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1) 잠룡개안(潛龍開眼) =========================================================================
개경 도성은 급박한 긴장감에 쌓이기 시작했다.
계림공 희는 도성의 동문인 숭인문 인근에 측근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고, 이자의는 서문인 선의문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궁성은 서문과 더 가까웠기에 계림공 희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멀리하는 권신들이 일부러 그렇게 배정한 것이었다.
“나는 문하시랑(門下侍?)을 만나겠다.”
그들이 성문으로 진입하기 전에 병약한 어린 조카와 그 어미인 사숙태후의 신병을 확보해야 했다. 그들이 자칫 이자의에 동조하여 한산후를 태자로 확정하기로 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물거품이었다.
계림공 희는 가장 먼저 자신을 지지해주는 재상, 소태보를 만나 도성의 군권을 장악하기로 했다. 소태보는 이미 십 년 전부터 계림공을 지지했던 원로로 불교의 폐해가 못마땅한 유학자였다. 그는 그동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현안에 협조하며 재상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오늘 그 힘을 쓸 때가 온 것이다.
수족인 윤관과 오연총이 굳은 표정으로 계림공을 따라나서자 왕궁으로 가는 길목을 확보하기 위해 고의화와 준경, 고르고 고른 일백의 무사가 선지교(정몽주가 죽은 후 선죽교로 이름이 바뀜)로 행보했다.
숭인문에서 왕궁으로 가자면 선지교 외에 달리 길이 없었다. 이자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장군(將軍) 택춘(澤春)과 중랑장(中郞將) 곽희(郭希), 별장(別將) 성보(成甫), 교위(校尉) 노점(盧占), 대정(隊正) 배신(裵信)에게 가병을 붙여 선지교를 굳게 지키도록 명한 상태였다.
선지교가 가까워질수록 준경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고의화는 그런 준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오늘이 처음이겠구나.”
선지교 너머 마치 전쟁을 치를 차림의 장군과 병사들을 보는 순간 준경은 손에 땀이 배기 시작했다. 담대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첫 살인을 앞둔 마당이었다.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개, 돼지를 잡으면서 그렇게 떨리더냐?”
“가축을 잡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같습니까?”
준경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고의화는 검지로 선지교 너머 가장 선두에 선 자를 가리켰다.
“저자가 장군 택춘이다. 한때 나의 상관이기도 했었지.”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그의 일갈에 오금이 지릴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구름 위로 올라가기 위한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가장 먼저 앞장설 기회를 주마.”
다리를 가장 먼저 건널 기회를 주겠다는 그의 제의가 아찔하게 느껴졌다. 설마 경험도 없는 자신을 앞장세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 돼지라고 생각해라. 인정을 손에 두고 있다면 죽는 것은 네 녀석이 될 것이다.”
고의화는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로 자신을 앞장세워 돌파하려 했다. 준경이 망설이자 그의 눈매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이 정도도 해내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있었다.
검 자루를 따라 손바닥에 밴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개, 돼지. 개, 돼지, 개 돼지.’
이왕 첫 살인이라면 가장 그럴듯한 놈을 죽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그 기회가 온 것이라고 계속 되뇌었다. 마침내 선지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하자 장군 택춘이 고의화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고 대정, 많이 컸구나. 감히 본관을 보고도 예를 취하지 않다니!”
고의화는 싸늘한 미소와 함께 준경의 등을 안보이게 살짝 밀었다. 지금이라는 뜻이리라.
준경은 폐부가 가득 찰 정도로 숨을 모았다. 그 기운은 손끝으로 힘을 전달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인 힘은 마치 나선 형태로 검을 감싸기 시작했다.
“차압!”
달리기 시작했다.
장군 택춘은 설마 겁도 없이 어린 병사가 홀로 먼저 뛰어들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병사의 숫자도 자신들이 더 많았기에 그 위세를 믿고 있었을 것이다.
길이 28자(尺, 8.35m), 넓이 11.2자(3.36m)의 선지교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그림처럼 준경의 눈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장군 택춘을 베고, 그다음 무슨 공격을 해야 하고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작정했던 마냥 떠올랐다.
검을 휘둘렀다.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듣지 않으려고 했다.
폐부에 담았던 숨의 기운이 다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인원을 베고자 하는 일념 하나였다.
뜨거운 기운이 볼을 스쳐 갔다. 누군가의 선혈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한쪽 무릎을 꿇고 준경은 지나온 장면을 돌아보았다.
“크악!”
마치 꿈속에서 현실로 되돌아온 것을 알리는 것 같은 비명이었다. 준경이 지나온 자리를 따라 고의화와 일백 명의 무사가 일방적인 도륙을 퍼붓고 있었다.
“욕심 많은 녀석, 다섯 명의 무장을 모두 베다니.”
고의화는 준경의 성과가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왔다.
“제가 다섯을 다 베었다고요?”
준경 역시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수벽타를 가르쳐준 것은 나였지만 그토록 완벽하게 실전에 응용할 줄은 몰랐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네놈의 자질은 천부적이다. 다섯 번의 칼질로 다섯 장수를 단숨에 베어냈다.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아직 우리 일이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필시 궁성의 남문인 주작문을 통했을 것이니 우리는 내궁으로 통하는 서쪽의 선인문으로 간다.”
장내를 정리하는 무사를 독려하며 선인문을 향해 뛰기 시작하는 고의화를 준경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찰나의 시간, 자신이 다섯을, 그것도 대정 이상의 장수들을 모두 베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준경은 고의화를 쫓기 위해 일어나려고 했다.
무릎을 펴는 순간 비틀거렸다. 전력질주를 다한 직후 기운이 빠진 사람과 같았다.
“호흡을 가둔다는 것은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만약 병사들이 지휘관이 쓰러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준경을 먼저 공격했더라면 기운을 소진한 자신은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고의화가 적절하게 뒤를 따라붙지 않았다면 말이다.
준경은 이를 악물며 고의화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계림공은 문하시랑평장사 소태보를 만나고 있었다.
“과거 문종께서 계림공을 일컬어 왕실이 기울었을 때, 다시 일으킬 자는 너밖에 없으니 항상 자중하도록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때 신도 옆에 있었지요.”
소태보는 계림공을 만난 자리에서 느긋하게 차를 들고 있었다. 다급했지만 계림공 왕희 역시 마흔이 넘은 노회한 인물이었다. 그 역시 태연하게 차를 끝까지 마시며 응수했다.
“아버님은 여러 중신 앞에서 분명히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십 년이 넘도록 견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선종께서 서경으로 행차하셨을 때도 생각이 납니다.”
선종 9년에 서경을 둘러보기 위해 친히 왕림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 대신들이 모두 따랐는데 혹시나 도성이 빈틈을 타 계림공이 허튼수작을 부릴까 두려워한 이자의는 그 역시 일행에 포함했다.
“서경으로 행차하는 도중에 노지(露地)에서 딱 하룻밤을 유숙한 적이 있었지요.”
임금이 행차하는데 야영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 갑작스러운 폭우로 원래 목적지로 행차할 수 없게 되자 부랴부랴 막사를 설치하고 야영을 하게 되었다. 다음 날이 되자 계림공이 머무는 막사에만 상서로운 보라색 구름이 맺혀 있었다. 그것을 보고 백성과 대신들이 술렁였던 적이 있었다.
“이미 상장군 왕국모(王國模)를 움직였나이다. 그 역시 평소 이자의가 설치는 것을 못마땅하던 사람이니 친위병을 이끌고 역신을 막을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이곳으로 출발했다는 전갈을 했을 때, 사람을 보내 상장군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상장군은 고려 무관 중 가장 높은 자리로 대장군과 같은 자리였다. 비록 문관만이 정2품 재상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조항 때문에 정3품의 자리였지만 실질적인 무력을 손에 쥐고 있는 상장군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없었다.
“이자의는 상장군이 노환으로 침상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휘하 두 명의 장군을 포섭했습니다만 근래 상장군의 환후가 좋아져 칭병(稱病)하고 있었음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앞에서는 상장군이, 뒤에서는 고 대정이 길을 막으면 나는 새가 아닌 이상 도망갈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과연 문하시랑께서는 빈틈이 없으십니다.”
계림공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이곳에 머물다 이자의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등청(登廳)하여 어린 조카를 위로해주며 달래면 그뿐이었다.
사색이 되어 있을 사숙태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묶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았다. 어린 조카를 내모는 것은 차마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이대로는 고려 왕실이 영영 외척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였다. 자신만이 악연을 끊을 수 있는 적임자라고 다짐하며 자책감을 지웠다.
계림공과 소태보가 차를 나누고 있는 사이, 선정문(宣政門) 안팎에서 이자의는 포위되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이는 이미 죽을 날만 받아놨다는 상장군 왕국모였다.
뒤를 돌아보니 대정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이라고 소문나 군보대정(軍補隊正)이라는 일인 직책을 맡은 고의화가 험상궂은 얼굴로 도리깨를 돌리고 있었다. 고의화 앞에는 미처 핏물을 닦지 않아 귀신같은 형상이 된 준경이 잔뜩 날을 세우고 있었다.
이자의가 숫자를 셈해보니 엇비슷했다.
가병을 동원했기에 상장군의 엄포에도 주눅이 들지 않고 인주 이씨에 충성하는 이들만 모여 있었다. 시간을 끌다 보면 사숙태후가 궁에서 나와 중재를 할 것이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과정으로 넘어가면 자신이 이길 자신이 있었다.
이자의는 장군 숭렬(崇列)에게 나직이 말했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시간을 끌 수 있겠소? 곧 태후께서 나오실 것이니 저들을 모두 반역도당으로 처리할 수 있소. 그러나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그대 역시 끈 떨어진 연이 될 것이오.”
숭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의가 죽는다면 자신들 역시 무사할 수 없었다. 오직 이자의를 지키는 것이 자신들의 구명줄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움직임이 이자의를 능가했다.
고의화와 준경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역적 이자의는 순순히 목을 바쳐라!”
둘이 같이 싸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수벽타로 대련해왔던 상대답게 서로의 호흡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숭렬이 별장 성국을 시켜 막게 했지만, 고의화의 도리깨질에 머리가 박살이 나는 것이 먼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자의를 죽여야 한다.’
계림공은 고의화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원흉인 이자의가 죽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승리는 있을 수 없었다.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죽이라는 말을 고의화는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이런 미친놈들!”
이자의는 떨고 있었다.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값싸게 보는 데 대한 분노였다. 단둘이 움직였음에도 순식간에 별장 하나가 목숨을 잃고 생명마저 위협당하게 생기자 아들인 평장사(平章事) 이작은 머리를 땅에 처박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런 아들의 엉덩이를 이자의는 힘껏 차버렸다.
“정2품 재상 반열의 고관이 이렇게 경망 되다니!”
그것이 이자의가 생전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 되었다. 준경이 비호처럼 날아들며 가슴팍에 검을 깊숙이 꽂아 넣은 것이다.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검과 준경의 얼굴을 보았다. 약관도 되지 않은 앳된 얼굴의 소년에게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이자의였다.
“네, 네놈 이름이 무엇이냐?”
이자의의 입가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자의가 변을 당하자 반항을 포기하고 대부분이 칼을 놓기 시작한 것이다. 끝까지 반항하는 자도 있었지만 결국 황천으로 향하고 말았다.
“준경.”
짧게 끊어 말하는 준경을 보며 이자의는 헛웃음을 자아냈다.
“천하의 이자의가 성도 없는 잡척에게 목숨을 잃을 줄이야.”
그것이 이자의가 황천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되었다. 사숙태후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사숙태후가 큰 소리로 노여움을 터트리려 했지만, 계림공 희와 문하시랑평장사 소태보가 나타나 사숙태후를 상대했다.
사숙태후가 손 쓸 틈도 없이 왕국모는 역모에 가담한 자들을 오라로 묶었다. 이자의의 아들인 평장사 이작을 비롯해 흥왕사 대사 지소, 장군 숭렬 등, 동조자 20인이 줄줄이 묶이자 사숙태후는 머리를 짚고 혼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