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2) 청풍양수(淸風兩袖) =========================================================================
그로부터 삼 일의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왕진은 하루 한 시진씩 이틀간 총 두 시진을 가르치면서 총체(總體)보다는 요체(要諦)를 가르치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설명과 시연을 듣는 시간도 빠듯하여 정작 대련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 준경도 왕진도 사신단의 호위를 위해 파견된 자들이었기에 사신단을 두고 수련에만 전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진에게 설명을 들으며 준경은 방패의 종류가 무척이나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두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를 골라 익숙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왕진과 고영창이 권해준 것은 수패(獸牌)였다.
방패는 크게 두 가지 종류에서 갈라진다.
하나는 장방패(長防牌)라 하여 사람 키만 한 사각 모양의 방패이다. 또 하나는 원방패(圓防牌)로 원형으로 생기며 장방패보다 가볍고 크기가 작아 휴대성을 강조한 방패 종류를 일컬었다. 수패는 그런 장방패와 원방패의 가운데 지점에 있는 방패였다.
좌우는 직선으로 생겼지만, 위와 아래는 둥근 원을 그리며 전체적으로 타원형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몸체는 응달에 잘 말린 나무를 이용해 가볍고 질긴 특성이 있도록 했고, 몸체 앞뒤로 가죽을 덧대 화살에 대한 방호력을 더욱 높였다. 무엇보다 준경이 선택한 수패의 가장 큰 특징은 상단에 세 자루의 단창(短槍)이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방패로 인명을 살상할 수 있고, 유사시에는 단창을 빼내 따로 무기로 삼을 수도 있었다.
“아마 처음 볼 것이다. 천리장성을 지키는 고려의 장수들은 장방패를 주로 사용하지 수패를 드는 자는 극히 일부분이다.”
고려의 장방패는 평야에서 적의 화살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땅바닥에 고정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움직이며 화살을 막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진형을 구축할 수 있는 용도였던 것이다. 그것은 준경도 가끔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곡주에 방패를 만드는 장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방패는 성벽을 방어하는데도 유용하게 쓰였다. 매 2척의 거리마다 장방패 1개, 창 1개, 깃발 1개를 세운다고 군 운용 교리를 정해놓았을 정도였다. 이때도 장방패는 이동하며 화살을 막는 것이 아닌 성벽을 대용하는 고정 방어 수단이었다.
고려가 무겁고 불편한 장방패를 선호한 이유는 바로 고려군의 전투 방식에 있었다. 준경은 왕진과 고영창의 옛이야기에 깊게 빠져들었다.
“고려가 천하에 으뜸인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왕진이 묻자 준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몇 가지 생산품들을 떠올렸지만, 왕진은 아마도 군사적인 성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을 것이다. 장방패를 계속 논하던 중이었으니 응당 그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 여겼다.
“혹시 궁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맞다. 정확하게 말하면 궁과 궁술이다.”
현대에서 역사를 배우다 보면 한반도는 반만년의 역사 동안 수많은 외침을 당했다고 했다. 그중에 무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내륙이 침탈당하지 않은 드문 시기 중 하나가 바로 지금이었다.
지금으로부터 팔십여 년 전, 요나라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범했었다. 고려 역시 강조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30만 대군으로 방어에 나섰다. 첫 전투이자 가장 상징적인 전투였던 흥화진(興化鎭) 전투는 고려가 가진 장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거란이 월등한 기동력과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면 고려에게는 성을 통한 수성, 그 수성을 이루기 위한 질 좋은 각궁(角弓)을 대거 생산했다. 말 위에서 궁을 쏘는 것과 두 발로 땅을 지탱하고 쏘는 것은 정확성과 파괴력에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기에 고려군이 각궁을 보조할 장비로 장방패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거란군은 흥화진을 점령하여 서전을 장식하려고 했지만, 막상 전투에 들어가자 활의 유효 사거리에서도 거란이 뒤졌고, 명중률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고려는 송과 더불어 천하에서 으뜸가는 축성술을 가지고 있고, 각궁의 품질은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기에 그들은 한 달간이나 성벽에 근접하지도 못하고 주변을 배회해야만 했었다. 결국, 거란의 지휘관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배후를 지키고 주력은 우회로를 달려 고려의 총사령관이었던 강조와 일전을 결의하게 되지.”
정치 이야기보다 이런 이야기가 준경의 눈빛을 반짝이게 했다. 종일 들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였다.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우회했지만, 말을 달릴 수 있는 곳은 고려의 산성이 여지없이 자리하고 있었고, 피하고 또 피하여 결국 통주에서 거란 20만, 고려 30만, 합쳐 50만 대군이 맞붙었다.”
당시 고려로서도 짜낼 수 있는 여력을 모두 쥐어짠 결과로 패전은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진이 문득 준경에게 물었다.
“거란이나 여진의 기병이 전투하는 모습을 알고 있느냐?”
“그야 종심을 돌파하여 배후를 궤멸시키고 반전하여 포위섬멸하는 것이 아닙니까?”
유목 민족들의 전투 방식은 수백 년, 아니 근 일천 년간 항상 똑같았다. 알면서도 못 막는다는 말은 바로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만약 그 방법이 통용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그 방법을 계속 쓰고 있었을까?
“고려는 거란이 달리기 시작하자 장방패를 앞장세워 전면을 두텁게 쌓고, 뒤에서는 각궁으로 공격했다. 너무나 단순한 방법이었지만 결국 후퇴한 것은 거란이었다. 승기를 잡자 고려는 수패를 든 장수들을 선봉에 내세워 그들을 뒤쫓았다. 이쯤 되면 수패와 장방패의 역할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후의 역사는 이미 준경도 잘 알고 있었다. 거란은 일시적인 후퇴를 겪었지만, 기습을 감행하여 총대장 강조를 사로잡는 작전을 펼쳤다. 승전에 취해 거란의 파괴력을 소홀히 했던 강조가 사로잡히는 바람에 개경까지 일사천리로 길이 열려버렸다. 그러나 거란은 개경을 점령 한지 십일도 채 되지 않아 귀국을 결정해야 했다. 우회하며 후방에 남겨놓은 고려의 무수한 산성과 진들이 거란군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란은 기병만으로 고려를 상대하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거란군이 귀국했을 때는 총 40만의 병력 중 10만만이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당시 거란은 진군부터 퇴각까지 삼 개월의 짧은 시간을 고려땅에서 머물렀는데 그 때문에 미처 약탈과 수탈을 할 시간도 없었을 정도라고 했다.
“수패는 공격을 위한 방패다. 불시의 공격을 막고 적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존재하지. 창 또는 대도와 함께 쓸 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한다.”
비교적 공격 범위가 넓은 창과 대도를 피해 근접하는 적들은 수패로 밀어내거나 수패 상단에 꽂힌 세 개의 단창을 휘둘러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아주 단순한 동작의 연속이라 왕진이 단 한 번 시범을 보였음에도 준경은 금세 손놀림을 따라 할 수 있었다.
멀리서는 창으로 찌른다. 근접하는 공격은 수패로 막거나 수패에 꽂힌 단창으로 공격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전장에서는 동작이 간결할수록 좋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비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여봐서 알겠지만, 사람을 죽이기 위해 들여야 하는 힘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반만 찔러도 죽고 관통해도 죽는다면 반만 찔러 힘을 보존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래서 수벽타에서도 급소를 가르치지 않느냐? 전장에서는 멋을 찾는 순간 죽는다.”
군부를 대표하는 십팔반 병기 무예의 고수답게 왕진의 논리는 빠름과 간결로 함축할 수 있었다. 무기를 쓰는 이유도 왕진의 설명으로는 오로지 누군가를 빠르고 쉽게 죽이기 위해서였다. 준경은 격하게 공감하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주먹과 발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왜 병기를 드는가? 그것이 더 많이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틀의 시간이 금세 지나가 송의 사신이 귀국을 서두르자 왕진은 마지막으로 준경에게 충고를 남겼다.
“전장은 흐름이다. 비무는 한 명만을 쳐다보면 되지만 장수는 전장의 전체적인 맥을 알아야 한다. 지금이 나아갈 때인지 일시적으로 물러날 때인지, 병사들의 사기를 올릴 수 있을 것인지, 도저히 불가항력의 상황인지, 흐름을 놓치는 자는 뛰어난 무위를 가지고 있어도 금세 도태된다. 전장은 수천, 수만, 수십만에 이르는 생명이 생존을 위해 저마다의 강력한 염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일개인으로 그 염원을 누를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신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무신…….”
왕진은 전장의 진퇴를 논하기 위한 충고였지만 준경은 오히려 그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남았다. 어떤 상황도 초월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무신이라고 왕진은 밝힌 것이다.
왕진은 피식 웃었다.
불과 이틀, 그것도 두 시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를 접하는 준경의 자세는 순수한 열정 그 자체였다. 마치 자신이 어렸을 적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연무장에 섰던 그때의 기분이 되살아나 기꺼운 감정마저 들었었다.
“전장에 서는 장수는 크게 보자면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성으로 전장을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본능으로 판단할 것인가? 이성으로 전장을 판단하는 자를 우리는 지장이라 부를 것이고, 본능으로 전장에 임하는 자를 우리는 맹장이라 부를 것이다. 그 둘의 정점에 서는 자가 하나 있다. 나 역시 이르지 못한 자리이기도 하다.”
“지장과 맹장을 뛰어넘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굳이 따지자면 준경 자신은 맹장에 가까울 것이다. 제대로 된 전술 훈련을 받은 바도 없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그저 일개 병사처럼 무기를 들고 적을 공격하는 일뿐이었다. 아니 지금은 맹장을 붙이기에 부족했다. 강호초출 무인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명장이다.”
너무나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준경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역사는 숱한 과거의 명장을 후세가 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누군가는 뛰어난 무예가 있어 항상 선봉에 섰고, 누군가는 뛰어난 지략으로 눈부신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를 초월하자 어떤 방법으로도 막기 어려운 명장이 되었다.
“알겠느냐? 내가 아버님에게 배운 진리가 그것이었다. 앞으로 누군가 너에게 충고할 것이다. 그러나 너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너 자신이다. 네가 선택한 길을 남과 비교하지 마라. 전장에서 너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이 배경도 핏줄도 아닌 네 실력인 것을 항상 잊지 마라.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왕진은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언제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남기지 않았다. 만약 다시 만난다면 그것 역시 인연일 것이다. 고영창이 준경에게 다가와 말했다.
“정한 데로 이루어지는 법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세상이다. 어려울 것을 알면서도 낱알 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증거가 되겠지. 참 마음이란 간사하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막상 마음을 정한 동기를 살펴보면 모순처럼 감정에 따른 결과가 많기 때문이다.”
고영창의 옆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준경은 그의 어깨에 걸린 부담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송의 사신단이 떠나고 하루가 지나자 고려의 사신단도 떠날 준비를 하였다. 고영창은 동경 일백 리까지 배웅을 한 뒤에야 헤어졌다.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그는 준경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선택에 맡기겠다고 했지.’
고영창이 한 마디라도 도와달라는 말을 했었다면 준경은 기꺼이 고려를 버리고 고영창을 도울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고영창은 끝까지 그 선택을 준경에게 일임했다. 준경으로서는 고민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준경은 등에 메고 있는 수패를 어루만졌다. 개경으로 돌아가면 고의화를 졸라 본격적으로 수련에 임할 작정이었다. 그러다 보면 고민도 풀리리라 생각했다.
개경에 도착한 것은 11월 초였다.
그 사이 수많은 권력 재편이 이루어져 있었다. 이자의의 난에 연루된 인사들의 처리가 마무리되었고, 빈자리를 숙종의 지지자들로 빈틈없이 메웠다. 이제는 열 명의 이자의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숙종을 몰아낼 수 없는 강력한 기반이 구축된 것이다.
고려사에는 당시의 승진 열풍을 등급을 뛰어넘어 벼슬자리에 오른 자가 수백 명이었고, 그중에는 공인(工人), 상인(商人), 조예(??, 관청 노비)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인사였다고 적었다. 그 와중에 이자의의 난을 진압하는데 한몫했던 상장군 왕국모(王國?)가 노환으로 세상을 뜨기도 했다. 왕국모의 타계로 중앙군 역시 승진 열풍이 불었던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조선과 비교하면 원체 실직(實職)이 적어 허직(虛職)을 숱하게 두어야 했던 고려였기에 이런 승진 열풍은 누적된 인사 적체를 풀고 관리들의 불만을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자연히 숙종의 왕권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더해 요나라에 갔던 사신단이 올해 요로 보내야 할 공물 양을 반이나 줄이고, 왕위 승계에도 긍정적인 대답을 받아 오자 조정은 한껏 들떠 있었다. 송으로 보낼 지례사를 요보다 2년 늦게 보내는 문제로 시비가 일긴 했지만, 숙종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여 사신단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다녀왔어.”
준경은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치 일 년을 떠나있었던 것 같은 변화를 직감했다. 일개 추밀원 별가의 사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화려하게 단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건 인력(人力)으로 꾸밀 수준이 아니었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이소가 말없이 서신 하나를 내밀었다. 준경은 간단한 문장을 읽을 수 있었지만 어려운 한자는 읽지 못했다. 이소에게 읽어달라고 청하자 이소는 조금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서신의 내용을 말해주었다.
“작은 종숙(從叔, 이자겸)께서 인주 이씨를 대신해 보내신 서신이에요. 지금은 집안의 사정이 좋지 않아 마음 놓고 풀어줄 수는 없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저를 상전 모시듯 받들래요. 안 그러면 나중에 반드시 험한 꼴을 보리라고 적혀 있네요.”
준경은 자신이 떠난 사이에 인주 이씨가 이곳을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소가 얄미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살짝 약이 오르기도 했다.
준경은 백설같이 하얀 이소의 양볼을 잡아당겼다.
“아! 아아아!”
잠시 잡아당겼을 뿐인데 두 볼이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이소는 눈물 한 방울을 찔끔 보이며 양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모습이 매우 앙증맞아 내심 준경도 귀엽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작은 종숙인지 뭔지, 가고 싶다면 보내주마. 이제 든든한 작은 종숙도 생겼겠다, 자매는 두고 혼자 갈 수 있겠네.”
“뭐에요! 불한당 같으니라고, 자매 언니를 혼자 두고 떠나면 무슨 음흉한 짓을 하려고!”
앙증맞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때리는 이소의 행동이 귀엽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집에 온 준경은 피곤하기만 했다. 진한 하품과 함께 어기적어기적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소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소의 성장 과정을 짐작한 준경으로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욕심 많은 들개보다는 그래도 눈치 없는 곰이 낫겠지.”
인주 이씨로 다시 들어가 봤자 이소의 방패막이가 그나마 되어줄 만한 할아버지, 이자위가 저 멀리 남해로 기약없는 귀양을 떠난 마당에 잘 쳐줘 봐야 명문가를 연결하기 위한 정략결혼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차라리 자매와 함께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행복할지도 몰랐다.
“뭐 나도 가슴 밋밋한 꼬맹이 따위는 관심도 없고 말이야.”
준경은 대자로 누워 눈을 감았다. 어느새 수마가 밀려왔지만, 입가에는 한 가닥 미소가 감돌았다. 처음 보았을 때 차갑게 느껴졌던 이소가 지금은 왠지 또래의 소녀처럼 느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