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3) 거경신(居敬信) =========================================================================
준경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 뒤를 열 명이 무승이 바짝 뒤쫓았다. 수백 명의 승려가 에워싸고 있었지만, 무승이 험상궂은 인상으로 부라리자 주춤하며 물러나고 말았다. 준경은 중년 승려와 길잡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지나간 과정을 놓고 시시비비를 가려봐야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을 나와 몸소 겪었기 때문이다. 이철이 죽은 이상 이자겸은 어떤 식으로든 이번 일을 무마시킬 것이고 자신 같은 미약한 자는 곧 잊히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철이 죽은 것은 이자겸에게만 좋은 일이 아니라 새로 보위에 오른 숙종에게도 인주 이씨가 또 한 번 몰락하는 나쁘지 않은 결과이니 고의화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이자겸과는 별도로 손을 써주리라고 믿었다.
“아직 건드려보지 못한 삼삼한 여악이 있었는데.”
흥왕사를 빠져나와 산길로 접어들자 가장 먼저 준경의 곁에 서기로 했던 텁석부리 무승이 푸념 섞인 농을 던졌다. 준경은 그가 진짜로 여악의 미색에 홀려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어색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준경이라는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 뜻이리라.
“본래 모습도 아니고, 분대(粉黛:백분과 눈썹먹)로 얼굴을 그린 여악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소.”
여악의 화장을 분대 화장이라고 칭할 정도로 천편일률적인 화장이 권고되었다. 그것은 여염집 규수들과 차별화하려고 일부러 누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는데 화장법을 통해서 신분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대장은 여악과는 한 번도 놀아보지 않은 모양이구먼. 여악과의 잠자리보다 여악과 술 한 잔 걸치고 나누는 입담이 더 재미있소.”
알고 보니 넉살이 꽤 좋은 무승이었다. 준경의 볼이 실룩하자 텁석부리 무승은 나머지 아홉 명에게도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했다.
“이제부터 장사가 우리의 대장 아니오? 나는 지금껏 살면서 장사 같은 어린 나이의 실력자를 본 적이 없소. 더구나 이철을 상대로 보여준 술수는 나 같이 간담이 작은 자는 시도할 수 없는 방법이오. 우리는 기껏해야 심산유곡으로 숨을 생각했지만, 아예 고려를 떠나있겠다는 배포라니 참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소.”
준경은 그들을 개경이 아니라 벽란도로 향하는 산길에 은신시켜놓고 집에 다녀올 작정이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위계를 잡기로 했다. 계획을 미리 말하지 않는 것은 공해(公海)로 나간 다음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여럿이 모이기 편한 공터가 나타나자 준경은 그곳에 열 명을 모두 모아놓고 입을 열었다.
“나는 준경이라 한다. 지금은 추밀원 별가를 지내고 있지.”
대부분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들이었다. 이철을 죽일 이유가 있으려면 원한 관계거나 최소한 관부의 실력자가 뒤를 봐주지 않고서는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처럼 누군가 대놓고 뒤를 봐준다는 티가 역력한 사건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문종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흥왕사의 건물에 방화한다는 것이 어디 평범한 간담인가?
“내가 굳이 이철이 죽어야 할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너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너희 역시 이철의 수족으로 온갖 패악을 저지른 것을 생각하면 목을 베어야 마땅하나 속죄할 기회를 주고자 한다.”
준경은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오글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 역시 선한 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다. 그저 살다 보니 숙종과 고의화를 먼저 만나게 되었고,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전부였다. 준경이 바라는 것은 대의와 같이 고매한 이상이 아니었다.
“남의 것을 탐하지 않겠다. 누군가 내 것을 탐하여 건드린다면 반드시 응징하겠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이번 해남도 여정은 너희가 생각하는 도주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부하가 필요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선심 쓰듯 빌려주는 그런 부하가 아니라 충심으로 내 것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한다. 나를 죽이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칼을 뽑아 나에게 덤벼라. 만약 나에게 칼을 들지 않겠다면 지금까지의 케케묵은 과거는 잊어라.”
준경의 안색은 상기되어 있었다. 평소 이렇게 열정적으로 말을 해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지다 보니 이런 말도 나오는 것 같았다.
열 명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들을 대신해 텁석부리 무승이 말했다.
“해남도로 가는 것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가는 길입니까?”
“아직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 가는 것이다.”
“별가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관부에서도 쉬쉬하는 일이라는 것인데 그만큼 위험하겠군요.”
“그래서 너희를 강하게 만들 참이다. 나는 이번에 매우 실망했다. 이철이 거느린 무승들이 강하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지만, 막상 겨뤄본 너희는 술과 여색에 찌들어 죽기만을 기다리는 돼지에 지나지 않았다. 너희는 그중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최소한 가진 것을 챙기기 위해 고민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내가 너희를 선택한 이유다. 진정으로 강해질 생각은 없는가?”
“참으로 그 패기가 대단하구려. 사실 이철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 그리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소. 승려가 아닌 나찰(羅刹)이 되어 좀스러운 칼이나 휘둘렀는데 이제 별가의 말을 들으니 눈이 번쩍 뜨입니다. 먹삼이 대장에게 충성을 약속합니다.”
텁석부리 장한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충성을 맹세하자 연이어 다른 자들도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오일, 승개, 창삼, 창오, 망우, 상일, 남수, 함보에 이르기까지 소개를 마쳤지만, 오직 한 명만이 무릎을 꿇지도 않고 충성을 약속하지도 않았다.
먹삼이 그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승려는 양욱이라 합니다. 저희가 중의 탈을 쓴 파락호라면 양욱은 진짜 승려입니다. 일간의 사정은 모르겠으나 그는 우리 중 가장 강한 자입니다. 다만, 평소에는 손을 잘 쓰지 않지요.”
준경이 양욱이란 자를 찬찬히 살피니 왜 이제야 이런 자를 발견했나 싶었다. 여진 노예들이 잘 버티다가 일시에 참살되기 시작했는데 그가 손을 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른 정도의 나이로 보였는데 유달리 체구가 큰 무승 틈새에서도 머리 하나는 더 튀어나올 정도로 큰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와 실력을 겨루어 결정하겠다는 뜻인가?”
준경이 앞으로 나서자 양욱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꽉 다문 것을 보니 평상시에도 말이 없는 성품인 것 같았다.
더는 미사여구의 수사가 필요 없었다. 준경은 주먹을 단단히 말아쥐고 양욱을 향해 달려들었다. 양욱 역시 지니고 있던 도를 바닥에 던져 놓고 적수공권으로 마주쳤다.
서로의 주먹이 상대의 안면을 노리며 날아들자 준경은 재빠른 반사신경으로 가까스로 주먹을 피해냈다. 팔 간격에서 차이가 나니 자신이 먼저 맞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번개처럼 무릎으로 양욱의 복부를 노렸지만, 양손으로 준경의 무릎을 막은 양욱은 앞발차기로 오히려 준경의 무릎을 찼다. 준경의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자 그는 양손을 모아 마치 장풍처럼 준경의 배에 밀착시키려 했다.
준경은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넘어지는 방향 그대로 한 바퀴를 굴렀다.
양욱의 장(掌)이 흙에 닿기도 전에 바닥이 마치 강한 바람을 맞은 것처럼 퍽하고 파이는 기사(奇事)를 보게 되었다. 일반인이 지금 그 광경을 보았다면 장이 땅을 긁으며 파인 것은 아닐까 생각했겠지만, 준경은 누운 상태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준경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양욱에게 말했다.
“내공을 익혔는가?”
양욱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인정한다는 뜻이리라.
왕진은 내공을 공부한 자들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열을 내며 성토했지만, 그중에 고수라 불리는 자들이 가끔 나온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리고 지금 준경의 앞에 그런 내공을 사용하는 자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준경의 피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준경이 왕진에게 들은 바로는 보통은 장심으로 내공을 방출한다고 했으나 수반되는 제약 조건이 까다롭다고 했다. 천하 명검을 들고 있더라도 상대를 맞추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고 할까? 힘을 싣기 위해서는 하체의 지지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렇다는 것은 하체가 제대로 힘을 전달할 수 없도록 흐트러트리면 되는 일이었다.
수벽타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긴 심호흡을 하며 힘을 끌어모았다. 이때 양욱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준경이 아까와는 달라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심호흡을 마친 준경의 양팔과 양다리가 쉬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공을 사용하는 자들은 발경(發勁)이라는 말을 쓰더군. 제대로 된 진각을 쓰면 체중이 증가하게 되고 앞으로 나가면서 딛는 진각의 영향으로 속도 또한 붙게 되지. 이때 대지를 박차면서 생기는 반탄력도 함께 합세하게 된다. 그때 가해지는 힘은 평소 정권을 지르는 힘과 비교할 바가 아니게 된다. 그런 힘에 장자의 양생술을 얹는 것이다. 문제는 공격이 단조로워 빠른 몸놀림을 가진 자를 이기지 못한다.
삽시간에 양욱의 전신에 준경의 공격이 먹혀들어가기 시작했다. 키가 큰 양욱으로서는 길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채찍질처럼 팔을 휘두르며 상대를 압박해야 했는데 근접 박투에 속도전으로 바뀌자 한 번 허용한 공격이 그대로 연타로 터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였다. 나중에는 몸을 웅크리며 준경의 공격을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등을 팔꿈치로 찍어 내리자 미약한 신음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발경 같은 침투경은 당하면 무섭긴 하지만 무기를 든 자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벽에 붙은 상대도 공격할 수 있다고 자랑하지만, 실질적으로 적이 벽에 붙어 있을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처음에는 준경의 열세를 보여 실망감에 빠져 있던 무승들은 준경이 진지한 태도로 덤벼들자 양욱이 순식간에 패하는 것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양욱의 실력을 잘 아는 자들은 특히나 놀라움이 컸다. 보통 양욱의 무서움을 아는 자들은 그와 근접하여 겨루기를 사양했다. 잘못해서 한 번이라도 발경을 허용한다면 물어볼 것도 없는 패배였기 때문이다.
“나는 집에 다녀오겠다. 너희는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라.”
도망을 치는 사람이 있을까?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다. 믿을 수 없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도망쳐주는 것이 준경에게는 훨씬 고마운 선택이었다.
“저희는 꼼짝하지 않고 이곳에 머물고 있겠습니다. 안심하고 다녀오십시오.”
먹삼은 혹여 준경이 걱정하지 않을까 싶어 우려를 덜 만한 말을 던졌지만, 준경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산을 내려갔다. 우연일까? 준경이 하산하는 길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준경의 머리 위로 해가 솟구치자 먹삼은 이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처럼 여겨졌다.
집으로 돌아온 준경에게 고의화가 가장 먼저 설명을 요구했다. 밤새 한숨도 자지 않았는지 다들 뜬눈으로 지새우고 있는 것을 보니 준경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네가 이철을 죽였다고!”
모인 자리에서 간략하게 어젯밤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고의화는 이철을 죽이고 열 명의 무승을 부하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크게 경악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흥왕사 일부가 불에 탔다는 것에 더 경악했을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죽을만한 놈이니 아쉽지는 않다만 참으로 엄청난 일을 저질렀구나.”
고의화 역시 천상 무장이라 깊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저 짐작만으로도 뒤이어 찾아올 후폭풍이 클 것임을 우려하고 있었다. 다른 의미에서 이소는 준경을 다시 보고 있었다.
이자겸과 준경 사이에서 오고 간 제안이 이소의 어린 마음을 흔들었던 것이다. 사람이 여럿 죽어 안타까운 심정보다 자신의 사정을 헤아려 준경이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도 고민의 여지가 없이 불과 하룻밤 사이에 해낸 것이다.
준경은 이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흐트러트리며 말했다.
“내 노비가 된 이상 넌 내 것이다. 주인이 해야 할 일이었지. 그러니 그리 감동 받은 표정 지을 필요 없다.”
“뭐예요!”
이소가 앙칼진 소리를 내뱉었지만, 준경은 오히려 그것이 마음이 편했다. 처음 보았을 때 마음의 문이 닫힌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조금씩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성취감을 준다고 할까? 준경의 마음을 훈훈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집이라 준경은 고의화에게 일임하였다. 고의화는 귀찮은 일이라며 당장 팔아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그것도 상관없다고 했다. 언제 고려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의화는 무승들을 만나 기합을 넣겠다며 따라나섰다. 벽란도에서 배웅까지 할 참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모른 척 함께 무승들이 있던 산으로 향했다.
이자겸에게 따로 들르지 않은 것은 이자겸을 굳이 만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일은 길잡이와 중년 승려가 알아서 잘 이야기할 것이다. 중년 승려에게 준경은 죽일 놈이 되어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감히 해남도까지 찾아와 해코지할 간담은 없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가면 다 묻힐 일이었다.
무승이 머무르고 있는 산중에 접어들자 자매와 이소를 보고 습관적으로 휘파람을 불던 무승 창오는 고의화의 무지막지한 주먹 한 방에 기절하고 말았다. 나름대로 험상궂은 인상들 속에서 고의화는 가장 험악한 인상이었기에 기선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었다.
창오가 쓰러지자 창삼이 기겁하며 창오의 몸을 붙잡았다. 그들은 무승 중 유일하게 형제였는데 이름에서 알려주듯 워낙 형제가 많아 일부러 절로 보내진 경우라고 했다. 당시 평민의 이름 중에 유난히 숫자를 쓴 이름이 많았는데 열 명의 무승 중 숫자 이름을 가진 자만 다섯 명으로 절반을 차지했다.
“딱 하나만 이야기하겠다.”
열 명이 다 남았다는 것은 준경으로서도 고무적인 결과였다. 아마도 양욱을 일방적으로 패퇴시킨 것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준경은 앞날을 위해 미리 경고를 해두기로 했다.
“나는 내 것을 탐하는 자를 싫어한다. 너희가 내 것 외에 다른 이들을 어찌 대할지 과하지만 않다면 나는 모른척하겠지만, 만약 내 것을 건드린다면 나는 기필코 너희를 곱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내 것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너희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은 단순하면서도 매우 강한 각인이기도 했다. 먹삼이 호응하자 이내 다른 무승도 약속했다.
함상 궂은 무승들이 여럿이니 이소는 두려운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더 확실한 약속을 받고 싶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무승들을 향해 말했다.
“거경신(居敬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내라면 모름지기 그와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경신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무승은 서로 고개를 갸웃하였다. 준경에게 맞은 것이 부기가 채 빠지지 않아 얼굴이 퉁퉁 부은 양욱이 그들 틈 사이에서 말했다.
“옛날 범식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자가 거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약속을 한 번 하면 절대 어기지 않아 거경신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하지요. 아가씨는 안심하십시오. 약속이 아니더라도 인주 이씨의 아가씨를 건드릴 정도로 간담이 큰 자는 이 무리에 없습니다.”
다른 무승들이 매우 놀랐다. 이소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에 그저 준경의 시녀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인주 이씨의 여아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소가 양욱을 새삼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양욱이 합장을 하며 말했다.
“기억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 년 전에 잠시 이자위 대감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었습니다.”
오 년 전이면 이소의 나이가 네 살이었던 시기다.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인주 이씨는 승려를 후대했기에 승려 사이에서는 그 평이 오히려 좋은 편에 속했다. 아무리 현실의 세도가라도 내세가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거경신이고 뭐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희가 딴마음을 먹을 턱이 있겠습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먹삼이 너스레를 떨자 그것으로 이소와 자매에 대한 걱정은 일단락되었다. 그들과 함께 벽락도에 도착하여 우마르가 타고 온 배를 보는 순간 무승들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대식국 상인과 함께 해남도로 가는 것입니까?”
벽란도가 국제항이기는 했지만 대식국인을 처음 보는 사람도 많았다. 배의 크기에 놀라고 대식국인의 생김새에 신기해하다가 금군 위사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다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의 반응에 이소와 자매가 재미있다는 듯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