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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8화 (18/257)

00018  (2) 청풍양수(淸風兩袖)  =========================================================================

그 배경을 알려면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로마 황제 게타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의 자치를 허용하면서 기독교의 위세는 로마를 비켜나갔다. 예루살렘의 운영을 둘러싸고 기독교와 전통 유대교가 충돌하면서 갈등 양상을 만들었지만, 뜻밖에도 분쟁을 하나로 통일한 것은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철학 기독교였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종교적인 믿음을 내포하고 있었고, 신비주의 성향을 일정부분 띠고 있었다. 기독교로 갈아탄 철학자들은 고대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종교적 기조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해 큰 반감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기독교 자체를 인문학적으로 해부하고 실증을 통해 이론적으로 완성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중지되자 전통 유대교와의 교리 해석 다툼도 물론 있었지만. 그보다 당면한 문제는 그리스 철학과의 경쟁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이 오랜 시간 이루어놓은 공고한 철학적 믿음을 허물고 기독교적 가치가 지중해 정신의 헤게모니(hegemony)가 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예루살렘의 기독교인과 유대교인이 교리를 두고 다투는 사이 이집트 북부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기독 철학자들은 이미 그런 점을 통찰하여 문답학교(問答學校, catechetical school)라는 것을 만들어 기독 이론을 체계화시키고 성직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범세계적 재앙이었던 훈족의 격퇴와 중국까지 연결하는 가도의 건설 같은 굵직굵직한 사업에 여념이 없었던 로마였기에 이집트 내부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이 그들에게는 행운이었다.

그 결실이 성과를 거두어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라는 걸출한 성직자가 이집트 교회라는 것을 창립하여 북아프리카 일대에 대대적인 기독교 광풍을 일으켰다.

플라톤주의의 이론을 기독교에 접목하여 기존 그리스 정신을 옹호하고 있던 이들조차 기독교에 감화되었다. 철학의 한 분파로 기독교를 인정한 것이다.

철학적인 사유에 바탕을 둔 기독 이론이었기에 기존 유대교와도 별다른 잡음을 일으키지 않고 융화되었다. 유대교는 이들의 등장을 생활 철학의 일부로 기독교의 교리를 차용한 무리로 생각하여 오히려 교세의 확장을 지원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세력이 북아프리카 최서단까지 이르고 그곳에서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지나 프랑크족에게까지 퍼져 나가자 예루살렘이 가진 성지로서의 값어치는 이미 알렉산드리아로 역전된 상태였다. 가장 믿고 있었던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의 교회까지 이집트 교회를 정통으로 인정하자 예루살렘의 기독교와 유대교는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각지의 성직자들이 흩어진 교리를 통합하고 통합 기독교의 출범을 알리는 알렉산드리아 공의회(公議會)가 소집되었다.

근 600명의 서방, 동방 교회의 주교(主敎)들이 참석하였는데 무려 2년간이나 참석자들을 교체하며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을 정도로 통합과정은 험난했다.

마침내 그들은 결론을 내고 정식 교의(敎義)를 채택하였다. 그것이 바로 이위동체(二位同體)설이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와 철학으로서의 기독교 모두를 인정하고, 보혜사(保惠師, paraclete)가 되는 길은 종교와 철학, 모두에 깊은 자로 그것이 곧 독생자(獨生者)라고 못 박았다.

기독교가 빠르게 득세하자 놀란 로마는 로마의 영향권 아래 있는 나라들과 함께 정교회(正敎會, orthodoxy union)를 설립한다. 정교회는 전통적인 그리스, 로마의 철학을 옹호하고 그 신화를 계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기독교의 유일신 이론에 반감을 품던 대다수 철학자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기독교가 알렉산드리아 공의회를 개최하자 로마는 세계공의회(世界公議會)를 소아시아의 작은 도시 에페소스(Ephesos)에서 개최하였다. 그 자리에는 로마의 동맹국들 외에도 당시 최강국이었던 파르티아와 민국을 불러 각국 종교는 각 민족 자율에 맡겨야 하고, 기독교가 주장하는 절대적 진리는 절대 선이 아니라 절대 선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할 뿐이라는 주장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인간의 행복과 신의 행복은 일치하지 않는다.’

로마 황제 게타가 공의회를 마무리하며 한 발언으로 천하에 널리 알려진 금언이기도 했다.

당시 기독교와 정교회의 세력은 오히려 정교회가 6:4정도로 우세했다. 로마와 그리스의 철학은 이미 오랜 세월 지중해 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를 석권하고, 소아시아와 유럽의 비 문명권까지 활발하게 진출한 기독교였지만 로마의 힘에 비하면 부족했다. 그러나 로마의 황제정이 점차 향락과 부패로 망가지기 시작하고, 유럽 각국이 저마다 독자적인 세력화를 꾀하면서 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던 기독교의 세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로마가 우여곡절 끝에 둘로 나누어지며 지중해 패권국의 지위를 상실하자 정교회와 기독교의 세력 비율은 완전히 역전되어 2:8 정도로 정교회의 절대 약세가 된 상황이었다.

이제 절대적인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한 기독교에게 또 하나의 강적이 나타났다. 불과 삼백 년 전에 아라비아에서 발현한 이슬람교의 등장이 그것이었다. 기독교가 근 육백 년간 교세를 키웠다면 이슬람은 출현한 지 단 일백 년 만에 기독교의 세력과 비등할 정도까지 커졌다.

그들이 믿는 알라는 다신교 시대부터 존재했던 신으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하마드는 다신교를 믿는 정교회가 기독교에 패배하게 된 것을 고찰하며 다신을 뛰어넘는 강력한 하나의 신이 기독교의 유일신에 맞설 수 있으리라 보았다.

기독교의 유일신과 차별화하기 위해 그는 ‘알라는 이 세상 유일한 신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지만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신이 질투와 편애의 신이라면 알라는 관대와 자애의 신이다.’라고 주장하며 기독교의 무차별 교세 확장에 반감을 품던 아라비아 식자층을 단숨에 끌어들였다.

그러다가 무슬림 간의 세력 다툼이 예루살렘까지 불통이 튀면서 일시적으로 점령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기독교의 성지는 이미 예루살렘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간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기독교의 모태(母胎)라는 상징성이 있었기에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프랑스 중부 클레르몽 외곽의 언덕 꼭대기에서 전 유럽을 향해 일성(一聲)했다.

“예루살렘을 해방한다. DEUS LO VULT!(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누군가는 그 일대의 이권을 노리고, 누군가는 순수한 신앙심으로, 누군가는 개인적인 성공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럽의 힘이 처음으로 외부를 향해 분출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설명을 듣긴 했지만 고의화와 준경은 그저 멀뚱멀뚱하기만 했다. 그것이 대체 자신들과 무슨 상관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증포는 그들의 그런 반응을 이해하고 있었다.

“대식국은 이미 몇 개의 나라로 분할되었고, 외부의 사자가 그들을 노리고 있는 형국이다. 회회교(回回敎) 내부는 교리 해석을 둘러싸고 두 파로 나뉘어 서로 죽고 죽이는 혈전을 거듭하고 있으니 누가 와도 묶인 매듭을 풀기 어려운 난국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송과 고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한 것입니까?”

“반은 맞다. 우마르는 군대의 파병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이년 정도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본관은 그 정도 요청은 손쉬운 것으로 생각했지만, 우마르는 하사신이라는 자들의 집요함을 계속 이야기했다. 본관 역시 이번 기회에 그것을 깨달았으니 신변 보호가 쉽지만은 않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2년입니까?”

“대식국의 제후국 중 한 곳의 영주가 대식국 황제에게 반기를 들다가 싸움에 져서 아들을 볼모로 바쳤었다고 한다. 그 아들이 대단한 수완가인 모양이다. 황제가 병으로 죽자 제후국을 다시 찾겠다며 도망을 쳤는데, 그때 우마르의 도움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가 약속하길 이년 안에 자신의 나라를 찾아 우마르를 돕겠다고 한 모양이다.”

준경으로서는 머리가 핑핑 돌다 두통까지 올 지경이었다. 이집트 일대를 파티마 왕조가 지배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들은 시아파 무슬림으로 하사신의 창설자가 본래 파티마 왕조에서 선교사를 지낸 경력이 있다고 했다. 즉,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가 경쟁자인 수니파가 지배하는 대식국을 견제하기 위해 하사신의 창설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그런 대식국에서 탈출하여 이즈니크(니케아)에 자리한 제후국을 되찾기 위해 탈출한 왕자는 수니파라고 했다. 왕자가 볼모로 잡혔던 것은 전쟁에서 진 결과여서이지 종교적인 대립은 아니었기에 수니파인 왕자는 시아파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세력이 없는 그는 이즈니크를 장악하기 위해 현재 인근 스미르나(이즈미르) 왕국에 머물며 그곳 왕의 사위가 되었다고 했다. 스미르나는 비잔틴 제국의 해군과 맞겨룰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곳이라고 했다.

“그가 보호를 요청하며 대가로 내민 것이 산술해법(算術解法)과 천문(天文)의 관측법이었다. 고려의 산술도 뛰어난 것을 알지만, 대식국의 산술과 천문은 천하제일로 이미 소문이 나 있는 터라 괜찮은 거래 조건이라고 생각했지. 고려 조정에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의 은둔 사찰이라면 자객들이라도 능히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고려 조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송이 얻어갈 대가를 함께 나눠 가지자고 요구할지도 몰랐다.

“자네들이 개입하면서 이미 고려도 엮인 셈이 되었다. 충분히 대가를 가질 자격이 있지. 특히나 자객들이 무섭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으니 이년 간 우마르를 지키려면 그냥 은둔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을 대비해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나는 사신이 달려오는 대로 그대들을 우마르의 보호자로 추천할 셈이다.”

고의화는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숙종의 경호 무사나 마찬가지였으니 절대 빠질 수가 없었지만, 준경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증포의 위치를 생각했을 때 요구하면 거부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송에서는 보호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준경이 궁금하여 물었다. 증포에게서 처음으로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증포가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송의 치부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법당을 지지해주는 철종 덕에 정권을 잡고 있었지만, 문제는 젊은 철종에게 숙환(宿患)이 따라다닌다는 것이었다. 언제든 철종이 졸(卒)하고, 새로운 황제의 뜻에 따라 숙청의 바람이 일 수 있었다. 그런 시기에 우마르의 등장은 자칫 반대파를 자극할 수 있었다. 그가 가진 지식은 진귀한 것이지만 그 지식보다 권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탐관이 많은 것이 송의 처지였다.

고려의 조치는 매우 빨랐다.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사신이 증포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를 보자 준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그는 바로 윤관이었다.

“대강의 사정은 들었습니다. 대식국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던 아국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본관에게 책임을 지고 이번 일을 수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의화와 준경은 윤관이 증포와 우마르의 처리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슬금슬금 물러나 밖으로 나왔다. 자신들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밖을 나오자 그곳에는 준의라고 불리는 젊은 무관이 있었다.

젊은 무관이 고의화와 준경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저를 대신해 대인을 지켜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북경대명부(北京大名府)의 노준의(盧俊義)라 합니다.”

북경은 현대의 베이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북의 한단시 대명현에 속한 곳이었다. 이 시기 베이징은 요나라가 점거하여 남경으로 불리고 있었다.

요나라 공격을 수비하기 위한 요충지로 송나라 군부의 절반이 이곳에 모여 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니 그곳 출신이라면 대체로 뛰어난 무관들이 많았다.

“자객들을 상대해보니 중원이나 고려의 무예와 달리 투로나 공수가 상궤(常軌)를 달리했소이다. 그런 자들을 홀로 열다섯이나 베었다니 참으로 그 무예가 놀랍구려.”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한 고의화가 노준의를 매우 칭찬하고 있었다. 자신 역시 15명을 어찌어찌 처리할 수 있겠지만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이른 시간에 처리할 자신은 없었다. 노준의가 겸손히 화답했다.

“제 공이 아니라 금군의 희생 덕입니다. 만약 제가 진짜로 뛰어났다면 한 명의 희생도 없었어야 하겠지요. 그것보다 이번에 고려 무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와 여진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는 기개의 원천을 확인한 느낌입니다.”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창날이 없는 봉으로 보이오만 설마 그것으로 상대한 것이오?”

노준의는 일반 장수들과 다르게 창이나 도가 아닌 봉을 들고 있었다. 묵죽(墨竹)으로 만들어진 봉은 사람 손을 많이 탄 흔적이 보임에도 광택과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노준의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상하게 보이시겠지만 저는 묵죽봉만을 사용합니다.”

노준의가 묵죽봉을 흔들어 보이자, 고의화도 준경도 내심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날도 없는 일개 봉으로 열다섯의 자객을 죽이다니, 대체 그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기에.’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약관의 청년인 노준의가 앞으로 십 년이 되지 않아 무예에 뛰어난 자들을 가리키는 하북 삼절 중 일인이 되고, 다시 십 년이 흘러 천하제일봉이라 불리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호지 상에서도 무예의 순위를 매기면 그는 무수한 호걸 중 단연 첫머리였다. 그의 무위는 홀로 전장의 승패를 바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송강이 두령의 자리를 노준의에게 양보하려고 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잠룡에 불과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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