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0 (1) 잠룡개안(潛龍開眼) =========================================================================
연회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현직 관료들이 적지 않았는데도 내일은 없다는 듯이 부어라, 마셔라를 외치고 있었으니 준경은 의문이 생겼다.
“곧 동이 터올 것입니다. 연회를 너무 오래 하는 것은 아닙니까?”
“아? 내가 미처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군. 오늘은 휴무일일세.”
“휴무일?”
술을 많이 마셨는데도 고의화의 안색은 그대로였다. 대단한 주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곡주 같은 산간오지야 휴무일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개경이나 서경 같은 대도시들은 한 달에 네 번의 휴무일을 가지고 있네. 이날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쉬게 되어 있지.”
도성인 개경에 올라와 처음 경험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준경이었다.
“매월 1, 8, 15, 23일은 관청 휴무일이라 관헌들은 집에서 쉬게 되어 있네. 격무에 피곤한 관헌이 일을 잘할 수 없을 것이니 미리 그 피로를 덜어주려는 조치지.”
고의화의 설명을 받아 조경이 더 자세하게 풀어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휴일이라는 개념이 어느 정도 머리에 잡혔다. 고려는 역대 왕조 중 휴일이 가장 많이 있는 국가였다고 한다. 매월 4일의 휴무를 보장하고, 연말과 연초에는 15일을 쉬도록 했다. 일 년에 6번 있는 명절은 앞뒤로 하루씩을 더해 3일씩을 쉬도록 보장했다. 현대와 따져보아도 오히려 한발 앞서 나간 휴일제도라고 할 수 있었다.
새벽닭이 울었는데도 연회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준경은 자신의 거소에 머물고 있는 두 여인이 걱정되었다. 고의화는 그런 준경의 걱정을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나도 괜찮다며 등을 떠밀었다.
“하긴 그 정도 꽃이라면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지.”
“꽃?”
술 냄새를 입에서 풀풀 풍기며 정지상이 말하자, 조경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의화가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하자 조경은 진지한 얼굴로 준경에게 말했다.
“이자위의 손녀를 노비로 데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 인주 이씨의 남은 인물들이 자네를 적대시할걸세. 계림공께서 아주 고약한 선물을 주셨군.”
고의화야 원래 계림공의 수족임을 모르는 자가 없었지만, 준경은 아직 계림공의 수족이라고 보기에는 믿음이 없었다. 계림공이 노비를 내리겠다고 선언한 이유와 고의화가 노비를 양보한 이유에는 그런 사정도 있었던 것이다.
준경은 술이 확 깨는 느낌이 들었다. 이로써 인주 이씨는 준경을 적대시할 것이고, 준경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계림공에게 붙어 있어야 했다.
“생각이 있다면 인주 이씨의 아이는 당분간 건드리지 말게. 인주 이씨가 이대로 물러날 허술한 가문이 아니니 아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 아무리 계림공과 고 대정의 비호를 받고 있는 자네라도 가만두지 않을게야.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니 말일세.”
“솜털 가득한 꼬맹이라 건드리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묘족의 여인이 아니었다면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아이였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묘족의 여인과 함께 이소의 귀여우면서도 무심한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의 창을 닫은 소녀가 마음을 연다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준경은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거소에 다다르자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평소라면 쉽게 열리는 문고리가 웬일인지 열리지가 않았다. 살짝 열린 틈을 보니 비녀로 문고리를 잠근 것이다.
아마도 정 도령과의 실랑이를 보고 문고리를 걸어 잠근 것 같았지만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술도 많이 마셔 졸리기 시작한 마당이라 이대로는 꼼짝없이 새벽이슬을 맞게 될 처지였다.
문틈으로 쳐다보니 자매와 이소가 서로를 껴안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낯선 환경이라 어색했을 법도 한데 잠이라도 잘 자는 것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준경은 잠이 들었다. 고의화에게 찾아가면 같이 잘 수 있을 것이지만 그녀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다행히 지금은 7월에서 8월로 넘어가는 여름이었다.
준경이 눈을 뜬 것은 정오가 가까워져 올 때였다. 햇살이 눈꺼풀을 건드리자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찌뿌드드한 기분을 날려버리기 위해 기지개를 켜려 하자 자신을 덮고 있던 홑이불이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홑이불을 보며 준경은 의아했다. 홑이불은 분명히 자신의 방에 있던 것이었지만 문이 잠겨 그 이불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자매와 이소 둘 중 한 사람이 자고 있던 자신에게 덮어준 것이었다. 절로 미소가 걸렸다.
“남자들이란 어쩔 수 없군요. 냄새나는 이불을 잘도 덮고 자다니.”
문을 열자 이소가 모습을 드러내며 준경을 쏘아붙였다. 그러나 준경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어제 문틈 사이로 그녀들의 잠자리를 보았을 때, 이 이불을 덮고 있는 사람은 이소였다.
“뭐에요? 기분 나쁘게?”
미소를 지은 채로 다가오는 준경이 이상하게 여겨졌는지 이소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준경은 그녀의 발밑에 이불을 던져 놓으며 말했다.
“노비가 되었으면 밥값을 해야지. 빨래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빨래? 지금 저한테 빨래를 하라고요?”
마치 치기 어린 동생이 하나 생긴 느낌이었다. 어처구니없어하는 그녀를 두고 준경은 고의화에게 향했다.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두 여인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 가요?”
“아침 아직 먹지 않았지? 기다려 뭐라도 들고 올 테니.”
준경의 대답에 이소가 대꾸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배가 고픈 것이 틀림없었다. 고의화가 머무는 거소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곳에 도착하니 고의화는 코를 드렁드렁 골며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이 관청의 휴무일이라고 했으니 계림공 사택의 모든 숙소가 이런 상황일 것으로 생각하니 어쩐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로 사람을 죽일 때까지만 해도 비정한 정치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면을 보면 사람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안주하려고 챙겨왔던 것인지 차갑게 식은 오리고기 한 마리가 온전하게 놓여 있었다. 준경은 그것을 들고 자신의 거소로 돌아와 이소와 자매에게 내밀었다. 이소는 식어 있는 오리를 보며 잠시 인상을 찡그렸지만, 자매가 오리고기를 먹기 좋게 뜯어 한점을 내밀자 입에 넣었다.
휴무일, 불과 하루를 두 여인과 머물러 보았지만, 준경은 여인과 함께 있다는 것이 자신이 사는 곳을 이렇게 변화시키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집을 청소해야 한다며 자매가 나서자 잠만 자던 용도로 삼았던 냄새 나는 거소가 새집처럼 변해 있었다.
“곧 집을 얻어 이곳을 벗어나게 될 것인데 구태여 이럴 필요까지는.”
고의화가 어기적거리며 준경을 보러왔을 때, 그 역시 질린 기색을 하고 있었다. 깔끔한 것이 되려 제집 같지 않고 남의 집에 억지로 사는 모양새처럼 여겼다.
준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자신도 그런 사실을 말했지만 이소에게 ‘남자들이란.’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말에 마땅히 대꾸할만한 논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이 되자 아침 일찍부터 조정은 부산스러웠다. 사숙태후와 어린 왕이 입회한 자리에서 반역자 처리에 대한 논공행상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토적(討賊, 역모를 제압) 공신, 소태보(邵台輔)를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로, 상장군 왕국모(王國?)를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로 삼는다.”
비록 계림공이 개입한 일이었지만 계림공 자신은 반역 토벌자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권력 다툼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이자의 역모를 토벌한 것에 초점을 맞춘 인사였다. 어차피 대권이 거의 넘어온 상황이니 뒷짐을 쥐며 선위의 때만 기다리면 계림공으로써는 상관없었다. 그래서 고의화와 준경의 공로도 매우 축소되었다. 이자의의 역모를 감지한 소태보가 왕국모에게 일러 난을 진압한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고의화와 준경은 왕국모의 수하로 이번 난에 참가하여 작은 수훈을 세운 것으로 인정되었다.
7월이 지나고 8월에 접어들자 계림공을 지지하는 인사들이 속속 승진하기 시작했다. 정해진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중보(黃仲寶)를 상서 우복야로 삼는다. 손관(孫冠)을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삼는다. 최사추(崔思諏)를 이부상서 지추밀원사(吏部尙書 知樞密院使)로 삼는다. 계림공 희를 중서령으로 삼는다.”
그동안 준경에게는 소소한 변화가 일어났다. 계림공의 사택을 나와 작은 저택을 하사받은 것이다. 조그만 마당까지 딸린 집은 지방의 상인이 개경에 머물 때마다 썼던 집이라고 했다. 일개 추밀원 별가가 받기에는 과분할 정도였는데, 정치적인 사정으로 별가 직밖에 내리지 못한 계림공이 특별히 조처해준 것이었다.
마당을 수련장으로 삼아 매일같이 고의화와 대련을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2군 6위의 숙영(宿營)으로 향하여 그들과도 비무했다. 중앙군답게 수벽타의 실력자들이 즐비했지만, 고의화를 제외하고 준경을 바닥에 눕힐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두 달 정도가 지나자 고의화를 제외한 누구도 준경을 당해내지 못했다. 실전과 살인을 경험하며 준경의 마음이 더욱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함께 한지 두 달이 되었지만, 자매와 이소는 준경과 데면데면했다. 한 지붕 아래 두 가구가 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가사(家事)를 전담해준 덕분에 준경은 온전히 수련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9월이 되어 가을로 접어들자 어린 왕은 소태보를 특진 수사도 판이부사(特進守司徒判吏部事)로 임명했고, 김상기(金上琦), 유석(柳奭)을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로 삼았다. 그에 더해 상장군 왕국모를 판도병마사로 삼아 다시 직급을 올렸다. 무관으로서는 이례적인 출세였다. 그들은 모두 계림공의 지지자들이었다.
어린 왕은 이어진 조서에서 장상(將相)이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여 나라의 안정을 꾀했다며, 가벼운 죄로 복역 중인 죄수들에 대해 사면령을 내렸다. 사면령을 청한 이는 다름 아닌 계림공 희였다. 그는 선위의 시점이 다가오자 전국에 자신의 덕을 보이고자 사면령을 제의했고 어린 왕은 거부하지 못했다.
10월이 되자 어린 왕은 보위에 오른 지, 일 년 만에 계림공에게 선위(禪位)했다.
왕이 제서(制書)에 적기를,
“짐이 선고(先考)의 유업(遺業)을 받들어 잘못 대위(大位)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리고 몸도 병약하므로 능히 나라의 권한을 진무(鎭撫)하고 사민(士民)의 바람을 채우지 못하여, 음모(陰謀)와 횡의(橫議)가 권문(權門)에서 번갈아 일어나고, 역적과 난신(亂臣)이 내침(內寢)에 자주 침범하는데, 이는 모두 내가 덕이 없는 소치로 항상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려움을 생각하고 있다. 가만히 보건대, 대숙(大叔) 계림공은 역수(曆數)가 그의 몸에 있고 신인(神人)이 손을 빌려 주고 있으니, 신하들은 받들어 모시어 나라를 이어가게 하라. 짐은 마땅히 후궁(後宮)으로 물러가 남은 목숨을 보전하겠다.” [출처: 국역(國譯) 동국통감(東國通鑑)]
이에 근신(近臣) 김덕균(金德鈞) 등에게 명하여, 계림공 희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해 오게 하니, 재삼(再三) 겸양(謙讓)하다가 중광전(重光殿)에서 고려 15대 왕에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숙종(肅宗)이라 칭했고, 14대 어린 왕은 헌종(獻宗)이라 명명되었다.
숙종은 보위에 오르자 정적의 위험성이 있는 왕실 일원을 쳐내기 시작했다. 원신궁주(元信宮主) 이씨(李氏)와 아들 한산후(漢山侯)의 형제 2인을 경원군(慶源郡)으로 유배하였다. 이자의가 한산후를 보위에 올리려고 했던 시도에 대한 징벌이었던 셈이다.
정적도 처리되었으니 남은 것은 요나라에 사람을 보내 인정을 받는 일이었다.
“좌사낭중(左司郞中) 윤관(尹瓘), 형부시랑 임의(任懿)를 지례사(持禮使)로 삼아 요로 보낼 것이다.”
요나라로 가는 사신단의 호위 무사로 자신이 선발되었다는 말에 준경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첫 살인과 실전을 겪고 사 개월이 흐르는 동안 준경은 더욱 강해져 있었다. 이제는 고의화와도 가끔 평수를 이루곤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 강함은 같은 고려군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천리장성 너머 여진과 거란은 고려군 10명이 덤벼야 한 명을 대적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강하다고 했다. 그 강함을 볼 기회가 생겼으니 흥분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