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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3화 (1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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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풍양수(淸風兩袖)

보고를 마친 아구다는 준경을 힐끔 쳐다보고는 뒤로 물러났다. 호기심을 이끌 수는 있었지만 오래도록 관심을 두기에는 아직 준경의 양팔에 걸린 무게가 보이지 않았다.

아구다가 물러나자 도종이 일어섰다.

천자가 일어서자 어전의 공기는 단숨에 무거워졌다. 그 기세는 준경에게도 느껴졌다. 항거할 수 없는 거인을 마주친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까?

“서하의 어린 왕이 숙부인 양을포와 그의 여동생 양태후에게 권력을 맡기고 있는 것을 이미 짐은 알고 있었다. 양을포가 송나라를 치려는 까닭이 종국에는 대요(大遼, 요나라를 높임)를 노리고 있음을 모르리라 생각했는가?”

도종의 말에 삼국 사신들의 얼굴색이 급변했다. 특히 서하 사신들은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도종은 이미 서하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서하는 현재 두 세력으로 나누어져 권력 다툼이 한창이었다. 한 무리는 불과 3살에 보위에 오른 숭종(崇宗) 이건순(李乾順)과 모후인 소간황후 양씨로 대외정책에서 온건파에 속해 있었다. 다른 무리는 서하의 병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양을포와 그의 여동생으로 양태후라고 불렸다. 소간황후와 양태후는 고모와 조카 사이로 양을포 역시 소간황후에게는 조카가 되었다. 지나친 권력욕이 친족을 갈라놓은 것이다.

“삼 년 전에 짐은 이미 알았다. 지난 6년간 병마(兵馬)를 모아 양을포가 대대적으로 송을 치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짐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전쟁을 일으키는 것? 아니다.”

오늘따라 송의 채경은 감정의 기복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한마디에 송의 국운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그 결론이 다 내려지지 않은 것이 못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왕이 어리다 하여 친인척이 날뛰는 것은 짐이 가장 경멸하는 짓이다.”

양을포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준경이 움직이지 않았더라도 도종은 양을포가 사신으로 온 것을 보고 무슨 핑계를 대서든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도종 역시 젊은 나이에 보위에 올라 사십 년간 다사다난한 일을 경험했다. 보위를 놓고 골육상쟁도 겪었고, 간신의 말을 중용하는 바람에 장남을 죽게 내버려두었다. 비록 그 간신은 죽고 손자를 태자에 올렸지만, 그때의 기억들은 도종에게 상처로 남아 있었다.

3살에 보위에 오른 서하의 어린 왕은 세월이 흘러 현재 12살로 여전히 어린 나이였지만 성군이라는 소리가 자자할 정도로 인품이 뛰어나다고 하여 도종은 일찌감치 그를 손녀사위로 삼고 힘을 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 선택에는 또 하나의 정치적인 이유도 숨어 있었다.

“내 친히 아구다를 보내 양태후를 처리하도록 하고 서하의 병권을 어린 왕에게 돌려주겠다. 그러니 그대들이 역신들에게 안내하여 공을 세우도록 하라.”

서하의 사신단은 양을포의 측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도종이 제의를 던진 것은 그들이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무조건 수락할 수밖에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신단의 숫자는 많았다. 충성을 맹세한 자만 추려도 길잡이로 충분했다.

서하 사신단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거부하면 오직 죽음뿐이었다.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충성을 이야기하자 도종은 아구다를 불렀다.

“석 달을 주겠다. 토번과 바이갈(Baigal)의 상황을 알아오너라.”

그제야 송과 고려의 사신들은 도종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서하의 왕권을 어린 왕에게 돌려주고 한창 서쪽과 북방에서 떠오르고 있는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바이갈은 바이칼 호수 인근에 거주하는 몽골족을 가리켰다. 같은 유목민족이지만 정주(定住)하기 시작한 거란과 달리 거친 야만 습속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점차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명을 받은 아구다와 서하의 사신단은 어전을 빠져나갔다. 준경은 저도 모르게 아구다의 모습을 쫓으며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아구다 역시 시선을 느꼈는지 준경을 바라보았다. 아구다는 검지를 들어 아래를 가리키더니 이내 허공을 가리키고 어전을 빠져나갔다.

‘아직 넌 내 밑이다. 그러니 올라와라. 상대해주겠다.’

준경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역시 세상에는 강자가 많았다.

준경은 아구다에게 신경을 써서 몰랐지만, 도종의 이번 조치는 역사에 기록된 것이었다. 청나라 필원(畢沅)이 저술한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에는 권신 양을포가 어린 임금을 무시하고 권력을 독차지하여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적었고, 요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양태후 일파를 제거하자 그제야 왕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서하 최고의 명군이자 무려 50년간 제위(帝位)에 있었던 숭종이 날개를 단 것이다. 그는 요, 송과 친선을 강화하고 서쪽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내치도 훌륭하게 치러낸 덕분에 형편없었던 송의 황제들과 재위(在位) 내내 비교되었다.

“준경이라 했느냐?”

“네.”

도종의 목소리는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골치 아픈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된 것이 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윤관과 임의는 드러난 도종의 속셈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차후 이런 일이 고려에도 적용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보위에 오른 숙종을 가리켜 조카를 내치고 보위에 오른 자라고 도종이 추궁한다면 어찌 변명해야 할 것인지 진땀을 흘리며 생각해내야 했다.

“너는 사나이를 사나이답지 못하게 만든다고 짐을 탓했다. 네가 말하는 사나이란 무엇이냐?”

“지키는 자입니다.”

“지킨다? 무엇을 말이냐?”

“긍지를 지키고, 약속을 지키고, 의리를 지키며, 약자를 지킵니다. 마지막으로.”

고려 사신단은 준경이 이번에는 말실수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어전에서 겪은 일만 해도 가슴이 몇 번을 내려앉았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때 도종은 보았다. 준경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진실을 지킵니다.”

도종은 어좌(御座)의 팔꿈치에 팔을 기대며 턱을 받쳤다. 백설처럼 하얀 수염을 매만지던 그는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자신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대대로 조상에게서 내려온 경구(警句)였지. 너의 말은 그것과 비슷하구나. 그리고 일견 가슴에 와 닿는다. 짐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가?”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짐이 들어주겠다.”

예의상 거절할 줄 알았던 고려 사신단으로서는 다시 숨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이미 황제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뜻을 밝힌 상황이었다. 벼슬이나 재물을 원한다면 그나마 나았지만 터무니없는 소원이라도 말한다면 기껏 얻은 천자의 호의를 잃어버리는 결과일 것이다.

“저를 포함한 고려의 사신단은 사나이들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고려의 사신단 전부를 사나이라고 인정해달라는 요구였다. 일견 그것이 무슨 요구인가 할 수 있었지만 처음 고려의 선위 소식을 접하고는 일부러 애를 태운 것이 지금까지 이른 것이 아닌가? 사나이라고 인정한다면 긍지를 지킬 수 있도록 앞으로 같은 일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고, 만약 사나이가 아니라고 한다면 천자를 접견하는 사신들이 졸지에 부적격적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이었다.

“정말 그것뿐이냐?”

도종이 되묻자 준경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창칼을 들고 싸울지언정 수십 번을 무릎 꿇어가며 사나이의 긍지를 무너트리는 일은 죽어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충성에 대한 시험이라고 생각한다면 천자로서는 너무나 치졸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도종은 준경의 표정이 굳건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려의 사신단은 듣거라.”

“하명 기다립니다.”

임의와 윤관이 재빨리 앞으로 나가 부복했다.

“올해 하정(賀正)이 불과 한 달 뒤다. 공물은 준비하였는가?”

공물은 단순히 주는 것을 떠나 답례품을 받는 공무역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일 년 중 11월에 요를 방문하여 공물을 전하고 답례품을 받는 것을 하정이라 했다. 솔직하게 셈하자면 공물이 답례품보다 많았다. 현재까지는 무리할 정도의 공물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라 고려로서는 평화를 위한 세금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미 준비를 끝마치고 출발만 기다리고 있나이다.”

선위는 특별한 경우였으니 정기적인 사은(謝恩) 행렬이 아니었다. 하정이 불과 한 달 남았지만 그렇다고 선위 같은 중대사에 하정을 끼워 넣어 불필요한 말을 듣는 것보다 비용은 들더라도 예법대로 처리하는 것이 편했다.

“전(前) 왕의 축일(祝日)은 12월이 아니었던가?”

“맞습니다.”

요가 고려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패한 적도 많았다. 결코,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기에 강온양면으로 달래고 얼렀다. 그중 하나가 고려 왕의 생신 때마다 축하 사절과 선물을 보내는 일이었다. 문제는 고려 왕 역시 답례를 해야 하기에 사신이 또 요나라를 방문해야 했다. 그래도 요가 신경을 써준다는 말이었기에 칙사는 항상 극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었다.

“공물은 지난해의 반으로 하겠다.”

윤관의 입이 벌어졌다. 공물을 줄인다고 하여 답례품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조정의 한 해 재정 중 일 할 정도가 공물로 빠지는 비용임을 생각하면 올해는 재정 부담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남는 공물을 사용해 숙종이 생색을 내기에도 좋았다. 도종이 인심을 크게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 왕이 병약하여 오늘내일 하고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이번 축일이 마지막이 될지 모를 터, 태주(泰州, 평안북도 태천) 관찰사 유직(劉直)을 보내겠다. 지례사(持禮使)는 즉위식을 치르고 난 후, 좋은 날을 잡아 보내도록 하겠다. 고려의 입장은 어떠한가?”

“천자의 은혜에 황공무지(惶恐無地) 할 따름입니다.”

임의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기쁨에 겨워 몸을 떨고 있었다. 헌종을 가리켜 전 왕으로 불렀다는 것은 이미 선위를 수락한 것과 같은 말이었다. 축일을 맞이해 태주 관찰사를 보내겠다는 말도 의미심장했다. 태주는 현재 고려와 요가 반분하고 있는 땅으로 천리장성이 지나고 있었다. 국경을 지키는 최일선의 지휘관을 사신으로 보낸다는 것은 침략할 뜻이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밝히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례사에 대한 것도 앞서 전 왕을 언급한 것과 같은 의미였다.

“단.”

어전이 아니었다면 윤관과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이라도 흘렸을 임의였지만 도종의 말미(末尾)에 다시 긴장하고 말았다.

“전례를 보면 고려는 송에도 지례사를 보낼 것이다. 대요가 송과 같은 해에 지례사를 주고받는다면 짐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요랑 송을 동급으로 보지 말라는 도종의 요구였다. 생각보다 과한 요구는 아니어서 임의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송이 쇠락하면서 일 년의 시차를 두고 즉위 사실을 알리는 전례가 이미 있었다. 송의 사신, 채경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것이 현실인지라 잠자코 있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한해 늦추어 지례사를 보내겠나이다.”

그러나 도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2년이다. 2년 뒤에 지례사를 보낼 것을 명한다.”

송의 사신도 고려의 사신도 안색이 흐려졌다. 2년이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만일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생각해 지례사를 일찍 파견한다면 요는 고려를 칠 수 있는 명분을 잡게 된다. 요와 마찬가지로 천자국을 자칭하는 송의 입장에서는 고려를 닦달하게 될 것이고 점차 불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

준경은 도종을 하루 보았을 뿐이지만 정치의 세계란 참으로 오묘하다고 생각했다. 허투루 내뱉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폐하, 아국의 사정을 헤아려주소서.”

고려 왕이 새로 즉위한 사실쯤은 상인들을 통해 먼저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공식적인 사신을 통하는 것과 소문으로 듣는 것은 위신의 문제였다. 송의 채경은 이대로 송으로 돌아가면 치도곤을 당할 것임을 깨달았다.

“사정은 이미 충분히 헤아려주고 있다. 짐이 남경(북경)으로 도성을 옮기지 않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자한 그의 표정에서 단호한 기운이 번졌다. 채경은 새삼 준경이 원망스러웠다. 고려의 어린 무관 하나가 예법도 모르고 나선 덕분에 자신을 구렁텅이로 빠트린 것이다.

현재 송의 권력 다툼도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왕안석이 옛 민의 율가를 수정적용한 신법(新法)을 내세우며 송을 개혁하려고 했지만, 기존 당과 송의 정치 체제를 옹호하는 구법(舊法)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극한 반발 속에 개혁이 실패하고 신법당(新法黨)에 속한 인사들은 한동안 시련을 겪었다.

채경은 처음에는 신법당이 득세하자 일찌감치 가담하여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사마광이 이끄는 구법당(舊法黨)이 정권을 잡자 구법당으로 전향했다. 그러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철종이 성인이 되면서 신법을 옹호하자 또 상황이 반전되었다. 채경은 다시 신법당으로 향했고, 양측에서 갖은 비난을 받고 있었다. 특히 아우인 채변이 신법당의 중심인물이었기에 동생과도 사이가 틀어져 있어 정치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채경에게 다행인 것은 도종이 당분간 남경으로 도성을 옮기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했다는 것이었다. 서하와 요가 한동안 잠잠할 것이 확실하다면 자신은 사신으로서 공을 세운 것이었다. 어부지리로 얻은 공이지만 그는 공보다 과가 너무나 아쉬웠다. 준경을 보는 그의 눈은 표독스럽게 빛났다.

============================ 작품 후기 ============================

이미 눈치채신분도 있겠지만 수호지와 동시대라 이야기가 연동될 것입니다. 픽션과 넌픽션의 조화를 통해 영웅문과 같은 형태로 써보는 것이 목표입니다. 긴 호흡을 갖고 쓰는 글이니 만큼 느긋하게 글을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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