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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1화 (11/257)

00011  (1) 잠룡개안(潛龍開眼)  =========================================================================

먼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도 자매와 이소에게 서운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어 섭섭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천리장성 밖으로 나가는 순간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소수의 여진족을 보았고, 소수의 발해 유민을 보았다. 소수의 거란인을 보았고, 소수의 송나라 유민도 볼 수 있었다. 세상 온갖 인종들이 모두 장성 밖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준경이 생각했던 큰 위협은 없었다. 그나마 가장 큰 위협이라 할 수 있는 여진도 부족 다수로 흩어져 고려와 거란의 눈치를 보던 때였기 때문이다.

압록강에 다다르자 거란의 관문, 녹(綠), 풍(豊), 환(桓), 정(正)의 4주(州)를 지나치게 되었다. 올해 마흔둘인 윤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압록강을 건너는 감상을 밝혔다.

“저기 옛 성터가 보이느냐?”

준경의 나이가 자신의 막내아들보다 어린 것을 보고 놀랐지만, 그 실력이 중앙군 중 수벽타 최고 고수라 할 수 있는 고의화와 맞먹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던 윤관이었다. 야영을 할 때면 여흥으로 약간의 상품을 걸고 수벽타 대련을 펼치도록 했는데 그 자리에서 보여준 준경의 실력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거란으로 가는 호위무사 중 일인은 중앙군에서 최소한 다섯 손가락으로 꼽히는 실력자들을 배치했었다. 무예를 숭상하는 기풍이 만연한 거란은 사신단이 올 때마다 여흥으로 대련을 벌이곤 했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자존심의 성격도 있는지라 고려로서는 쉽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맞춰줄 수 있는 인물을 보내야만 했다. 크게 이겨서도 안 되고 쉽게 져서도 안 되었기에 이미 한 차례 동경을 다녀온 바가 있는 고의화가 제격이었지만 이제 갓 보위에 오른 숙종을 숙위(宿衛) 하기 위해 빠질 수가 없었다. 준경 역시 그런 사정을 윤관에게 들었기에 매일 아침마다 수련도 거르지 않고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내가 이긴다면 어떻게 될까?’

요나라 황제의 체면을 생각해서 절대 이겨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준경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렇게 계속 저자세로 나갔기에 요나라가 오만불손하여 갖가지 무리한 요구를 계속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고려가 거란과 송에 비하면 약하다고 하나 그래도 그들과 맞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라고 윤관이 말했었다. 일거에 병력 이십만 이상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는 아시아 전체를 따져봐도 현재로서는 거란, 송, 고려가 유일했다.

숙종과 뜻을 같이하고 있는 윤관은 져야 한다고 하면서도 딱히 강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길 수 있다면 이기는 것도 좋지라며 지나가는 농처럼 던지곤 했다. 고구려의 고토 회복을 심중에 품고 있는 숙종과 그 휘하들이라면 능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보입니다.”

버려진 성터였다. 그곳에는 국경을 지키는 거란의 군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을 보수하면 될 것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막사 생활을 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 저 성터가 정안국(定安國)의 도성이 있던 자리니라.”

“정안국?”

준경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고개를 갸웃하자 윤관은 미소를 지었다.

“저 멀리 만주 북부에서 세력을 키운 거란족(契丹族)이 요(遼)를 건국하고 칭제(稱帝)를 시작했던 때, 가장 먼저 침공의 대상이 된 것은 다름 아닌 발해(渤海)였다. 거란은 발해의 땅을 동거란(東契丹)이라 칭하며 직접 지배를 선택했지. 그러나 발해의 지배층들은 유민을 이끌고 저항 운동을 계속했다. 그들은 이곳 압록강까지 내려와 저 성을 쌓았다. 이 주변은 산지라 숨을 곳이 많고 압록강의 존재로 중원과 내왕하기에도 괜찮은 곳이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고구려가 서경(평양)을 도성으로 삼기 전 압록강 변에 도성을 두었던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유민들이 소식을 듣고 하나둘 합류하자 스스로 후발해라 부르며 고토 회복 운동을 활발히 전개해나갔지. 그러던 후발해에 내분이 일어났다.”

나라의 흥망성쇠의 마지막을 보면 항상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준경은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나로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에 왜 내분 따위를 일으켜 자신의 역량을 소진하는 것일까? 바로 앞을 내다보지 못할 만큼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발해의 왕족이었던 대(大)씨가 열(烈)씨에게 밀려 일부는 중원으로 향하고 일부는 고려로 향했다. 대광현(大光顯)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느냐?”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발해의 마지막 세자로 알려진 인물로 수만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투신하자, 당시 태조 왕건이 너무나 기뻐하여 ‘왕’의 성을 내리고 ‘계’라는 이름을 붙여 자신의 계보에 포함했다. 고구려의 후신을 자처했던 고려였기에 발해 왕족의 투신은 그 명분을 더욱 견고하게 쌓아주는 황금패였다. 대씨가 왕족으로 편입되면서 고려의 왕은 발해 고토 회복의 권리가 있음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지게 되었다.

“열씨는 나라의 이름을 정안국이라 바꾸었다. 발해의 후손을 내쫓았으니 후발해라는 이름을 계속 쓸 수 없었겠지. 그러나 그들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가신이었던 오(烏)씨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지. 오씨는 송과 국교를 맺고 거란을 상대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막상 거란이 정안국을 치기 위해 대군을 보내자 송은 관망만 하고 있었고, 정안국은 홀로 거란의 대군을 상대해야 했다. 후발해라는 이름을 포기하는 순간, 발해의 유민들 역시 정안국에 힘을 보태기를 포기한 상태였으니, 자업자득이었다.”

“아.”

참으로 허망한 역사였다. 역사에 교훈이 있거늘 왜 위정자들은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배움이 짧은 준경이었지만 그들이 자신보다 어리석게 느껴졌다.

“요는 정안국의 도성을 파괴하고 저렇게 병사들이 숙영지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들에게 도전했던 상대에 대한 경고의 표시이기도 하다.”

고려 건국 후 꾸준한 북진 정책으로 서경을 넘어 청천강과 박천강까지 영역을 넓혔던 시절, 발해와의 결전을 벌이고 있던 거란은 배후에 버티고 있는 고려와 화친을 위해 태조 왕건에게 낙타 50필을 보낸 적이 있었다.

왕건의 입장은 단호했다. 거란의 사신은 먼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메어 굶겨 죽여 버렸다. 삼한 통일을 이루며 한반도 역대 왕조 중 유례가 없는 막강한 실전 병력을 거느린 고려였기에 거란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거란은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요지마다 진을 개척하여 고려의 침입을 대비했다. 발해의 역량을 흡수할 때까지 숨을 고를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후 힘을 되찾은 거란은 계속해서 고려를 침공하게 되고, 고려의 서희, 강감찬 등이 활약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압록강을 건너 동경(요양)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삼일도 걸리지 않아 동경에 도착한 준경은 도성이 아니라 마치 군사 도시를 방불케 하는 삼엄함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동경은 우리 고려와 발해의 유민이 준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사적인 기능을 강화한 도성이기 때문이다.”

거란의 도성은 무려 다섯 곳이나 된다고 했다. 유목 민족답게 황제 역시 다섯 도성을 순시하며 정치를 벌였다. 어느 지역에 많이 머물러 있느냐에 따라 황제가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을 알 수 있었다.

“20년의 대역사로 완공된 상경 임황부(上京臨潢府, 내몽골 자치구. 바린 좌기 인근)가 실질적인 도성이지만 발해 유민들이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키니 근자에 들어, 요 황제가 동경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한다. 동북 고토로 나아가려는 우리로서는 신경이 많이 쓰일 수밖에 없지. 차라리 남경으로 가주는 것이 낫다.”

남경(베이징)이면 거란의 다섯 수도 중 상경 다음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는 곳이었다. 그곳으로 황제가 옮겨간다는 것은 송나라를 상대하겠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황제가 남경으로 올 때마다 송나라의 가슴이 철렁하고 있음을 상상하니 고려와 송의 사정이 거란에 달렸음에 우습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대들이 고려의 사신들인가?”

수십 기의 기병을 거느리고 늠름하게 생긴 장수 하나가 다가왔다. 준경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그 장수 역시 준경을 보며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서로의 손가락이 동시에 가리켰다.

“망인!”

“준경!”

사신단의 대표인 윤관과 임의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요의 장수는 척 보기에도 동경유수(東京留守)의 휘하였다. 황제가 동경에 머물지 않으면 동경 일대를 담당하고 때로는 발해 유민과 고려를 상대로 전쟁까지 수행할 수 있는 높은 직급이었다. 일찍이 고려를 몇 차례 침범하여 유명세를 떨친 소손녕 역시 동경유수였었다.

수염을 시원하게 깎아 버린 망인은 보기보다 젊고 훤칠해 보였다. 준경은 그와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는 준경의 입을 막고 사신단에게 두 손을 모아 예의를 차렸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 이곳 동경을 떠나시기까지 소관이 영접하겠나이다. 소개 올리겠습니다. 공봉관(供奉官) 고영창(高永昌)이라 하나이다.”

“성씨를 들으니 유민이신가 보구려.”

거란족에 고씨는 존재하지 않았다. 발해의 유민이 틀림없었기에 윤관은 짐작으로 물어보았으나 고영창은 미소만 지을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요나라는 발해의 유민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에 보는 눈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었다. 윤관은 자신의 결례를 사과했다.

고영창이 발해 유민이 맞는다면 준경이 천리장성 인근 곡주에서 나고 자랐으니 숨어 살던 발해 유민 한둘을 아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고영창을 쫓으며 준경은 공봉관이란 그의 관직을 생각해보았다. 고려나 요나라나 중원의 관제를 비슷하게 따온 탓에 공봉관이란 직책 역시 같은 역할을 했다. 왕명에 따라 외교 문서를 추밀원에서 작성하게 되면 문서가 예법과 형식에 맞는지 검열(檢閱)을 하거나 외국 사신이 오면 접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문장에 뛰어나고 예법에 밝아야 하며 교양 또한 뛰어나야 했기에 고려에서는 음서 출신보다 과거 출신이 득세하는 보직이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수벽타의 진수를 가르쳤다. 그런데 공봉관이라니.’

그러나 준경이 조금 오해하는 것이 있었다. 유목민족이 세운 국가답게 요나라는 공봉관도 문무에 능한 자를 선호했다. 때로는 타국으로 가는 외교 사신이 되어 직접 무예를 펼치고, 전투를 벌여야 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발해 유민 중 귀족층이었던 고씨가 확실하다면 예법이나 문학에도 능한 것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나를 만났을 때도 거란의 요청이 있었다고 했지.’

요나라는 발해 유민을 포섭하기 위해 발해 귀족에게 관직을 주곤 했었다. 때로는 반란의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었기에 숱한 반란 속에서도 제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고영창 역시 그렇게 선택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황궁으로 향하는 내성의 문이 열리는 사이 고영창은 준경의 곁에서 나직이 말했다.

“오늘 밤, 달이 중천에 떠오르면 숙소 뒤편 연무장으로 나오너라. 사신들이 행보를 묻는다면 수련을 이야기하면 될 것이다.”

준경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황성의 어전에 들어서자 드디어 요나라의 황제를 보게 된 준경은 생각보다 온화하게 생긴 노인의 모습에 조금은 놀랐다. 천하를 벌벌 떨게 하는 요나라의 황제치고는 너무나 자상한 인상이었다.

그가 바로 요의 도종(道宗)이었다. 이십 대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무려 사십 년째 재위를 지키고 있었다. 근엄하고 과묵하였으나 시(詩), 음(音), 화(畵)에 능통하고 각종 지식에 해박하여 신하들이 그 지식을 비견하다가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할 정도였다.

이제 그의 나이가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라 신하들은 태자를 책봉할 것을 주청했었다. 도종은 능력 있는 조카 야율순(耶律淳)을 태자로 삼고자 했지만, 신하들은 나이가 어리고 어리석은 왕을 원했다. 그렇게 태자가 된 인물이 야율연희(耶律延禧)로 올해 나이 약관이었다. 지금 이곳에 도종과 야율연희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윤관과 임의가 나아가 헌종의 표문(表文)을 올렸다. 숙종에게 선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도종은 신하에게 일러 표문을 읽도록 했다.

“일이 생기면 결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왕에게 일이 있다면 천자가 알아야 하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재삼 생각하건대 어린 나이에 왕업을 이어받아 부족한 모습만 드러냈습니다. 왕으로서 영토를 굳게 지키며 상국(上國)에 충성하고자 했으나 고질(痼疾)인 소갈증(?渴症)이 날로 갈수록 심해져 거동조차 어려운 상황이니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왕의 임무는 중하여 하루도 비울 수 없으니 숙부(叔父) 왕희(王熙)로 하여금 국정을 대행하게 하였습니다. 그 사정을 살펴주시기를 바라오며 급히 황제께 알리나이다.”

헌종의 표문이 어전에서 모두 읽히자 윤관은 다시 하나의 표문을 더 내밀었다. 새롭게 보위에 오른 숙종이 황제에게 고하는 표문이었다.

“천자께서 굽어살펴주시어 고려가 평안함을 항상 감사드리나이다. 변방 미천한 제후의 자손이자, 천자의 나라 한 귀퉁이를 다스리고 있는 신하로서 천자의 은혜에 힘입어 하는 일이 없이 덕화(德化)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국왕의 숙환(宿患)이 심해져 백방을 써보았으나 무효였습니다. 차도가 없이 병세가 악화하자 숙부인 저에게 정무를 대행해줄 것을 부탁받았습니다. 제가 직접 천자를 찾아뵙고 사정을 설명하고 싶으나 다난(多難)한 정무는 가깝고 천자께서 계신 대궐은 멀어 신하를 보내 그간의 사정을 고명(告明) 드립니다.”

요에게 칭신(稱臣)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요에게 엎드릴 줄은 생각도 못했던 준경이었다. 헌종과 숙종의 표문이 모두 읽히자 윤관과 임의는 고개를 깊게 숙이며 도종이 헌종의 선위를 허락하는 칙서(勅書)를 내려줄 것을 간절히 청했다. 그들이 무릎을 굽히고 깊게 읍을 할 때마다 따라 하던 준경은 수십 번을 외쳤음에도 도종이 답을 하지 않자 참을성을 잃었다.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도종을 쳐다본 것이다.

어전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준경은 윤관과 임의 일행 가장 뒤에 있었기에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던 그들은 뒤를 돌아보고 대경하고 말았다. 사신단 모두가 읍을 하는 와중에 준경만 홀로 서서 감히 천자를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놀라 형부시랑 임의는 말을 잊고 입만 떡 벌렸다.

오로지 도종만이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였다. 재위 40년을 맞이한 노(老) 황제와 이제 16세의 파릇한 준경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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