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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7화 (27/257)

00027  (4) 식해(食%26#37282;)  =========================================================================

“그럼 지금이라도 동관이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그분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분은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근래 여족(黎族)의 마을에 머무르고 있지요.”

호연작의 설명에 자매의 눈빛이 달라졌다. 여족이란 이름을 익히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호연작 역시 자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곳 출신의 묘족 여인인가 싶군요. 고향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데리고 온 것입니까?”

호연작은 보기보다 눈치가 빨랐다. 준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연작은 아무렇게나 자란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여족은 해남도 최남단 녹회두(鹿回頭)를 근거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곳까지의 거리는 대략 평탄한 길로 850리 정도입니다. 섬의 서쪽 해안가를 돌아 접근하는 방법이 850리에 해당하는 길이고 섬 중앙의 오지산을 넘어가는 빠른 길이 있지요. 대략 450리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곳의 해변은 배를 대기에 적합하지 않아 배를 타고 가고자 한다면 인근에서 따로 소선을 이용하여 가야 합니다. 그러나 묘족의 마을이 오지산 인근 백화봉(百花峰)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그곳을 들린다고 하면 오지산을 넘는 험한 길을 타야 합니다.”

“육로로 가겠습니다.”

준경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배를 끌고 녹회두를 먼저 들렀다 묘족의 마을로 갈 수 있겠지만, 해남도 남쪽은 배들이 고려와 송으로 가기 위한 항해로였다. 특이한 대식국의 배이니 혹시 정체를 들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다행히 오지산 어귀까지는 말을 타고 갈 수 있어서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동관이 지휘사로 부임하기 전에 저 역시 포구에 자리하고 있어야 하니 서둘러 떠나도록 하지요.”

호연작이 부하들을 시켜 말을 끌고 오게 시켰다. 오랜만에 말에 앉은 준경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말이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엉덩이가 들뜨기 시작하며 말의 맥박이 엉덩이로 전해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말을 타는 법을 두고 매우 어렵사리 적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치 몸의 일부분인 것처럼 말과 철썩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요나라로 향하는 길에서 느끼지 못한 무척이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준경은 본격적으로 말 타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달리는 도중에 호연작을 바라보았다. 호연작은 두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앞장서고 있었는데 그의 허리춤에는 흑봉(黑棒)이 매달려 있었다. 매끈하게 생긴 흑봉은 대략 팔길이보다 조금 길었는데 손잡이를 구분하듯 은색으로 둥글게 금속이 둘러 있었다. 장수가 검이나 창을 쓰지 않고 장봉도 아닌 곤봉 형태의 무기를 쓰는 것을 처음 보는지라 유심히 쳐다보았다. 물론 노준의가 장봉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있었지만, 노준의는 장수라기보다는 증포를 호위하기 위한 무사에 가까웠다.

그런 준경의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쉬는 틈을 타서 호연작이 자신의 허리춤을 끌러 흑봉을 매만졌다.

“빛깔이 아름답지 않은가?”

하루를 달리면서 서로의 나이 정도는 알게 된 터라 호연작은 준경을 동생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는 준경이 왕진과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이야기를 궁금하게 듣기를 원하는 통에 그때의 일을 구구절절 늘어놓은 다음부터였다. 외직을 전전하고 있는 호연작도 동경금군교두 왕진의 이름은 익히 들어보았었고, 그 실력을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답습니다. 제가 아는 누군가는 묵죽봉을 수족처럼 사용했는데 형님 역시 그러한 것을 보니 송의 무인들이 봉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봉을 좋아한다? 그렇긴 하지. 고려가 활을 숭상하는 것처럼 말일세.”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중국은 대대로 전투에서 창을 주 무기로 써왔고 창술 교범이 이미 오래전부터 완성되었었다. 봉도 창술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는 병기가 아니었기에 처음 무기를 잡는 이들은 봉을 잡고 수련하곤 했다.

“하지만, 내 것은 조금 다르네.”

호연작이 흑봉의 손잡이 부분의 경계를 나타내는 은색의 금속 부분을 양손으로 힘껏 돌렸다. 그러자 딸각 소리와 함께 손잡이 부분과 봉 부분이 분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봉 부분과 손잡이 부분이 먹색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손잡이 안쪽으로 공간이 있어 평소에는 끈이 안에 담겨 있는 구조였다.

호연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간을 확보한 후 힘껏 휘두르기 시작했다. 마치 채찍처럼 영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봉두(棒頭)가 땅바닥을 후려치자 제법 깊게 팼다. 지켜보던 이들은 하나같이 탄성을 질렀다.

주먹만 한 두께의 나무를 휘감은 후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감긴 나무의 허리가 뚝 하고 부러졌다. 이후 팔목을 슬쩍 당겨 봉두를 잡고 끈을 손잡이 안쪽으로 밀어 넣은 후 봉을 다시 결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흑봉은 매끈한 자태를 자랑했다.

“채찍과 도리깨를 합친 느낌이군요.”

채찍의 쾌속함에 도리깨의 묵중함이 함께 실려 있는 듯한 기병(奇兵)이었다. 이런 무기를 쓰는 자를 본 적이 없는지라 준경은 순수하게 탄복했다. 호연작은 다들 경탄의 눈빛으로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앉았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기마에 능했네. 그래서 대부분은 창술을 익혔지. 그러나 창술로는 일대 다수를 상대하는 데 조금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고안한 것이 도리깨와 같은 힘을 낼 수 있으면서 사정거리가 긴 채찍 형태였다네.”

준경이 생각하기에도 말을 타고 돌진하면서 도리깨와 같은 채찍을 휘두르면 감히 가까이 근접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직은 실력이 부족하여 쌍편(雙鞭)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쌍편을 능숙하게 다룰 날이 올 것이네. 그때는 선조의 명성을 뛰어넘을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네.”

하나만 다루어도 무시무시한 병기를 양손으로 다룬다? 준경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저것을 상대하면 어찌해야 할까?

‘결국, 패술 밖에 없다.’

방패로 후려치는 공격을 막아내고 근접하여 끝장을 내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적수공권으로 움직이는 것은 채찍의 민첩함과 사정거리를 보았을 때 같은 무위라면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그렇게 오지산 기슭에 다다르자 작은 병영이 있었다. 거기까지가 현재까지 지정된 송의 관할 구역이라고 했다. 오지산을 넘어 남쪽은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족이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지고 숫자도 많은 것이 묘족과 여족이었다. 여족이 남부 해안가를 장악하고 있다면 묘족은 오지산 남부 삼림 지대를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한참을 올라 모두가 지칠 때쯤 자매는 무엇을 보았는지 소리를 높여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무성한 산림 어딘가에서 호응하는 휘파람이 들렸다.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그것이 묘족끼리의 통신 수단임을 알 수 있었다.

이소는 잔뜩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헤어지리라는 것은 직감했지만, 막상 현실로 닥쳐오자 자매와 헤어지기 싫었던 것이다. 벌써 눈가는 울먹이고 있었다.

자매가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일행은 자매를 따라 움직였다. 휘파람 소리가 가까워져 올수록 자매의 얼굴이 환해졌다.

준경은 그런 자매를 자신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자매에게 알 수 없는 인연을 느껴 그녀를 얻었지만, 그녀를 애욕의 대상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고의화는 혹시 고자가 아니냐며 기루에 데려가 주겠다는 말도 했지만, 준경은 수련을 핑계로 거부했었다. 왜일까? 어쩌면 처음 만났던 그날, 그녀가 선죽교에서 추었던 춤과 노래를 기억했는지도 몰랐다. 나비의 여신이 있다면 그녀를 지칭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풀거리며 붉은 입술을 여는 그녀의 모습은 성스러웠다.

겨울임에도 해남도의 날씨는 푸근하기만 했고 수풀은 무성하기만 했다. 길도 없는 수풀을 헤치며 휘파람 소리에 의지하여 한참을 나가자 탁 트인 공터가 나왔다.

준경이 공터로 진입하자 본 것은 수많은 묘족이 모여 환갑 정도로 보이는 한인 문사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일행이 속속 공터로 진입하자 잠시 이야기가 끊어지고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는데 호연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인 문사에게 다가가 깊은 예를 올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삼 인의 금군 위사도 함께 넙죽 예를 올렸다.

“여족의 마을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묘족의 마을에 머무르고 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별래무양하셨습니까?”

호연작이 예를 올리는 대상은 조금은 날카롭게 생긴 인상이었다. 죽봉을 지팡이로 삼아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생김새와는 다르게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일행을 맞이했다.

“호연 별장이 이런 외지까지 웬일인가? 이곳은 어지간해서는 아는 사람이 드문 곳인데. 더구나 동경의 금군 위사라니?”

묘족과 고려 무관, 고려 소녀, 고려 무승, 금군 위사, 해남도 별장, 대식국 우마르와 그 일행은 평생 보기 드문 조합이었기에 환갑의 한인 문사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천재라고 불리는 그도 이 상황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호연작은 예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멀뚱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나머지 일행들에게 말했다.

“이분이 바로 동파거사(東坡居士)입니다.”

“소동파(蘇東坡)!”

무식한 무승 중에서도 그 이름을 아는 자가 있는지 대경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준경은 어디서 그런 이름을 들어보았는지 고개를 갸웃하자 이소가 준경의 허리춤을 잡아끌며 귓가에 속삭였다.

“송나라 최고의 문인(文人)이세요.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화(畵), 악(樂)에 이르기까지 고금에 드문 천재라고 불리는 분이지요.”

“그 정도로 대단한가? 그런데 왜 이곳으로 유배온 거지?”

나직하게 이야기했어야 할 말을 준경은 저도 모르게 거침없이 일반 육성으로 내뱉었다. 포구에서 채경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이야기도 나누었지만, 준경은 미처 그 사실을 떠올리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그런 준경의 행동에 호연작의 눈이 크게 흔들렸지만, 다행히 소동파는 허허 웃으며 넘겼다.

“나는 구법당 사람일세. 지금은 신법당이 득세하고 있으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네.”

그제야 준경은 증포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고 호연작이 말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파벌이 서로 극과 극이었기에 권력 쟁투의 특성상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구법당도 신법당도 아니네. 오직 동파거사(東坡居士)만이 존재할 뿐이지. 왜 그때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도 물고 뜯고 싸웠는지 알 수가 없을 따름이네. 반산(半山, 왕안석) 선생과 우수(迂?, 사마광) 선생 모두 뛰어난 인재였거늘 헛된 정쟁에 휘말려 그 재능을 다 피우지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또 안타까울 따름이네.”

신법당의 당수 왕안석과 구법당의 당수 사마광은 서로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사사건건 대립했다. 자신들의 능력에 대한 과한 믿음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정치란 설득이 되어야지 일방적인 믿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사례이기도 했다.

“지금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은 신법당의 힘이 작용한 결과지만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과거에 대한 속죄일세. 차분히 시간을 두고 필생의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지.”

소동파의 본명은 소식(蘇軾)이었다. 김부식의 아버지가 소동파 형제의 문명(文名)을 존경하여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소동파 형제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은 고려에서도 무척이나 유명한 일화였다.

“이제 내 이야기를 했으니 자네들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겠나? 과야 차를 준비해주지 않으련?”

묘족 사이에서 서른 정도로 보이는 자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소과’로 소동파의 셋째 아들이었다. 소동파가 유배를 떠나게 되자 수발을 들기 위해 따라나섰던 것이다.

소과가 묘족 사람들과 함께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이 일부 묘족이 자매에게 다가왔다. 자매의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서로가 껴안으며 회포를 풀었다.

친인척일 것으로 생각하니 이소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찍었다. 비록 자신과 잘 지내왔다고는 하지만 고향에 돌아온 기쁨과 비교할 수 있을까?

소동파는 궁금한 듯싶었지만 그들의 해후를 방해하지 않았다. 다른 일행들도 눈치 없이 나설 만한 자들은 없었기에 잠자코 그들이 기쁨의 오열을 멈출 때를 기다렸다. 차가 마련되어 나올 때쯤에야 자매는 눈물을 닦으며 이소에게 귓속말했다. 이소는 다 듣고 나자 준경에게 말했다.

“부모님과 남동생이래요. 은인이라고 오늘 밤에 꼭 감사의 대접을 하고 싶다고 따로 시간을 내어달라고 하네요.”

“좋은 일을 했으면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지. 영문은 모르겠으나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젊은 장수가 참으로 좋은 일을 했구먼.”

이 시기 노예를 사고파는 행위는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소동파는 준경이 그런 노예를 우연한 기회에 구해준 것으로 짐작했다. 소동파가 먼저 권하니 준경 역시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볼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대접을 받고 깨끗하게 잊어버릴 생각이었다.

자매가 부모, 남동생과 더 회포를 풀기 위해 자리를 뜬 사이 일행 앞에는 향긋한 차가 놓였다.

한 잔씩을 머금고 나자 누가 먼저 이야기할 것인지를 두고 잠시 눈치를 보다가 금군 위사가 나섰다. 우마르의 사정과 벽란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제야 소동파는 일행의 구성이 이해가 가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참으로 기사(奇事)로구나. 대식국이 그리도 허망하게 망하고 그 영향이 이곳까지 전해질 줄이야. 대식국에서 뛰어난 수학자이자 문인이었다면 머무는 동안 나와 교류할 일이 많아지겠군.”

“이곳까지 자객들이 올 일은 없다고 생각하나 혹시나 자객들이 온다면 선생님마저 위험할 수 있습니다.”

호연작과 금군 위사들은 송의 자랑인 소동파가 혹시나 해를 입을까 싶어 극구 만류했다. 자객이 올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만일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소동파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묘족과 여족을 교화하고자 나름 애를 쓴 덕분에 두 부족이 이번에 동파서원(東坡書院)이란 것을 지어 나를 머무르게 해주겠다고 하더군. 내가 이곳을 떠난 다음에도 서원이 하나쯤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 수락했다네. 묘족과 여족의 경계 지점에 자리하고 있어 지금 이곳보다 더 남쪽이라네. 외지인이 묘족과 여족을 뚫고 서원까지 올 일은 거의 없다고 장담할 수 있지.”

그렇다면 그야말로 은신처로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서 만날 일이 없는 대식국인을 만난 것이 참으로 다행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필생의 대업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대식국에 혹시 민국의 사료가 남아 있는지 궁금하구나.”

“민국? 당 이전의 그 민국 말입니까?”

호연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준경 역시 뜻밖에 나온 민국의 이야기에 눈을 반짝였다. 소동파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30년 전 우수 선생은 영종(英宗)의 조칙(詔勅)으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완성을 명받았지. 자치통감은 전국시대의 시작부터 송이 건국되기 직전인 1362년간의 역사를 적는 방대한 저술이었다. 그러나 우수 선생의 주관적인 식견이 적지 않게 개입되어 있어야 할 사료가 빠지고, 왜곡되기도 했다. 노년에 이르러 문제점을 인식한 우수 선생은 부족한 내용을 다시 보충하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 신법당이 몰락하여 다시 폐하의 부름을 받음으로써 보완 작업은 중단되었다. 내가 왜 일부러 해남도까지 귀양을 자청했는지 아느냐?”

“저희가 어찌 선생님의 깊은 뜻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호연작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자치통감이 저술된 지 30년이나 되었지만, 아직 고려에는 전해지지 않았었다. 후일 김부식이 준경과 함께 송을 방문하였을 때, 예물로 자치통감 완본을 받게 되는데 그것을 읽고 너무나 감동한 김부식이 국내사를 써보고자 마음먹게 되고 결국 삼국사기라는 필생의 업적을 남기게 된다.

지금으로서는 고려에서 극히 일부만 자치통감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이곳에 모인 고려인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우수 선생이 사망하기 전에 나를 따로 불러 자치통감의 수정을 거들어 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때는 관직에서 물러나 자유롭게 시서화를 논하고 싶던 때라 제안이 탐탁지 않았으나 옛 은혜가 있어 돕겠다고 약속했다. 자치통감의 원전을 살펴보니 옛 민국의 개혁 정책을 들고 나온 반산 선생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민국의 사료가 매우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의문이 생겼다. 도성의 서고에서도 구하지 못할 사료로 정책을 입안한 반산 선생은 대체 어디서 그런 사료를 구했던 것일까?”

아는 것이 없으니 감히 질문을 던질 만한 자가 없었다. 소동파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한풀이에 가까운 혼잣말이었다.

“나는 반산 선생의 출생지가 복주(福州)인 것에 주목했다.”

복주는 대만과 마주 보는 중국 남단이었다. 춘추전국시대 당시 월나라가 초나라에 의해 망했을 때, 월나라 사람들이 대거 복주로 남하하여 이민족 중 하나인 민월(?越)이 되었다. 이른바 산월이라고 불리는 무리 중 하나이다.

“반산 선생은 정권을 잡자 강남 출신 인사들을 대거 발탁하여 신법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왜 하필 강남 출신 인사들일까? 동향 사람들이라서? 내가 아는 반산 선생은 정에 치우쳐 관직을 제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법을 강조하는 강직한 성품이었지. 엄격한 법집행을 반대했던 나 같은 사람들에게 반감의 대상이었지만 말이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민국의 국시(國是)였던 율가의 부활을 부르짖고 있었지. 율가의 시초가 강남에서 시작한 것을 생각하면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러나 명맥이 근근하여 그 이론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는 판에 어찌 그들이 율가의 강령을 들고 나올 수 있었을까? 민국의 사고(史庫) 네 곳 중 세 곳은 불에 탔다고 기록에 남아 있지만 한 곳은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지. 만약 그것이 남아 있다면?”

거대한 이야기였지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이야기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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