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2) 청풍양수(淸風兩袖) =========================================================================
잠시 간의 휴식을 즐기는 사이 조정에서는 숙종의 명으로 전국에 사면령이 내려졌다. 또한, 나이 80세 이상의 고령 노인과 의부(義夫), 절부(節婦), 효자(孝子), 순손(順孫),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물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으며, 태조(太祖) 시대 및 삼한 공신의 내외손(內外孫)으로서 관직이 없는 자는 한 호(戶)에 한 사람씩 입사(入仕)를 허락하고, 태조의 후손으로서 군적에 있는 자는 면하게 하고, 관직이 없는 자는 입사(入仕)를 허락하였다. 문무관리는 한 계급씩 올리고, 진사와 명경으로서 열 번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한 자는 벼슬을 시키며, 현종(顯宗) 때의 공신이었던 하공진(河拱辰), 장군 송국화(宋國華)의 자손과 경술년에 거란에 갔다가 억류되었던 정사와 부사의 자손 중에 한 사람씩 입사(入仕)를 윤허하고, 제색(諸色)의 군인에게는 쌀과 포목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으며, 주, 현에 금년(今年) 조세를 면제하고, 요역과 공납이 체납된 것은 2년 전 것에 한해서 감면하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온 고려의 관리와 백성이 숙종을 우러렀다. 역대 고려 왕 중 가장 파격적인 등장이었다.
만약 요 도종이 공물을 감해주지 않았더라면 감히 시행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기에 윤관과 임의는 숙종의 큰 신임을 받게 되었다. 숙종은 그들을 통해 준경의 활약상을 들었지만, 따로 그 공을 묻지 않았다. 그 사실을 다른 신하들이 알게 되었을 때 준경에게 득보다는 실이 크게 작용하게 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숙종은 고의화가 양전(陽箭)이라면 준경을 암전(暗箭)으로 삼고자 하는 흉중을 드러냈다. 윤관과 임의는 누구에게도 준경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약조한 뒤에야 물러날 수 있었다.
한해의 공물을 전달하기 위해 사신단이 다시 요나라로 떠났고, 요에서는 답례로 태주 관찰사 유직이 입조하여 전(前) 왕의 생신을 축하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 사이 준경은 고의화와 함께 시간이 날 때마다 창과 도를 수패와 함께 다루는 수련에 한창이었다. 처음에 수패를 본 고의화는 상당한 관심을 보였었다. 준경에게 자신 말고 수벽타를 가르쳐준 고인(高人)이 또 있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만든 것은 분명한데.”
나무 앞뒤로 번들거리는 가죽에 휩싸여진 수패는 예전부터 누가 써왔던 것인 양 제법 오래된 티가 났었다. 그래서 준경도 수패를 배우기로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 수패를 던져준 고영창에게 연원(淵源)을 물었지만, 고개를 흔들며 별것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었다. 그러나 준경은 수패에 얽힌 내력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평범한 수패였다면 자신에게 그리도 조심스럽게 건네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누가 썼는지 알만한 단서는 없었다. 송의 사신은 과거 고려의 수패를 보고 값싸게 만들 수 있는 엉성한 방패라는 혹평을 남겼다는데 준경이 들고 있는 수패는 그런 평범한 수패와는 궤를 달리하여 정교하였다. 특히 방패 전면에 그려진 뿔 달린 호랑이는 그 눈매가 매우 무서워 가끔 수련 장면을 구경하던 이소가 눈을 가릴 정도였다.
그러나 고민은 준경과 고의화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좋은 물건을 얻었으면 제대로 써주는 것이 도리라며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련과 대련을 병행했다.
고의화도 제법 열심이었던 것은 준경이 송의 왕진과 여진의 아골타, 그리고 망인 고영창을 언급해서였다. 그보다 강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말에 자신이 그에 못 미칠 것이 뭐냐며 벌컥 한 탓에 그날 한 판의 대련 후 준경은 종일 누워 있어야만 할 정도였다. 그 덕분에 자매가 준경의 곁에서 젖은 수건을 준비하여 종일 함께 있었고, 이소는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자매 곁을 떠나지 않았었다. 그날 준경은 자매, 이소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새해가 넘어가기 전에 벽란도로 구경을 가기로 약속했다. 준경이 없는 동안 제대로 바깥 출입을 하지 못했다는 이소의 불만에서 시작된 약속이었다.
항상 타국 상인으로 북적이는 국제 무역항 벽란도는 준경도 한 번도 구경을 해본 적이 없는 곳이기에 하루쯤은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고려의 휴무 제도는 역대 왕조 중 가장 많은 휴일을 보장했다. 특히 연말부터 새해까지는 근 15일에 가까운 가장 긴 휴일이 시작되어 명산(名山)의 대찰(大刹)마다 한 해의 복을 비는 불사(佛事)로 그 인파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시기니 타국 상인도 이때를 기해 벽란도에 기항했다. 이때만큼은 먹고 즐기며 재물을 푸는데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과거 거란의 1차 침입부터 지금에 이르는 근 100년간의 기간은 고려 시대를 총괄하여 가장 쌀값이 싼 시기로 고기는 제대로 먹지 못해도 최소한 굶어 죽는 이는 없는 때였다. 강대한 힘을 가진 거란을 상대로 감히 싸워볼 배짱을 부렸던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벽란도를 둘러보겠다고?”
준경은 고의화에게 벽란도를 구경할 수 있도록 길잡이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워낙 복잡한 곳이라 지리에 능숙한 자가 아니고서는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헤매다가 끝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귀한 수련 시간 하루를 쪼개고 가는 것이니 헛발을 하고 오는 길은 없어야 했다.
고의화는 흔쾌히 수락하여 사인이 나란히 벽란도로 향하게 되었다. 그날이 한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29일이었다.
싸라기눈을 맞으며 벽란도에 다다르자 준경은 눈이 절로 뜨여지는 것을 느꼈다. 천하 온갖 인종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타국인 중 칠 할은 송상이다.”
고려와 가장 활발한 교역을 벌이고 있는 곳은 단연 송나라였다. 그래서 그런지 송상을 뜻하는 붉은색 옷 인물들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그들을 살피다가 준경은 한창 흥정하는 한 무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의화가 무리를 살피며 설명해주었다.
“저들은 대식국에서 온 상인들이다. 머리에 흰 천을 두르고 눈동자 색이 다르다면 거의 저들이라고 보면 맞다.”
그들 중에는 호위 무사도 섞여 있는지 날카롭게 보이는 월도(月刀)와 원형방패를 소지하고 있었다. 중원이나 고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의 무기였다.
준경은 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를 이상하게 깎고 긴 상의를 걸친 왜소한 이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허리에 자기 키만 한, 칼을 차고 있었다.
“저들은 왜인이다. 어지간해서는 이곳까지 오지 않고 경상도를 통하지만, 가끔 필요한 물건을 대량으로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오는 경우가 있다.”
참으로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기기묘묘한 산물을 구경할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세상은 넓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화려한 장신구를 파는 상인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소와 자매를 보면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준경은 전대(纏帶)의 은자를 풀었다. 각기 원하는 장신구를 가지게 되자 이소와 자매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준경은 자신에게는 별로 필요없는 은자가 여자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 구경을 마치고 시장기가 돌자 사인은 요기할 수 있는 노천 식당을 찾았다. 그곳에서 유난히 시끄러운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을 보니 송나라 상인들과 대식국 상인들이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로 대식국 상인이 말하고 있었고, 송나라 상인들이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들은 이후 요기를 마쳤는지 자리를 떴다. 그들이 사라지자 나온 요리를 들기 시작한 이소가 나직하게 말했다.
“자매의 귀가 많이 밝은 편이에요. 송상이 대식국 상인에게 대답하길 ‘설마 이역만리 이곳까지 그들이 찾아오겠소? 기우요.’라고 말했다네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모양이군.”
고의화는 식사를 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국제적인 항구답게 타국인들끼리 다툼이 벌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항구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중앙군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니만큼 웬만한 소란은 제압할 수 있었다. 자매가 다시 이소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이소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매가 말하길 대식국이 망했데요. 3년 전에 그곳 재상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아까 보았던 대식국 상인들은 실은 상인이 아니라 재상과 가까웠던 사람들이 잠시 몸을 피한 것이라고 해요. 재상을 암살한 이들은 정말 무서운 자들이라고 하네요. 능히 이역만리를 쫓을 만큼요.”
“그게 정말이야?”
준경도 고의화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고려와 교역하게 된 것은 송나라와 교역을 하면서부터였고, 송나라는 대식국이 자신들 못지않게 큰 나라라고 소개해주었다. 그런 대식국이 망했다고 하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조정에서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게 확실한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의화가 이소에게 확인했다. 이소가 자매를 쳐다보자 자매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이럴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
고의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준경도 따라 일어나자 고의화가 두 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이 길로 아까 가르쳐준 관청으로 달려가 이소와 자매를 안치(安置)하고 그곳의 대정에게 내 이름을 대고 병사들을 빌려 오너라.”
고의화가 뛰어가자 준경은 곧 관청으로 달려가 치안을 담당하는 대정에게 사정을 알렸다. 김씨 성을 가진 대정은 깜짝 놀라며 곧 병사들을 점고했다. 준경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벽에 걸린 청강도를 빌렸다. 혹시 모를 유혈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고의화의 행방은 뜻밖에 금세 발견되었다. 벽란도의 가장 큰 객점(客店)에서 상인들이 기겁하며 뛰쳐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명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실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사신(???????, assassin)!”
준경이 객점 실내로 뛰어들자마자 본 것은 환갑에 가까운 대식국인이 자신을 공격하는 무사들을 손가락질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고의화는 송나라 상인을 보호하며 대식국 무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저놈들은.”
이미 준경이 보았던 자들이었다. 월도와 원형방패를 든 대식국 무사들이 곡도(曲刀)로 대응하는 대식국 무사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누구를 도와야 할지 고민하다가 고의화가 환갑정도로 보이는 대식국인을 보호하라고 하자 망설임 없이 그의 전면을 가로막았다.
“컥!”
죽는소리는 만국이 공통이었던 모양이다.
단숨에 월도를 든 대식국 무사의 목을 치고 준경은 자신이 움직여야 할 범위를 생각했다. 허공의 독수리가 까마득한 지상의 쥐를 탐지하는 것처럼 적들의 숫자와 그 움직임이 손에 들어올 듯 잡히기 시작했다. 실력이 올라갈수록 그 시간은 점차 찰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것이 왕진이 말한 전장의 흐름이라고 준경은 믿고 있었다.
김 대정이 소리를 치며 혈전을 멈출 것을 소리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고의화가 반발하는 자는 모두 죽일 것을 소리치자 김 대정은 병사들에게 일러 공격을 개시했다.
월도를 든 무사는 대략 다섯 명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들의 몸놀림은 준경으로서도 처음 볼 정도로 신출귀몰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호승심을 자극했다.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쉬었다. 새로운 숨이 심장으로 전달되었고, 심장은 새로운 피를 전신으로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핏줄이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도를 가슴에 품고 가장 전면에 있는 자를 향해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월도의 사정거리에 들어가자 대식국 무사는 준경의 가슴을 사선으로 베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경은 가슴에 품고 있던 도로 있는 힘껏 월도를 밀어 제쳤다. 그냥 밀어 제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돌멩이를 던지듯 월도와 접촉하는 순간 강하게 밀며 손을 놓아 버린 것이다. 준경의 도는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월도를 든 손 역시 어깨 안쪽에서 밖으로 순식간에 수평으로 열렸다.
그 틈을 노려 준경의 무릎이 대식국 무사의 명치를 노리자 무사는 재빨리 방패로 가슴을 가렸다. 준경의 입술이 비틀렸다. 방패를 개의치 않고 무릎의 방향만 살짝 비틀며 허벅지가 방패와 닿도록 했다. 그와 함께 직각을 이룬 오른손 관절이 쏜살같이 무사의 턱을 수평으로 강타했다.
무사가 비틀하며 준경과 떨어지자 준경의 오른발이 무사의 방패를 안에서 밖으로 차내며 기어코 명치를 열었고, 무릎을 굽힌 상태로 명치를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사가 쓰러지자 준경은 무사가 쓰고 있던 방패를 주워들었다.
그 사이 고의화가 의자를 들어 무사 한 명의 머리를 내리쳤고, 김 대정 역시 군병과 함께 한 명을 베어냈지만 두 명의 군병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은 동료가 죽자 눈빛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남은 세 명은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빠져나갈 생각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고의화나 준경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한 놈은 살려놔서 진상을 들어야 한다!”
고의화가 반대편에 있는 준경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준경은 눈앞의 상대를 살려줄 마음이 없었다. 방패를 들고 처음으로 겪는 실전을 그대로 흘려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놈은 제가 죽입니다.”
준경은 객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재빨리 점하며 말했다. 재빠른 몸놀림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의 허를 찔러 오히려 이층으로 올라가 뛰어내리는 것을 선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 주효했다. 마치 약속한 것처럼 자신이 계단을 선점하자마자 달려드는 무사를 보며 준경은 방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