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1) 잠룡개안(潛龍開眼) =========================================================================
“젊은 아이가 꽤 기세가 좋구나.”
도종의 치세는 일견 성군의 길을 답습했지만, 간신을 중용한 것이 요나라의 기둥을 뿌리째부터 썩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간신의 전횡을 뒤늦게 눈치채고 13년 전, 발본색원을 단행했지만, 아직 그때의 여파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도 도종 즉위 초기에 비하면 조금 나아진 상황이었다.
간신을 처단하고 십 년 넘는 세월은 겉으로는 대단히 평화로운 세월이었다. 말년에 인생무상을 느꼈는지 불교에 심취하면서 사찰 건립과 보시(普施)에 힘을 썼기 때문이다.
이빨 빠진 송나라와 칭신을 맹세한 고려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칼을 들이대던 서하(西夏)도 간신을 쫓아낸 후에 잠시 혜안을 되찾은 도종의 결단으로 화친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그런 상태니 도종의 언행에 바짝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었다. 윤관과 임의는 입이 바싹 말라옴을 느꼈다.
“수십 년간 고려의 사신을 해마다 만났지만, 오늘과 같은 일은 처음이다. 천자에게 예를 청하는 것이 그리 불만이더냐?”
“예를 청하는 것이 불만이 아니라 사내를 사내답지 못하게 만드니 그것이 불만입니다.”
준경이 거침없이 입을 열자 임의는 혼절 직전까지 갔다. 쓰러지려는 그를 윤관이 잡았을 정도였다.
도종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문치를 지향하는 그였지만 핏줄은 기마민족의 후예였다. 오랜만에 기개를 가진 젊은이를 본 것이 진영을 떠나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감상이었다. 천자의 체통은 다른 것이었다.
“서하와 송의 사신도 배석(陪席)했는가?”
그러자 요나라의 관복과는 다른 복장의 인물들이 금세 앞으로 나와 고개를 조아렸다. 윤관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하와 송의 사신까지 한 자리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하의 양을포(梁乙逋) 천자의 명을 받자옵나이다.”
“송의 채경(蔡京)이 명을 기다립니다.”
서하와 송은 현재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서하가 송을 두들기면 송은 방어에 전념하는 형국이었는데 그러다 송의 국경 지역에서 재물을 빼앗고 성을 몇 개 점령하면 원상복구를 조건으로 공물을 요구했다. 송나라는 서하의 요구 조건을 들어보고 공물의 양이 적당하다 싶으면 화친 요구를 받아들였고, 과하다 싶으면 전쟁을 택했다.
서하가 요와 화친을 선택하면서 송나라에 전력을 쏟을 수 있게 되었고, 그 행패가 날로 심해지자 송의 철종은 채경을 사신으로 삼아 요나라에 중재를 요청한 것이다. 서하로서는 짭짤한 이득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중재를 막기 위해 강경 주전파 양을포를 사신으로 파견했다.
사실 이런 서하의 행패는 요나라가 과거 송나라에게 저질렀던 일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막대한 공물로 결국 요나라의 힘은 강성해졌고, 송나라는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했지만 이제 서하와 요나라 두 곳에 공물을 뜯기는 상황이 되니 송나라의 인내도 한도에 다다랐다.
“서하는 송의 요구를 듣지 말 것을 짐에게 청했고, 송은 서하의 욕심을 물리쳐달라고 청했다. 둘 다 평화를 지키라고 한다면 서하는 불만일 것이고, 둘이 알아서 하라고 한다면 송이 불만일 것이다. 무엇을 해도 불만이라면 나는 고려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리치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간신히 질문을 던진 이는 서하의 양을포였다. 고려가 요에 칭신을 하고 있었지만, 송에게도 칭신을 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흔 중반으로 보이는 선비풍의 관료, 송의 채경은 여유를 되찾았다. 고려가 송을 버리고 서하를 선택할 가능성은 일 푼도 없었다.
준경은 일련의 과정에 아무 생각도 없었다. 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다만, 송의 채경을 보며 마른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것 같은 불쾌감이 전해져왔다. 실제로 그는 유능한 관료였지만 권력욕이 많아 실세에게 빌붙으며 출세를 한 경우였다.
준경은 모르겠지만, 수호지의 시대가 아주 가까운 미래였다. 저마다 사연 있는 무뢰배들이 간신 고구를 상대하는 소설 내용에서도 고구와 동급으로 사대 간신에 꼽힌 이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채경이었다.
“젊은이가 어전에서 짐과 시선을 마주치는 기개를 보였다. 그러나 고려의 사신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례를 물어 죽음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디 기개만큼이나 실력도 좋은지 보자꾸나.”
“그 말씀은?”
양을포와 채경의 안색이 삽시간에 반전되었다. 도종의 말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저 젊은 고려 무사를 상대로 이기는 자의 손을 들어주겠다는 뜻이었다.
“단 그대들이 나서야 한다. 먼저 나선 자가 이긴다면 그에게 우선권을 주겠다.”
쐐기를 박는 도종의 말에 채경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문사 출신인 자신이 군관과 겨룬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일백의 서하 기병을 막지 못해 삼천의 송군이 전멸당한 사건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요와 국경을 마주하고 여진과 매일같이 국지전을 치르고 있는 고려의 장수를 이길 가능성은 만에 하나도 없었다.
반면에 양을포는 자신감에 가득 찼다. 그는 서하에서 무예가 뛰어나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자였다. 아무리 뱃속부터 무예를 익혔다고 해도 고작 고려의 어린 군관이었다. 거란이나 여진이었으면 모르되 고려라면 충분히 비웃을 수 있었다.
삽시간에 어전 가운데가 훤하게 비었다.
윤관과 임의는 나서고 싶어도 황제가 주관하는 자리인지라 한마디도 못하고 물러나 있었다. 오직 준경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만약 서하의 사신에게 패한다면 송나라가 퍼부을 비난을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도성인 개경으로 돌아가는 즉시 참살당할지도 몰랐다. 먼 곳에 자리한 서하와 차라리 틀어지는 한이 있어도 고려로서는 송나라의 손을 들어주어야 했다. 그러자면 양을포를 무조건 이겨야만 했다. 그런 후라면 눈짓 발짓을 모두 동원하여 송의 사신에게 지게 하면 그뿐이었다. 어느새 임의는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준경이라는 저 아이, 강한가?”
임의가 벌벌 떨며 윤관에게 물었다. 윤관은 준경이 강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장성 밖의 유목민족들에게 통용될 수 있는 것인지 아직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대답은 흐려질 수밖에 없었고 임의의 얼굴도 어두워져 갔다.
양을포는 순서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 일찌감치 먼저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채경은 윤관 등이 있는 곳으로 물러나 한마음으로 빌고 있었다.
‘강해 보인다.’
준경은 양을포를 쳐다보았다. 거친 고원에서 자라난 서하의 전사들은 농경 민족이라면 감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양을포가 예복의 윗옷을 벗자 울퉁불퉁한 근육에 핏줄이 돋아나고 있었다. 자신보다 키가 크고, 몸집도 큰 상대였다.
준경은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한 명은 수벽타의 진수를 전수한 고영창이었고, 또 한 사람은 고영창에게 시선을 돌리던 와중에 마주친 요 황제, 도종이었다.
도종의 눈매는 인자해 보였지만 시선은 냉철하기 그지없었다. 유흥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의 눈이 너무나 차가워 그 의중이 준경은 궁금하기만 했다.
“죽여도 되겠나이까?”
양을포가 어깨를 돌리며 도종에게 물었다. 도종의 눈빛이 준경과 마주치는 그 순간이었다.
“허락한다.”
준경은 도종이 마치 자신에게 한 명령처럼 들렸다. 도종은 자신의 승리를 점치는 것일까?
‘어쩌면 둘 중 누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각자 죽어야 할 이유가 있고 그에 따른 이득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다면 능히 이런 자리를 즉흥적으로 꾸밀 수 있을 것이다. 준경의 눈이 망인, 고영창에게 머물렀다. 고영창의 눈빛은 담담했다. 마치 지금의 일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저녁의 약속을 잊지 않았겠지라며 묻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준경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또래보다 덩치가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양을포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나이와 체구를 보고 방심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고수라면 한두 수를 겨뤄보면 집중을 하게 된다. 그러니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오직 한 수로 마감하는 일에 집중했다.
숨을 내쉬었다. 숨을 들이쉬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호흡을 규칙적으로 내뱉으며 상대가 공격해오기를 기다렸다. 호흡을 멈추며 극대의 힘을 낼 수 있는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승부를 내지 못하면 끝장이었다.
제법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준경을 보며 양을포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보통 유목민족은 발보다 손을 쓰는 것에 능통하다. 태어나자마자 말을 타기에 단련된 하체를 기둥 삼아 마상에서 싸우는 방법을 습관적으로 익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을포는 손을 쓰는 것뿐만이 아니라 발을 쓰는 것에도 능했다. 예상치 못한 일격으로 애송이의 선입견을 깨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양을포는 쏜살같이 주먹을 뻗어 준경의 인중을 노렸다. 준경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주먹의 방향에 집중했다. 그러나 크게 휘두른 주먹은 허초였다. 말과 비견될만한 양을포의 허벅지가 꿈틀거리더니 준경의 무릎을 노렸다. 주먹을 피하려고 몸을 숙이면 그대로 발차기에 당하는 그런 모양새였다. 숱한 전쟁을 치르며 그가 체득한 가장 효과적인 동작이었다.
‘……웃어?’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미 자신의 공격은 완벽하게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준경은 자신의 주먹에 위압감을 느껴 고개를 숙였고, 그에 맞춰 자신의 오른발은 준경의 무릎과 허벅지 근처를 그대로 강타하게 될 것이다. 한번 얻어맞으면 중심을 잃고 쓰러질 정도로 강한 위력을 가진 하단발길질이었다.
그러나 묘하게 찜찜하게 느껴졌다. 주먹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던 준경의 눈매가 왠지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삽시간에 지나간지라 자신이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망인이 나에게 가르쳐주었던 일격필살이 있었다. 실전에서는 단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방법이었지만.’
-가슴과 배 사이에는 우리가 흔히 단전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중원에서는 기를 쌓는 장소라고 일컫지만, 수벽타에서는 호흡을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을 한다. 호흡을 전달하는 통로가 막히거나 파괴되면 어찌 될까?
망인, 고영창이 설명한 것은 그리 어려운 개념은 아니었다. 숨을 운반하는 통로는 혈관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자신이 알고 있는 혈관의 역할을 하나하나 짚어 주었었다. 그는 땅바닥에 사람의 복부를 그려놓고 큰 대(大)를 그려넣었다.
-몸의 가장 큰 통로를 대동맥이라 하자. 복부의 대동맥은 이런 형태로 생겼다. 크게 다섯 가닥으로 갈라지는 부위가 가장 중요하면서 위험한 부위지. 가장 위에서부터 각기 위, 간, 비장에 호흡을 전달하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대장, 소장, 신장, 직장에 호흡을 전달하게 된다. 복부대동맥을 정확하게 칠 수 있다면 어떤 자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강력한 발차기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완력이 아닌 허리와 팔의 회전력만으로 힘의 방향이 바뀌자 한발로만 지탱하고 있던 양을포의 중심은 준경 쪽으로 흔들렸다. 준경이 그대로 양을포의 다리를 밑으로 내려놓자 힘이 실린 양을포의 발은 미끄러지듯이 준경의 다리 사이를 통과했다.
양을포의 눈이 단숨에 커졌다. 자신의 가슴이 훤하게 열린 것이다.
-왜 가슴이 아니고 복부냐고? 늑골을 일격에 부술 자신이 없다면 복부가 더 나은 선택이다. 그러나 복부는 단단하게 단련할 수 있다. 그것을 깨려면 오로지 공격하는 순간을 노려야 한다. 복부는 의식하지 않으면 방어할 수 없다.
준경은 양을포의 허리를 붙잡았다.
-주먹으로 치면 될 것을 왜 허리를 붙잡는 수고를 해야 하느냐고? 어디 직접 시험을 해볼까?
사정을 봐줬다는데도 한동안 복부의 고통이 가시지 않았다. 양을포의 허리를 잡은 준경의 무릎이 번개처럼 양을포의 복부를 쳤다. 양을포의 안색이 단숨에 쥐색이 되었다.
-복부대동맥이 파열되면 통증과 함께 목소리가 쉰다. 호흡이 들어갔다가 나오지를 못하는 마당이니 목소리가 갈라질 수밖에 없지.
양을포의 허리를 잡았던 손을 떼자, 양을포는 마치 벌목 후의 고목처럼 어전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는 고통과 수치심에 준경을 삿대질했다.
“네, 네놈이!”
그의 목소리는 쇳가루를 마신 듯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복부가 멍든 것처럼 물들지. 복부 내부에서 피가 넘친다는 이야기다. 마치 둑이 무너진 것처럼 다량의 출혈로 사망한다.
“네, 네놈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우연히 일격을 얻어맞았지만,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한 결과였다. 양을포는 주먹을 단단히 말아쥐고 괴성과 함께 준경에게 달려들었다.
-발버둥칠수록 피는 더 빨리 흐르게 되지.
“쿨럭!”
호쾌하게 주먹을 내지르던 양을포는 입가에서 다량의 선혈을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준경과 불과 반장의 거리를 남겨두고서였다.
양을포의 실력을 믿고 있던 서하의 사신단은 단숨에 사색이 되었다. 어전이라는 사실도 잊고 양을포에게 다가갔다.
“매우 흥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양을포의 죽음에 쥐죽은 듯한 어전 입구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준경의 곁에까지 오더니 황제에게 예를 청했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북면(北面)을 소란스럽게 만든 돌궐의 무리를 패퇴시키고, 수급 삼천을 가져왔나이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준경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략 마흔 정도로 보이는 장수는 체구는 작았지만, 매우 단단한 인상이었다.
‘일격이 가늠되지 않는다.’
지금 싸운다면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강자였다. 그는 황갈색 담비털로 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담비가 북방에서 나는 매우 귀한 진상품인 것을 생각하면 그에 걸맞은 고위 신분일 터였다.
도종은 담비털의 중년인과 준경이 나란히 서 있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먼저 담비털 중년인의 예를 받아들였다.
“아구다(阿骨打), 과연 여진 제일의 전사답구나.”
준경은 꿈에나 알고 있었을까? 그가 바로 요를 무너트리고 금을 세운 태조(太祖) 완안(完?) 민(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