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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4화 (24/257)

00024  (3) 거경신(居敬信)  =========================================================================

‘먹혔다.’

제대로 겨루었다면 최소한 다섯 합 정도는 겨루어야 승부를 낼 수 있는 상대들을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눕혔다. 오래도록 수벽타를 연성한 준경으로서는 무기와 몸이 일체가 되는 경지는 아직 느껴보지 못했기에 순수하게 몸을 움직일 때 가장 최적의 실력을 발휘한다고 할 수 있었다.

‘입신중정(立身中正)이 보인다.’

처음 수벽타에 입문할 때부터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가 입신중정을 이루어야 고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입신중정이란 그 말 자체는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몸을 바르게 세우고 상대방이 몸을 바르게 하지 못하게 균형을 흔드는 것이 무예의 기초이자 끝이라고 준경이 만난 고수들은 하나같이 조언했다.

고영창은 말했었다.

-중원의 무림은 기(氣)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신봉한다. 기와 술(術)이 만나 무예를 이룬다고 생각하지. 그런 방식으로 고수가 출현하기도 했으니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현상을 더 명확하게 알기를 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강해지는 방법이었으니까.

왕진이 말했다.

-심산유곡에 은거하는 도인 중 일부는 내공을 익히는 자들이 있다. 나는 그중 몇 명을 우연한 기회에 만나 대련까지 해보았지만 나를 이기는 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들의 변명은 내공이라는 것을 쌓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수련해야만 그 효과를 볼 수 있기에 자신들이 진 것은 수련이 부족해서일 뿐이지 수련의 방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보았을 때는 모두 개소리였다.

왕진이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준경은 피식 웃음이 나왔었다. 왕진은 도사들과 만났던 순간이 끔찍했던지 치를 떨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정종(正宗)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근력을 이용한 외공은 늙어서는 효과를 보지 못하기에 그때 가면 지금의 승패가 달라지리라고 했지. 나라에서 인정한 도관이 아니었다면 불과 이 초식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중년 도사의 면상을 쳐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공이란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면 요나라 도성으로 달려가 황제의 수급쯤은 쉽게 따낼 수 있는 늙은이들이 수두룩해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내가 만난 현실은 뜬구름만 잡으며 닭 잡는 일조차 아랫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비리한 늙은 도사들뿐이었다.

결국, 그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은 무예를 배우는 방향이었다.

-그들이 내공을 쌓는다며 가부좌를 튼다면 나는 항상 피로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고, 정신적으로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고 했다. 무예라는 것은 사실 별것이 아니다. 나는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고 상대방의 일관된 자세가 무너진 순간 승패는 갈리는 것이다. 신체를 알고 신체를 최적의 상태로 정렬할 수 있도록 운동한다. 그러면서 주위의 공간을 시각이 아닌 오감으로 의식하는 훈련을 병행한다. 시각이 발달하면 나머지 사감이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괜히 나무 밑에서 수련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다. 덥고 춥고의 기온 변화, 그에 따른 신체의 수축과 이완을 느끼기 위한 공부다.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곤충의 소리를 느끼고 바람의 소리를 느끼며 그곳의 공기, 그 느낌을 체득하게 된다. 호흡법이 내가 수련한 신체 발달 정도를 완전하게 이끌어내려는 방법이라면 오감을 통해 영역의 흐름을 인지하는 것은 상대의 강함과 약함, 또는 내가 알지 못했던 변수를 느끼기 위해서다.

왕진은 바른 자세, 또는 무예의 원천으로 척추기립(脊椎起立)을 들었다. 두 발로 걷는 동물은 척추를 곧게 세워 머리에서 발끝까지 이상적인 자세를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다고 했다. 이상적인 자세에서 근육이 단련되면 어느 하나 버려지는 신체 자원 없이 최상의 운동 효율을 자랑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무리한 체력 훈련, 또는 올바른 단련이 없이 가부좌를 통한 내공의 수련법이라는 것은 그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비정상적인 체형이 한번 만들어지면 몸은 너도 모르는 습관이 생긴다. 그 체형을 기억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지. 비정상적인 수련법을 통해 뼈가 틀어지고, 근육이 망가진다.

왕진이나 고영창 같은 이들이 무예를 익힌 것은 그것을 이용해 사람을 더 쉽게 더 많이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왕진은 심산유곡에 숨어 살며 내공이라는 뜬구름을 잡기 위해 수련하는 자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젊은 시절 정석적인 육체 단련을 한 사람에게 당해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숨어 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비위를 건드려 개죽음이라도 당한다면 수십 년 쌓아온 적공(積功)이 물거품이 되고 마니까,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과문(寡聞)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노승 중에서도 자신의 수련이 완성되었다고 하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왜인지 알겠느냐? 내가 보았을 때는 모두 변명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강해진다면 내공을 키운 늙은이와 외공을 기른 젊은이가 겨룬다고 해서 흉이 아니다. 존장에 대한 예의니 격식이니 따지며 아랫것들끼리 겨루어보라고 하고는 그들이 박살이 나면 그들은 허허 웃으며 본시 자신들의 수련법은 도가 깊어질수록 강해진다고 말한다. 그 도를 노승에게 보여달라고 말하면 다시 예의와 격식을 따진다. 화산에서 그런 노승 하나를 만났는데 성질을 주체하지 못해 그의 면상을 딱 한 대 쳤다. 그는 그대로 죽었다.

가장 처음으로 준경에게 수벽타를 전수해줬던 고의화도 균형과 바르고 독한 수련이 정직하게 강해지는 방법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었다. 준경은 그것을 믿고 지금껏 수련을 해왔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준경의 눈에 적과 자신의 신체중심선(身體中心線)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철을 잡았다는 것보다 그것이 준경을 미소 짓게 하였다.

준경은 이철의 가슴에 놓인 발에 힘을 주었다.

기절한 상태임에도 이철의 입이 벌어지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원래는 죽이려고 했지만, 이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무승들이 충동적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드는 것은 사양이었다. 순간적으로 생각하여 손에 사정을 둔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지금 네놈이 하는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아느냐?”

동원의 화재는 거의 진압되고 있었다. 승려들이 하나둘 준경과 무승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그들 중에는 준경을 안내한 길잡이가 동조한 중년 승려와 함께 준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백 명의 관심이 지금 준경의 한몸에 쏠려 있는 것이다.

준경은 짜릿한 기분을 받았다. 모든 이유를 막론하고 지금 이 상황을 주재하는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준경은 자신을 향해 소리친 무승을 보았다. 무승 중 가장 덩치도 좋고 기도도 뛰어난 자였다. 아마도 무승의 우두머리쯤 되리라고 생각했다.

준경은 무승과 시선을 마주치자 씩 웃으며 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쿨럭!”

기절해있던 이철의 입가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무승들의 눈빛에 큰 동요가 일었다. 그러나 더 큰 놀라움이 펼쳐졌다. 준경이 이철의 신형을 발로 걷어차며 우두머리 앞으로 떨어낸 것이다. 삽시간에 무승들이 이철을 감싸 안았고, 일부는 준경에게 칼을 들이댔다. 명이 떨어진다면 당장에라도 준경을 난도질할 기세였다.

목숨이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준경은 오히려 우두머리에게 말을 거는 태연함을 보였다.

“발에 힘을 주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두 번이었다.”

의술에 능한 승려를 무승들이 찾고 상태를 살피느라 분주한 상황이었다. 구명줄 같은 인질을 스스로 내준 경우는 우두머리도 본 적이 없던 상황이라 준경의 말에 절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늑골 두 개를 부러트렸다.”

육체를 올바르게 단련시킨다는 것은 몸에 대해 해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준경이 만난 고수들은 체계적인 의술을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웬만한 의원들 뺨칠 정도로 신체 기관에 대해 잘 알았다. 준경 역시 맞아가며 체득한 경험이었다.

“첫 번째는 거궐(巨闕) 주변의 늑골이다.”

우두머리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저 위협을 위해 발을 밟았다고 생각했는데 준경은 늑골을 부러트렸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우두머리의 눈이 다급하게 이철에게 향했다. 준경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철을 돌보던 무승 하나가 급히 거궐을 집었다. 그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간에 손상을 주는 혈 자리가 대략 6개 정도가 있다. 준경이 거궐을 언급한 것은 간을 보호하고 있는 거궐 주위의 늑골을 부러트려 간을 찔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원에서 가장 오래된 의서로 꼽히는 황제내경(黃帝內經)에는 자중간(刺中肝), 오일사(五日死), 기동위어(其動爲語)라는 말을 적어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잘못 간을 찔린 자는 5일 내에 즉사하고 그 사이 말을 많이 하고 싶어진다고 하더군.”

간이 손상될 때의 충격으로 즉사하는 예도 있다. 5일 내에 죽는 경우는 간장에서 생성되는 소화분비액인 담즙이 복막으로 스며들며 서식하는 세균과 결합하여 심각한 염증을 일으키는 경우였다.

“식도를 덮고 있는 뼈도 하나 부러트렸지.”

입에서 피가 나온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식도 손상에 의해 생긴 피가 식도의 내강(內腔)을 막았고, 반사작용으로 고인 피를 토해낸 것이다. 무엇보다 식도에 구멍이 났다는 것은 종동염(縱洞炎), 폐렴 등의 병이 수반되었다.

우두머리는 분노를 넘어서 덜덜 떨고 있었다.

준경이 한 짓은 바로 죽지는 않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곧 죽음에 이르는 증상을 둘이나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준경의 입가에서 싸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식도가 천공(穿孔)되었으니 대갓집 체면에 침을 질질 흘리게 되겠군.”

우두머리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준경은 이철을 살려서 자신들에게 넘겨주었지만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어의가 온다고 해도 이철을 살릴 수 있을지 암담한 상황에서 이철이 사망한다면 이미 응급조치를 시작한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여기에서 준경을 죽인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자신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밖에 없었다.

우두머리의 표정은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너의 생각을 맞춰볼까? 이대로 이철을 버려두고 심산유곡으로 도망칠까 생각하고 있겠지. 그 마음 이해한다. 목숨을 건지려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살아날 방도가 있다면 어찌할 테냐?”

지켜보던 중년 승려와 길잡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만약 준경이 이들을 이자겸에게 끌어들이겠다고 한다면 너무나 속 보이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승려 중에는 이자겸이 아닌 다른 이씨의 후원을 받는 이들도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모두 읽을 수 없는 바에야 일일이 색출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지금의 사실이 외부로 퍼져 나간다면 이자겸은 끝이었다.

그들은 쉼 없이 눈을 깜박이며 준경에게 애써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감정을 보이려고 했지만, 준경은 그들을 일별하지도 않았다.

“이 공자의 죽음을 무마할 수 있는 세도가는 그리 많지 않다. 추밀원에서 보냈느냐?”

황제의 비서나 다름없는 추밀원이 움직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준경의 직책이 추밀원 별가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두머리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준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곧 고려를 떠날 몸이다. 나의 행선지는 해남도다. 금군 위사 셋과 함께 떠나게 되지.”

“해남도? 금군 위사?”

우두머리는 전혀 생각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초조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중년 승려와 길잡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군 위사라면 송의 도성인 개봉을 지키는 정예병이고, 해남도라면 송이 죄인을 귀양보내는 대표적인 섬이었다. 그러니 어찌 이철과의 인과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까?

“누가 시킨 것인지는 알아서 생각해라. 그러나 이철의 목숨이 채 오 일이 남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해가 뜨면 즉시 고려를 뜰 것이다.”

준경의 말은 추측을 일삼기에 적당한 재료들만 가득했다. 우두머리의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이 빠르게 지나갔다. 고려를 떠난다면 자신들의 목숨은 확실히 보전되었다. 그러나 남겨둔 재화들을 수습할 시간도 없이 이대로 떠난다는 것이 너무나 아까웠다.

우두머리를 보는 준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배가 작아 다 데리고 갈 수 없다. 너희 중 오직 열 명뿐이다. 나를 따르겠다면 의지를 보여라.”

우마르가 대식국에서 고려까지 타고 온 배라면 그 크기가 엄청나게 클 것임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이곳에서 그런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준경은 이번 기회에 자신의 수족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해남도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아무리 강해도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막을 수 없다. 이소에게 그럴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고 한 것이 지금과 같은 행동을 선택한 이유였다.

대략 스무 명 정도 남은 무승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두머리는 준경의 제안을 놓고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무승 중 일인이 들고 있던 도로 옆에 있던 무승을 내리쳤다.

피할 사이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단숨에 무승의 신형이 허물어지자 도를 휘두른 무승은 곧 준경에게 다가와 말했다. 유난히 턱수염이 진한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똥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했습니다. 아직 죽기 싫으니 무사를 따라나서겠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무승 간에 살육전이 일어났다. 그동안 패악으로 일군 재화가 아까워 고민을 거듭하던 우두머리의 목이 단숨에 잘려나갔다. 순식간에 열 명이 가려졌다. 처음부터 이철의 권력과 재화에 이끌려 모인 자들이니만큼 동료애 따위는 지나가던 돌멩이만도 못한 취급이었다.

준경은 그런 자 중 이익과 목숨의 갈림길에서 망설임 없이 목숨을 택할 수 있는 그런 자들을 원했다. 자신에게는 무척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그런 자들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다면 매우 강한 집단이 될 수 있었다. 이철이 지금까지 권력과 재화로 이들을 지배했다면 준경은 그들을 뛰어넘는 힘과 비정함으로 그들을 굴복시킬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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