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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1화 (21/257)

00021  (3) 거경신(居敬信)  =========================================================================

“인주 이씨의 내력을 아느냐?”

준경은 뜬금없는 이자겸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단한 가문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그 집안사람이 아닌 바에야 연원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본래 우리는 허(許)씨였다.”

허씨의 시조는 아유타국의 공주였던 허황옥을 가리킨다. 가야계가 신라에 흡수되면서 허씨 일족은 신라 귀족 사회에 편입되었었다.

“신라 경덕왕 14년(755년)에 아찬(阿飡, 6급) 허기(許奇)라는 분이 있었다. 그분은 왕의 명령으로 친선을 위해 당나라로 건너갔지. 그런데 때마침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했다. 다급해진 당의 현종(玄宗)은 촉(蜀) 땅으로 몽진(蒙塵)하게 되었는데 허기는 그런 현종을 끝까지 호종(扈從)하였다. 난이 진압되고 현종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논공행상을 벌이게 되었는데 황제는 허기에게 황실의 성을 사성(賜姓, 임금이 성을 하사함)하였다.”

“그래서 이씨가 된 것입니까?”

준경으로서는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당나라 황제에게 직접 성을 하사받았다니 이보다 엄청난 일이 있을까? 이자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준경에게 말했다.

“그래 그것이 인주 이씨의 시작이다. 그때 이후로 3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한 번도 중앙에서 멀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대단한 집안이다. 그런 집안의 아이를 네놈이 노비로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성도 없는 잡척에게 너무나 과분한 일이 아니겠느냐?”

화가 나야 했지만, 준경은 자리를 박차지 않았다. 이것도 또 하나의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머리를 식히며 생각하자 이자겸이 이토록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자겸은 그런 준경의 행동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조금이라도 울컥하는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잠잠했던 것이다. 그럴수록 준경의 진정한 속내가 궁금할 뿐이었다. 혹시 숙종의 명을 받들어 자신을 떠보기 위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조부(祖父)께서는 11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여섯째가 나의 아버지였지. 새옹지마라고 하더니 누이의 잘못으로 벼슬자리를 모두 박탈당하고 은신하는 사이 사촌들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사라졌다. 직계 항렬에서 한참이나 떨어지던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지. 내 장인이 누구인지는 아느냐?”

이자겸의 장인은 숙종의 가장 큰 지지자 중 하나인 최사추였다. 해동공자 최충의 손자인 최사추는 현재 숙종 휘하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이자겸은 그나마 은신하며 때를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최사추는 이자겸에게 그리 호의적인 성품이 아니었다. 왜 딸을 맡겼나 싶을 정도였다. 이 당시 권문세족 간에 혹시 모를 보험 성격의 혼례가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준경이 잠자코 있자 이자겸은 허공을 보며 냉소했다.

“그러나 내가 장인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스스로 일어설 것이다. 마침 내게는 조부와 마찬가지로 어린 딸들이 여럿 있다.”

조부나 사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자겸 역시 외척이 되겠다는 야심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숙종의 치세에서 인주 이씨가 눈 밖에 난 이상 느긋하게 기다리며 숙종 이후를 기대했다. 숙종조차도 십 년을 넘게 기다렸거늘 자신 역시 기다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아직 젊었다.

“계림공의 장남이 누구와 혼례를 올렸는지 알고 있느냐?”

일개 별정직 무관인 준경이 황실의 대소사를 어찌 일일이 알 수 있겠는가? 이자겸의 말에서 핵심을 느끼지 못하고 빙빙 돌기만 하니 준경은 참지 못하고 내심을 말했다.

“이소를 제게 맡기는 조건으로 대가를 원하고 계십니까?”

그것 말고는 이자겸이 이토록 말을 돌리는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준경의 질문에 이자겸은 미소를 지었다.

“계림공의 장남은 연화공주(延和公主)와 결혼하였다. 연화공주는 선종과 정신현비(貞信賢妃)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모릅니다.”

준경의 질문에도 이자겸은 자신의 할 말만 던지고 있었다. 계속된 질문에 준경의 말투는 절로 퉁명스러워졌다. 이자겸은 준경이 최소한 숙종의 끄나풀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가 굳을 뿐 무관 특유의 야성을 숨기지는 못했던 것이다. 진실을 알면서도 숨길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연화공주의 성은 본래 왕씨가 되어야 했지만, 이씨가 되어야 했다. 어머니의 성을 따른 것이지. 연화공주의 어머니인 정신현비는 내게는 작은 조부가 되시는 분의 손녀로 나와 같은 항렬이다. 기이하지 않으냐? 굳이 외가의 성을 연화공주에게 붙인 사실 말이다.”

“이상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가 알아야 하는 사실입니까?”

“왕실의 아이와 혼례를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선택된 이가 계림공의 장남이었다. 친사촌 간의 혼례로 보이기보다 외사촌 간의 결혼으로 보이는 것이 대외적으로는 더 보기 좋은 결과였으니까.”

고려는 왕실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동성동본의 혼례를 묵인했었다. 그러나 점차 그 폐해가 드러나면서 그것을 없애려고 하는 시점이었다. 숙종이 왕위에 오르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동성동본 혼례를 금지하는 일이었다. 아직은 몇 개월 뒤의 미래였다.

“그만큼 인주 이씨의 세력은 방대하다. 나는 그 세력을 차지하기 위한 여러 경쟁자 중 한 사람일 따름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유능한 수족이 필요하다.”

“제게 수족이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그럴 마음이 제게는 없습니다.”

“계림공에게 대항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부의 적을 처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내 딸을 계림공의 장남과 연결해줄 작정이다.”

준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자겸의 말대로라면 이미 계림공의 장남은 연화공주라는 사람과 혼례를 올린 뒤였다. 그런데 그에게 자신의 딸을 주겠다는 이야기는 연화공주를 처리해달라는 말과 같았다. 문서 상으로는 문중의 사람이고, 실제 그 피의 연원을 추적해도 왕씨보다는 이씨의 피가 더 많이 흐르고 있는 공주였다.

“너무 앞서 나가는 것 같구나. 조카가 계림공을 시아버지로 두고 있는 이상 내가 그녀를 너에게 죽이라고 부탁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지. 게다가 그 아이의 건강이 썩 좋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으니.”

은신하고 있는 사람치고는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준경은 이자겸이 자신에게 꽤 중요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자겸은 이소를 빌미로 자신을 단단히 이용할 생각을 굳혔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면 준경은 어떤 식으로든 매장당할 가능성이 컸다.

“지공거(知貢擧) 이예(李預)의 아들, 이철(李哲)을 죽여다오. 그러면 이소의 거취에 대해 나는 네 편이 되어주겠다. 또한.”

이자겸의 눈이 빛났다.

“내 장녀(長女)를 주마.”

지공거라면 과거 시험관을 가리키는 직책이었다. 이씨라면 틀림없이 같은 인주 이씨의 인물이 분명했기에 준경은 침을 삼켰다. 장녀까지 주겠다고 할 정도라면 가문에서 이자겸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라고 할만한 인물일 것이다.

“이철은 나와 육촌지간이다. 연화공주의 어미인 정신현비의 오라비이기도 하지. 계림공이 즉위하여 장남 우를 세자로 삼으면 이철의 권력이 어찌 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준경은 속이 들끓는 심정이었다. 밖으로 나가 한바탕 토(吐)를 하고 싶었다. 같은 집안사람끼리도 권력을 위해 죽고 죽여야 하는 비정한 현실이 자신이 넘보고자 했던 구름 위의 세상이란 말인가?

준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거절하겠습니다.”

“이대로 나간다면 후회할 것이다.”

이자겸의 엄포에 준경은 더 참지 못하고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이자겸의 목을 조이자 금세 당황할 줄 알았던 이자겸은 오히려 태연한 신색을 유지했다.

“한 가지만 말해주마. 이철은 지금쯤 흥왕사(興王寺)에서 여악(女樂)을 불러 흥청대고 있을 것이다. 여악 중 미색이 뛰어난 이는 이철이 방으로 불러 교합을 하는데 그 시간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다.”

“절에서 그 짓을 한단 말입니까?”

고려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불교 신자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흥왕사는 고려 왕이 연등회를 위해 가장 자주 찾는 절이었고, 그 때문에 2,800칸에 이르는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절에 있어도 누가 와 있는지 쉽게 찾기 어려울 정도의 규모인 것이다. 국가 행사, 왕의 행차가 빈번한 곳이기에 인주 이씨는 일찍부터 이곳을 크게 지원하며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이자의의 난에 흥왕사의 주지가 끼어들면서 된서리를 맞고 있는 형국이었다.

“규모가 크다 보니 일부 승려들의 묵인 속에 은밀하게 향락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들은 이철이 흥왕사의 권위를 다시 세워주리라고 믿고 있지. 그들 중에 진정한 중은 하나도 없다. 다들 잿밥을 쫓아 몰려든 불한당들이지. 그러나 그들의 잔인함과 흉포함에 다른 승려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실정이다. 하나만 더 말해줄까?”

문중의 치부를 거침없이 까발리는 이자겸이었다. 준경은 저도 모르게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이철과 관계한 여악은 살아남은 자가 없다. 그 뒤처리를 맡는 것이 이철에게 기생하는 불한당 같은 무승(武僧)들이다. 나에게도 제법 힘쓰는 노비들이 있지만, 그 무승들을 당해낼 수 없어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 자리에서 너에게 확실하게 말하마.”

마침내 준경은 이자겸의 멱살에서 손을 뗐다. 이자겸은 옷매무시를 고치는 여유를 보여주며 준경에게 여유 있는 미소를 보였다.

“어차피 죽어 마땅한 놈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계림공에게 밀고하지 않았던 것은 가문의 존망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온전한 힘을 얻고 싶은 것이지 넝마를 얻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 정도면 너의 자존심에도 어긋나지 않겠지?”

“그 말 사실입니까?”

이자겸의 말이 사실이라면 숙종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이유를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날에는 가문이 멸문으로 이를 수 있는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있겠느냐? 나는 문중의 신임과 힘을 얻을 것이고 너는 그런 나의 도움을 계속 받게 될 것이다. 이상적인 결과가 아니냐?”

준경은 이자겸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만약 그런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면 당연히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자겸조차 방관하고 있을 정도로 세력의 힘이 강한 자였다. 그렇기에 이자겸은 자신의 장녀까지 걸 정도였으리라. 준경은 호승심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무승과 겨룬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들 중에 강자가 숱하게 있다는 사실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요나라와의 전쟁 중에 고려군을 돕기 위해 전국 사찰에서 승군(僧軍)이 조직되어 달려오는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장녀를 주겠다는 말은 받지 않겠습니다. 이소의 거취를 이소 본인에게 자유롭게 일임한다는 조건 하나와 이후 저와 이소에게 관심을 끊어주시길 바라는 것이 두 번째 조건입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이자겸 역시 준경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장녀가 골육종(骨肉腫)에 걸려 있다.”

준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골육종이라면 왕성한 10대 성장기에 가장 많이 발생하는 암의 일종이었다. 뼈에서 극심한 통증과 그 주변에 종창(腫脹)이 발생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증상이 나타났을 때는 지금 시대로서는 시한부 인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백방이 무효였다. 용하다는 의원들이 말하길 앞으로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다. 올해 19세로 혼기가 찬 아이를 이대로 떠나보낸다는 것이 아비로서 마음에 걸렸다. 네놈이 아니었다면 나는 누군가에게 같은 부탁을 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건강하고 씩씩한 남자를 배우자로 삼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자만이 그 정도의 자격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제안은 네놈이 이철을 죽이는 데 성공했을 시 보상이 아니라 내 부탁인 셈이다.”

정말 뜻밖의 고민이 준경을 찾아왔다. 이자겸은 자신의 딸을 차대 후계자로 유력한 숙종의 장남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장녀를 보낼 수 없기에 차녀를 보낼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만약 이자겸의 뜻이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면 자신과 숙종의 장남은 동서(同壻)지간이 되는 것이다.

준경은 자신이 권력을 그리 탐하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사정이 딱하다고 하여 혼례를 올린다면 그건 곧 이자겸의 사위로서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바라던 바인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계속 고민하게 되는 것은 누군가는 골육종에 걸렸다는 그녀와 혼례를 치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재혼이 자유로운 고려 시대였지만 아직 초혼도 해보지 못한 준경으로서는 동정(同情)이냐, 아니면 거절이냐를 놓고 진땀을 흘렸다. 만약 이소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를 받아들이라고 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그건 동정일까?

‘그런데 내가 이철 패거리를 이길 수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이자겸조차 방관해야 했던 이철을 죽이는 일이 그리 간단할 리가 없었다. 성공해야 다음 고민이 이어지는 것인데 아직 하지도 않은 일을 두고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스스로 비웃음을 던지고 싶었다.

“이철의 행패가 대감의 말대로 사실이라면 이소의 자유와 맞바꾸는 것이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이철을 처리한 후 대감과 다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철 패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신중하기까지 하니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구나. 내가 알기로 이철 주변을 지키는 자들은 서른 명 정도다.”

서른이라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인원이었다. 무승들이라 했으니 홀로 상대하기에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노비 열 명을 지원해주마. 여진 출신들로 제법 칼을 쓸 줄 아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말을 태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인 것이 안타깝다.”

시간을 끌면 아무리 넓은 흥왕사라고 해도 소식이 외부로 금세 퍼질 가능성이 있었다. 이철만 죽일 수 있다면 무승들은 끈 떨어진 연 신세이므로 준경은 속전속결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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