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2) 청풍양수(淸風兩袖) =========================================================================
그렇게 조회가 끝나자 관사로 향하는 윤관과 임의는 죽다 살아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를 말렸던 탓일까? 차를 나누는 자리에서 준경을 호되게 질책했다.
“일개 추밀원 별가가 감히 천자에게 꼿꼿이 서서 이야기한 무례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천자께서 불사(佛事)에 관심을 보이며 너그러워지지 않으셨다면 우리 모두의 목이 잘려도 이상할 것이 없었단 말이다. 너를 대동한 것은 위태로운 기개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네놈의 손과 발을 쓰고자 했던 것이다.”
준경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종9품의 별가가 감히 황제에게 실수를 인정하라고 대든 상황이었기에 급한 성격의 황제였다면 당장에 목을 쳤을 것이고, 고려는 어떤 식으로든 실수를 책임져야 했을 것이다.
차가 식을 때까지 임의가 나무라자 윤관이 준경의 편을 들었다.
“그래도 일이 잘 풀려 다행입니다. 황제가 서하의 처리를 흉중에 담고 있었던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원래 종9품의 추밀원 별가라면 황제를 배알하는 자리에 불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요는 수렵 민족이 지배층이었다. 송에 비해 격식에서 자유로워 어전에서 갑자기 무예를 겨루는 예도 있었다. 비근한 예로 여진이 세운 금과 청을 보면 알 수 있다. 황제는 종9품의 말단 관리까지 일일이 임명장을 수여하고 접견을 하여 충성심을 가늠하였고, 외국의 사신은 그 자리에 없는 최하급자라도 그 능력을 살펴 뛰어나다면 포섭도 했다.
조선의 예를 보더라도 품계에 따라 왕과 마주할 수 있는 거리가 달라질지언정 종9품 최하급까지도 품계석(品階石)을 두어 미리 자리를 정해두었다.
오늘도 그런 예법에 따라 준경은 윤관, 임의보다 맨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윤관과 임의가 준경을 조기에 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군께서 즉위하기 전에 온 나라에 경로(敬老) 잔치를 벌여 민심을 모으고 싶다고 하셨지. 선왕(先王)들이 그 효과를 톡톡히 본 전례가 있기에 한시라도 열고 싶었지만, 재원을 마련할 길이 없어 그저 마음으로만 품고 있었는데 이제 그 재원이 마련되었으니 주군께서 크게 기뻐하시겠구나. 그것만 따지자면 너의 공이 적지 않으나 오늘 일련의 사건들은 황제의 흉중이 작용한 것이라 공을 따질 수가 없다. 그것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혹여 준경이 엉뚱한 불만을 느낄까 싶어 윤관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윤관의 말대로였다. 황제가 이미 서하의 일을 처리할 생각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면 준경의 객기는 개인적으로나 고려에게 있어서나 너무나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래도 서하에서 이름난 장수를 단숨에 처리한 것이 아국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제 허물을 더 묻지 않을 것이니 오늘은 건너가 쉬도록 해라.”
윤관이 축객령을 내리자 준경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고는 밖으로 빠져나왔다.
임의는 식은 차를 들이켜며 말했다.
“송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그것이 걱정이오.”
“황제가 의도한 것이니 우리로서도 별수가 있습니까? 송의 사신도 한 자리에 있었으니 우리의 처지를 잘 대변해주기를 바랄 수밖에요.”
“그럴 위인으로 보이지 않아 더 걱정이오. 혹여 송이 황제를 부추겨 빠른 입조를 요청하기라도 하면 요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요나라로서는 앞에서는 자신들에게 굽실대며 뒤로는 송과 더 친하게 지내는 고려가 못내 껄끄러웠을 것이다. 아무리 요가 고려보다 강한 것이 사실이더라도 언제든지 자신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길 힘이 존재했다.
고려가 건국 후 지금까지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를 제외하고는 내륙이 전쟁 피해를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주군께서는 현명한 분이시고 아직 당면한 문제는 아니니 시간을 두고 고민을 해봐야겠습니다.”
식어 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켜며 윤관이 내린 결론이었다. 숙종과 동년배인 윤관과 오연총은 젊은 시절부터 숙종의 북벌론에 감화하여 수족이 되었었다. 강단도 있지만, 사리분별에 따라 머리를 숙이는 것도 기꺼이 하는 것이 숙종이었기에 일단은 시간을 두고 송의 반응을 지켜보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달이 중천에 뜬 자정이 되자 준경은 약속대로 관사의 뒤편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고영창과 함께 또 다른 한 명의 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살피니 초록색 무복을 걸치고 있는 중년으로 그 눈매가 실로 날카로웠다.
“준경입니다.”
두 손을 모아 자신을 소개하자 초록색 무복의 중년이 반응했다.
“나는 송의 왕진(王進)이라고 한다.”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목적으로 송에서 파견된 자 같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고영창 못지않게 강해 보였다.
“오늘 어전에서 실력을 잘 보았다. 고 공봉이 자랑할 만하더군. 그러나 아직 힘 배분이 익숙지 않아 방어에 능한 자를 만나면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준경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자의의 난에서 활약한 것과 오늘 어전에서 양을포를 상대한 것이 우연히도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인물들을 만났던 것이 아닌가 했다. 자신을 신출내기로 여긴 적들의 방심이 행운이었다. 만약 자신의 명성이 점차 높아지면 상대는 신중하게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신중함을 뛰어넘는 더 강한 일격이 필요하게 된다. 아직 자신은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있느냐?”
“창이나 검, 도라면 그럭저럭 씁니다.”
“그럭저럭?”
왕진의 입매가 올라갔다. 고영창은 자신이 들고 있던 창을 준경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준경이 받아들자 왕진은 창을 겨누며 말했다.
“어디 잠시 놀아보자.”
준경은 고영창을 잠시 바라보며 왜 이 같은 일이 벌어지는지 눈빛으로 이유를 물었지만, 고영창은 그저 담담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의아했지만 강자와의 대결은 준경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어전에서 아구다라는 강자를 만났던 것 이상으로 왕진이라는 중년 무인에게서도 상승(常勝)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차앗!”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준경이었다. 준비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창을 뻗어내며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왕진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가슴을 향해 난폭하게 돌진하는 준경의 창 위로 원을 그리더니 살며시 자신의 창대와 준경의 창대를 겹쳤다.
“크윽!”
창대를 잡고 있는 준경의 손아귀에 강한 압력이 전달되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창대가 돌며 손바닥에서 이탈하려고 했던 것이다.
힘으로 누르며 공격을 관철하려 했다. 그러나 왕진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여전히 준경의 창대 주변을 자신의 창대로 나선을 그렸다. 물기를 털기 위해 빨래를 쥐어짜는 것처럼 준경의 손바닥에서 억눌러져 있던 창대가 조금씩 그 회전이 빨라지면서 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기로 끝까지 겨루기로 한 것이 아니었다.’
준경은 창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맹렬하게 회전하며 허공으로 창이 날아오르자 재빨리 땅을 박차고 왕진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수벽타는 근접 박투(搏鬪)에 관해서는 다른 무예들에 비해 상당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창은 근거리에 매우 취약한 병기였다.
잔뜩 몸을 웅크리고 왕진의 가슴팍으로 파고든 준경은 왕진의 턱을 노리고 아래에서 위로 팔꿈치로 빠르게 공격했다. 근접공격에서 무릎과 팔꿈치를 이용한 공격은 그 어떤 신체부위보다도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엇?”
회심의 팔꿈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왕진의 턱을 비켜가며 허공을 갈랐다. 왕진이 피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왕진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준경이 팔꿈치 공격을 감행하는 그 순간 창으로 미처 방비할 수 없었던 왕진은 자신의 오른발로 준경의 왼발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가볍게 밀었다.
준경 자신이 양을포를 상대했던 방법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균형이 무너지자 팔꿈치가 허공을 갈랐고, 그 반동으로 자신은 뒤로 넘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넘어지자 재빨리 일어서려 했지만, 어느새 준경의 코앞에는 날카로운 창끝이 달빛을 머금고 번들거리고 있었다.
준경은 패배를 자인해야 했다.
“졌습니다.”
“병기를 버릴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다. 마음가짐은 칭찬해주마.”
창끝을 거두며 왕진이 말했다. 준경이 주섬주섬 일어나자 그는 창을 든 채 뒷짐을 쥐며 말했다.
“나를 다시 소개하마, 나는 동경금군교두(東京禁軍敎頭) 왕진이란 사람이다.”
자신이 잘못들은 것은 아닌가, 일순 착각할 정도였다. 동경은 송의 수도 개봉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곳의 금군은 곧 황제의 친위군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런 금군의 교두라는 것은 송에서 손꼽히는 무예의 달인임을 인증하는 것과 같았다. 금군교두는 보통 십팔반(十八般) 병기(兵器)에 맞추어 그 숫자만큼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네 녀석이 견식이 있었다면 이미 그 정체를 짐작했을 것이다. 송의 무관 중 초록색 무복을 입은 자들은 교두를 뜻한다.”
고영창이 말했다. 그 뒤를 왕진이 받았다.
“내가 창을 들었다고 해서 창만을 가르치는 교두는 아니다. 십팔반 병기에 두루 능통한 편이지만 고 공봉이 너에게 가르치길 원한 것은 패(牌)다.”
하나에 제대로 익숙하기도 어려운 십팔반 병기에 능통하다니 준경은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경은 고려에서 방패를 따로 떼어내 무예의 한 방편으로 활용하는 경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방패는 공격에 성공하기 전까지 자신이 입을 피해를 줄이려는 보조적인 병기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우리 송은 오랫동안 외세와 싸워왔다. 침략이 아닌 방어를 위한 전쟁이었기에 방어를 위한 갖가지 방편들이 만들어졌지. 패술(牌術)도 그 방편 중 하나였다.”
“준경, 너를 이 자리에 부른 이유가 바로 왕 교두와의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서다. 네가 구사하는 수벽타는 근접 공격에서 가장 뛰어난 파괴력을 보이지만, 파괴력이 승부를 낼 수 있는 모든 것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때론 일격을 참아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준경은 문득 고영창의 호의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궁금했다. 정말 순수한 호의로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제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준경의 질문에 고영창은 저 멀리 중천에 떠오른 달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왜 요의 공봉관이 되었는지 아느냐?”
“알지 못합니다.”
“발해 유민을 하나로 모으고자 함이었다.”
발해의 유민을 요에 복속시키기 위해 왕족인 대씨와 귀족층인 고씨를 이용하여 포섭에 나서는 것을 이미 들어 잘 알고 있는 준경이었다. 그러나 고영창의 입에서 연이어 흘러나온 말은 충격이었다.
“요를 무너트리고 고구려와 발해를 잇는 나라를 다시 세우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내가 요의 출사 제안을 받고 고민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대업을 이룰 수 있는 인재인가, 아닌가?”
요의 출사 제의를 받은 직후부터 고영창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비록 선조의 유산과 고귀한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험난한 길임을 잘 알고 있었다. 숱하게 일어난 부흥 운동이 전부 실패로 돌아간 것도 그들이 못나서였는가? 아니었다. 하나같이 고귀한 핏줄과 명분을 등에 업고 강고한 지지 속에 출발했지만, 천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뿐인가? 아직도 부흥을 노리는 수많은 경쟁자가 호시탐탐 때를 노리고 있었다. 경쟁자가 많을수록 결집할 힘은 한계가 있기에 오랜 시간 숙고해야 했다. 그 고민을 털고 마침내 자신의 천운을 믿어보기로 한 것이 준경과 처음 만났던 그때였다.
“수벽타도 여러 계보가 전해진다. 내가 배운 것이 정통인지 아닌지도 이제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유산을 남기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왜 하필 그것이 저였습니까?”
“모르겠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마음을 굳히고 천리장성을 넘으려던 차에 어설프게 수벽타를 수련하고 있던 너를 발견했던 것이겠지.”
준경은 왕진과 고영창이 함께 있는 이유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고영창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송으로서는 매우 기꺼운 상황이었다. 그의 가벼운 부탁 한둘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왕진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앞으로 삼일 뒤면 사신단은 귀국하게 된다. 앞으로 이틀 동안 자정에 이곳으로 나오너라. 고 공봉과 약조한 데로 나는 너에게 패술을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준경은 왕진에게 대꾸하지 않고 오직 고영창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대업에 동참하길 바라십니까?”
고영창 역시 준경을 뚫어지도록 쳐다보며 말했다.
“가끔 생각해봤다. 한 사람이 절대적인 무예를 손에 넣는다면 그는 천하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너보다 강하지만 거란 기병 일백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동조자를 모으고 세력을 모으는 것이지. 이미 나는 마흔이 넘어 무언가를 새로 익히기에는 늦은 나이다. 나는 그저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었다. 선택은 네 몫이다.”
“제게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준경의 질문에 고영창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내가 답해줄 수가 없구나. 너 자신에게 물어보아라.”
가능성은 무지(無知)에서 생긴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기에 가능성 있는 일로만 여겼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거나 존재하게 되었을 때야 우리는 현실이라고 칭한다. 그래서 증명하지 못하는 난제는 역설적으로 언젠가 증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붙는다.
준경에게 있어 가능성은 꿈과 같은 것이었다. 꿈을 이루어낸다면 그것이 현실이지만, 꿈이 꿈으로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가능성이란 꼬리표를 달고 다닐 수밖에 없다.
준경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했던 수벽타 수련을 떠올려 보았다. 단내가 나도록 괴로웠지만 하고 싶지 않아서 포기하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포기하지 않았던 원천을 생각해보았다.
“그냥 하루하루 강해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것이 고영창이 본 준경의 가능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