방을 다른 이가 알게 할 수 없었다.

만도를 주워 자세를 잡을 때까지 중년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만히 있었다. 정신을 차린 호연작은 소고의 강함을 과소평가하는 그에게 충고를 던지고 싶었지만, 소고가 먼저 달려들고 있었다. 그에 맞춰 중년인의 오른손 중지와 엄지가 동그랗게 말리며 빠르게 퉁겨내자 세 번의 격타음(擊打音)이 들렸다.

소고의 눈은 더 놀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뜨여졌고, 거구가 그대로 쿵 하고 쓰러졌다. 준경도 호연작도 양욱도 그 광경이 마치 마술처럼 보일 정도였다.

‘손가락을 튕겼을 뿐인데 소고가 마치 목석 마냥 쓰러지다니 대체 무슨 수법인가?’

준경은 처음 보는 광경에 정말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소고는 제압을 당했을 뿐 아직 죽은 것은 아니었다. 준경 옆으로 쓰러진 덕분에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호연작은 간신히 일어나 중년인을 향해 포권했다.

“섬전수(閃電手) 단정홍(段正洪) 대협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를 아는가?”

중년인의 물음에 호연작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깨닫고 머리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천하의 삼절오은 중 오은의 일인인 단 대협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섬전수는 삼절오은 중에서도 신비한 인물 축에 속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지역은 한정되어 있었는데 주로 촉과 운남 일대였다. 해남도라면 그의 원래 활동 구역에서 조금은 벗어난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컥!”

소고는 자신의 만도에 자신의 목이 잘리는 수모를 당했다. 단말마가 끝나자 준경은 만도를 소고의 배 위에 던져놓았다. 준경 곁으로 다가오던 양욱이 갑작스러운 준경의 행동에 놀라 잔뜩 얼어붙었다. 단정홍은 미간을 찌푸렸다.

“과하구나. 네놈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나이거늘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그를 죽였단 말이냐.”

호연작 역시 기겁했다. 설마 준경이 동의도 구하지 않고 바로 소고를 죽여버릴 줄은 몰랐다. 소고가 늑대라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단정홍은 호랑이였다. 이곳에서 동관의 곁에 있는 이탁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인물에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으니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일 수에 혼신을 다하라고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그것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저는 소고를 상대하기 위해 왔고 지금 그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제가 책임져야 할 몫이지요.”

준경은 단정홍이란 사내의 강함이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소고를 제압한 방법도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단정홍이란 자가 중간에 끼어든 이상 결코 송에 호의를 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그 예측에 생사를 걸었다.

단정홍은 준경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준경의 시선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나도 관부(官府)에 속한 몸이지만 고려의 젊은 군관 역시 천상 관부인(官府人)이로구나. 맞다. 임무가 주어졌으면 마땅히 이루는 것이 관부인의 도리다. 그러나 한 가지가 틀렸다.”

단정홍의 손이 준경을 향해 움직였다. 준경은 피하려고 했지만, 어깨에 강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손으로 어깨를 매만지며 고통을 달래는 와중에 준경은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작은 물체를 발견했다. 허리를 숙여 그 물체를 집고 보니 손톱의 반만 한 작은 철환이었다.

“컥!‘

철환을 보며 단정홍 비기의 실체를 짐작했다고 생각한 사이 준경의 양 무릎에 다시 철환이 날아들었고, 그 충격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것이 일 수에 혼신을 담은 것 같은가?”

준경의 얼굴은 잔뜩 구겨졌다. 오늘따라 살면서 겪을 치욕은 모두 겪는 것 같았다. 단정홍의 말은 소고의 말을 정면에서 반박한 것이었고, 그것은 준경이 인용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럼 일 수에 혼신을 담아도 이기지 못하는 자는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이기지 못할 상대를 만나 싸우게 되면 없던 혼신도 생기기 마련이다. 기량이 떨어지는 것을 왜 혼신이란 이름으로 책임을 면해야 하는가?”

준경은 다시 일어섰다. 전의가 불타오르고 있었기에 양욱과 호연작이 준경을 잡으며 말렸다. 지금 세 사람이 한꺼번에 덤벼도 단정홍에게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내게 있어 오늘은 매우 기쁜 날이다. 그것이 너희를 살렸다.”

“선배께서 이곳까지 오신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단정홍은 대리 관인의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공무로 이곳에 왔다는 뜻이었다. 민국실록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도 짐짓 놀랐던 것을 봐서는 민국실록을 목표로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단정홍은 호연작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를 계속해서 선배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제가 견문이 짧아 삼절오은의 대명(大名)만 알고 있을 뿐 내력은 잘 모릅니다. 무지를 깨우쳐주십시오.”

이탁을 상대할 수 있는 패를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었다. 호연작은 단정홍과 작은 인연의 접점이라도 찾기 위해 대화를 지속하려고 했다.

“그전에 내가 먼저 너희에게 물어야겠구나. 너희는 누구의 명을 받고 이 자를 상대한 것이냐.”

단정홍도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호연작은 간략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고를 찾는 송군의 음성이 들려왔다. 시체를 사고사로 위장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단정홍은 지체하지 않고 손가락을 퉁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잘린 소고의 이마 가운데에 철환이 박혔다.

“단 대협!”

소고를 죽인 범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초지종을 듣고 도와줄 생각을 품었던 것일까? 호연작은 일말의 기대감이 생겼다. 단정홍은 그런 호연작을 향해서도 손가락을 내밀었다.

아까 준경이 어깨와 무릎을 맞았던 이상으로 더 강한 충격이 호연작을 엄습했다. 그 충격으로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호연작이 털썩 쓰러지자 준경과 양욱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정홍은 신형을 돌리며 말했다.

“얼빠진 표정 짓지 말고 묘족 마을로 안내하거라.”

호연작을 쓰러트린 것은 소고를 돕다가 그런 것으로 위장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그렇더라도 소고를 죽인 것을 단정홍 자신으로 누명을 쓰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시간이 없다. 내가 설마 파선을 해치기라도 할 것으로 보이느냐? 결단코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을 약속하마.”

천하의 팔강 중 일인이라는 사람이 설마 약속을 깨는 일은 없으리라고 여겨 준경은 양욱과 함께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라지고 송군이 그 자리에 나타나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리가 인근을 울렸다.

걸음을 재촉하면서 준경은 단정홍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있는 힘껏 달린다고 했는데 단정홍은 유유자적 자신을 쫓고 있었다. 오히려 양욱이 점점 뒤처지고 있었다.

“제법 날래다만 걸음걸이를 제대로 배우지 않아 엉망이구나. 차마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지경이다.”

준경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수벽타에는 걸음걸이에 대한 수련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고영창이나 고의화의 걸음걸이도 자신과 비슷했다.

“이상할 것 없다. 요도 발해도, 고려도 옛 고구려 같은 북방 기마 민족의 무예에 연원을 두고 있는데 마상(馬上)의 움직임을 중시하다 보니 자연 발놀림보다 권장에 강점을 가지게 되었다. 말이 발놀림을 대신하니 자연 땅에서의 움직임도 권장이 주라면 발놀림이 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내 발놀림을 따라 해보았자 지금까지 익혀온 무리(武理)를 역행하는 것이다. 아까 어리석은 송의 무관이 혼신의 일격을 이야기했지만 나라면 이렇게 대답해주겠다. 자신이 가장 강한 장소에서 적보다 강한 장점을 지니고 상대한다. 강함이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이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준경은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단정홍이란 자와 이탁은 삼절오은이란 범주에 함께 속해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 강함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까 호연작이 설명하고 있을 때도 이탁의 이름이 나오자 단정홍의 눈빛이 변한 것을 똑똑히 보았었다.

“이탁이라, 이탁.”

단정홍은 두어 번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 음성은 약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확신에 찬 것도 아니었다. 모호 그 자체였다.

“내가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자신이 가장 강한 장소에서 적보다 강한 장점을 지니고 상대한다면 당연히 이길 수 있다. 그런 것으로 따져보자면 이탁과 나는 승부를 가릴 수 없다.”

“어째서입니까?”

“그와 나의 장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소림승에게서 외가기공을 익혔다. 그의 몸은 무쇠와 같이 단단하고 그가 휘두르는 도는 어떤 것도 일격에 조각을 내버리지. 그러나 나는 손에 쥔 어떤 것도 정확하게 원하는 표적에 꽂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거리에 들어온 자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지만 나는 그보다 빠르다.”

한마디로 이탁이 근접하여 싸우는 무인이라면 단정홍은 거리를 두고 싸우는 형태였다. 지법과 보법에서 앞서는 단정홍은 이탁을 상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길 자신도 없었다. 이탁의 오감은 놀랍도록 정교하여 날아드는 화살도 손으로 잡아챌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급소를 노려도 이탁은 원거리에 날아드는 어떤 것도 방어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근접으로 붙어 이탁보다 더 나은 기량으로 난자(亂刺)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그런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준경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은 단정홍의 가벼운 일수도 보지 못했는데 이탁은 모두 받아낼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눈썰미가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눈썰미로 도를 휘두른다? 그의 사정거리 안에서는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무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묘족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어귀에서 망을 보는 묘족이 미리 신호하여 준경 일행이 돌아오는 것을 알렸기에 소동파 일행은 광장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본래 둘 있어야 할 일행에 단정홍이 추가되어 있자 처음에는 누군가 싶었는데 점차 소동파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소동파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왕야(王爺)께서 어인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준경도 깜짝 놀랄만한 발언이었다. 대리 관인이라고 스스로 밝히기는 했지만 오은이라는 명성이 그것을 잊게 하고 있었는데 소동파가 왕야라고 부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정홍은 소동파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지만 인사말은 정중했다.

“일 년 만에 뵙습니다. 혜주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록의 행방이 파선을 이곳까지 끌어들였군요.”

호연작의 설명을 듣고 알았다는 말에 소동파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대리에서도 욕심을 내고 계십니까?”

“본래 그것 때문에 해남도로 온 것이 아닙니다. 형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때 생각해볼 일입니다.”

“전남왕(?南王)께서는 무고하십니까?”

“모르고 계셨군요. 형님은 이곳에 계십니다.”

소동파도 그 이야기는 처음 들었는지 미간을 크게 치켰다. 광활한 해남도의 크기를 생각하면 모를 수도 있는 일이기는 했다. 해남도에 사는 부족이 얼마나 되는지 아직도 다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파선께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청평관(?平官) 고승태(高昇泰)가 중병에 걸려 더는 국정을 운영하지 못하자 갑자기 부처님의 가호가 깃들었는지 사후, 형님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지 뭡니까? 이미 유력 부족의 족장들과 대소신료들의 공증(公證)까지 이루어진 마당이라 이 몸이 직접 형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허, 그것참 잘된 일입니다. 참으로 감축합니다.”

대리국의 사정을 모르는 준경과 무승들은 그저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그것은 준경의 무사함을 확인한 이소와 자매도 마찬가지였다.

대리국은 중앙집권이라기보다는 유력 부족, 유력 귀족의 영향력이 강한 국가였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양의정(楊義政)이란 권신에게 힘이 집중되자 왕이 권신의 뜻대로 바뀌는 일이 벌어졌다. 세 명의 왕이 순식간에 불가로 출가하거나 목숨을 잃자 또 다른 권신인 고승태가 양의정을 제거하고 보정제(保定帝)를 내세워 안정을 이루는가 싶었다. 그러나 고승태 자신도 왕이 되고 싶었는지 자신이 올린 보정제를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것이 불과 일 년 전의 일이었다.

간신히 왕실을 되찾은 단씨 일족이 반발의 움직임을 보인 것은 당연하였다. 단씨 일족은 노왕(瀘王) 단정홍을 간신히 설득하여 고승태를 상대하려고 했으나, 그 준비도 허망하게 고승태가 집권한 지 겨우 일 년 만에 불치병에 걸려 버렸다. 고승태는 자신의 불치병이 욕심에서 나왔다고 믿고 다음 왕위는 단가에 돌려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게 왕위 후보에 오른 자가 보정제의 두 동생이었다. 전남왕 단정순이 둘째였고, 셋째가 노왕 단정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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