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1) 잠룡개안(潛龍開眼) =========================================================================
나는 고의화에게 두 달을 더 지도받았다. 그리고 그는 당분간 이별을 고했다. 귀인을 따라 도성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내가 쫓겠다고 하자 그는 내 이마를 검지로 밀며 아직 멀었다고 했다.
“조만간 내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될 것이다. 그러니 허튼짓하지 말고 수련이나 열심히 해라.”
그와 반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쉬워하는 나에게 그는 자신의 내력을 밝혔다. 나는 그의 내력에 깜짝 놀랐다.
“발해의 후손이라고요!”
태조 17년(934년) 발해의 마지막 태자인 대광현이 수만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넘어온 적이 있었다. 대광현의 투항에 태조가 기뻐하여 ‘왕’ 성을 내리고 ‘계’라는 이름을 친히 붙여주었다고 한다. 고의화의 선조도 그 유민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긴 고씨라면 대대로 고구려와 연관이 깊은 성씨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귀인의 뒷배라기보다는 고려에 정착한 발해 유민들이 세력화되면서 얻은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고려는 발해의 유민은 환영했지만 발해가 다시 세워지는 것은 그다지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발해 멸망 후 몇 번의 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그들은 하나같이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시간을 끌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란이 부흥 운동을 진압하자 축하 사절을 보내기도 했었다.
고의화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내봤지만, 그는 이미 오래되 이야기라며 자신과 상관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발해를 언급할 때마다 아릿한 향수를 느끼고 있음을 말이다.
귀인과 함께 그가 떠나고 나는 한동안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그가 남겨준 수벽타(手癖打)를 연성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수벽타가 아주 오래전 북쪽의 기마민족들 사이에서 유래된 것이라 했다. 고구려 역시 그 전통을 이어 발전시켜 나갔고, 다른 삼국에도 변형된 형태로 전파되었다고 했다. 고려가 개국하여 삼국의 백성이 한데 뒤섞이면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군부에서 필수적으로 가르치는 군인 무예로 탈바꿈했다고 했다.
여흥을 위해 보여주기 위한 수박희(手搏戱)라는 것도 있다고 했지만 고의화도 나도 그것을 가르치거나 배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오직 가장 강해질 수 있는 수법만을 배우길 원했다.
그러나 두 달 정도를 혼자 연습하다 보니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본래 수벽타는 누군가와 겨루는 것을 가정하고 대련 위주의 수련을 하게 된다. 효과적으로 적을 살상하기 위해 기술을 걸어 적의 균형을 무너트리고 빈틈을 타서 일격을 내지르는 것이다.
고의화가 있을 때는 그가 나의 대련 상대가 되어 기술 연마를 쉽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을 할 수 없게 되자 실력이 정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꾸준히 몸을 키우는 운동을 계속해온 덕분에 체력은 성인에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성 싶었다.
그러다 또 다른 스승을 만났다.
내가 야산에서 아름드리 거목을 상대로 정권 찌르기를 하고 있을 때,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나 나를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 첫 만남이었다. 그는 자신을 망인(亡人)이라고 불렀다. 살아 있는 자가 스스로 죽은 자라 칭하고 있으니 참으로 해괴했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수벽타는 고의화가 알려준 것과는 다른, 촌놈이 들어도 뭔가 신묘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육체적인 수련을 강조하던 고의화와 달리 망인은 호흡 수련도 함께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수염이 무성하긴 했지만, 설화에서나 볼법한 백발노인이 아니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마흔은 넘기지 않은 것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혹시나 속은 노인인데 겉은 동안처럼 보이는 선도 수련법이 아닌가 싶어 나도 신선이 될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짚고 있던 지팡이로 나를 냅다 내리쳤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파서 거칠게 항의하려던 나는 문득 그의 눈가에서 애잔한 감정을 읽었다.
“만약 신선과 같은 재주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나는 망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짙은 내력을 숨기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가 말하고 싶다면 말할 것이고, 지금으로서는 다시 훌륭한 수련 상대가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시간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가 나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고, 자신은 북으로 향해야 한다고 했다. 목적이 무엇인지 그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내 골격이 무예를 익히기에 어울리는데도 엉뚱한 수련법으로 엇나가는 것이 거슬려서 잠시 동참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저 먼 중국에도 뛰어난 무인들이 있다. 그들 역시 호흡을 다루지만, 수벽타에서 말하는 호흡은 조금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 호흡은 승패를 가르기 위한 공부라면 내가 가르치는 호흡은 생사를 가른다.”
내 몸 안에 호흡을 쌓아두는 행위를 축기라고 했다. 평상시에 축기를 열심히 해놓았다가 필요할 때 육체의 힘에 실어 방출하는 것을 극의(極意)라고 친다면, 망인의 설명은 그 궤를 달리했다.
“전쟁터에서 수천, 수만을 상대해야 하는 일들이 생겨난다. 때로는 대열에서 떨어져 홀로 뚫어야 하는 예도 있지. 그런 상황에서 축기가 바닥났다면 그다음은? 잘 들어라. 무인과 장수의 길은 같을 수가 없다. 정말 뛰어난 무인이 평생을 가야 이름난 무인 일백 남짓을 벨 수 있다면, 뛰어난 장수는 수천, 수만, 뛰어넘어 백만에 이르는 목숨을 취할 수 있다. 묘향산이니 금강산, 계룡산 같은 명산에서 수도하는 구도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축기의 양으로 선도의 공부를 비교하지. 중원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전장은 그런 신선놀음이 통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가장 힘을 적게 들이며 적을 살상하는 것이다. 일타필살(一打必殺), 오직 그 하나의 목적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식한 나도 그의 가르침은 이해하기 쉬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정체를 감추고 있었지만, 전형적인 무인이었다. 그의 사고방식이 나와 다르지 않았기에 나는 급격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원하는 타점에 그 힘을 집중시킨다.
“떠올려라. 환상이 극대화될 때 네놈의 힘도 점점 강해진다!”
고의화와 다른 가장 독특한 수련법은 하루에 한 번 나를 실신 지경까지 이를 정도로 목을 강하게 조이는 것이었다. 그는 어미가 아기를 구하기 위해 무너진 지붕을 들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무의식의 염원이 가장 정순한 호흡을 빨아들여 찰나의 소우주를 이루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우리가 힘을 쓰기 위해서는 숨을 멈춰야 가능하다. 지속적인 힘은 숨을 쉬어가면서 조절할 수 있지만, 한순간 폭발적인 힘을 내기 위해서는 숨을 멈춰야만 가능했다. 호흡을 멈춘다는 것은 천지의 기가 내 몸 안에 잠시 머문다는 것이다. 그 힘을 일점에 순식간에 쏟아낸다. 그러니 자연 축기가 필요 없다. 숨을 참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기를 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었다.
축기를 공부한 도인들이 장거리를 뛴다면 나는 단거리를 경주하는 셈이었다. 호흡을 참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단거리를 벗어날 수도 있었다. 그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러나 수련만큼은 매력적이지 못했다. 숨을 끊는 고통을 체험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 매일 내 목을 조르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매일같이 실신을 거듭했다.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묘하게도 실신 상태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았다. 알 수 없는 지식이 보였고, 알 수 없는 역사가 보였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숱한 이야기가 나에게 흘러들었다. 꿈 속에서 나는 전장을 누비는 일당백의 장수가 되어 있었고, 백관을 호령하는 재상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쾌감이었다. 환상의 내용이 나를 자극했다. 그리고 수련이 거듭될수록 환상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졌다. 몽롱하고 나른한 느낌이 들었던 처음과 달리 환상에서도 나를 관조할 수 있는 냉정함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때 알았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를 지켜본다는 것은 공포에 가까웠다.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공포는 의구심으로 바뀌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문득 깨고 보니 나는 마루에서 자고 있던 장주(莊周, 장자)가 되어 있었다. 장주인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라면 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실신에서 깨어나 망인에게 물으니 그는 그것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라고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같을 수가 없어서 옳은 일을 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있고, 불의한 일인 것을 알면서도 이익을 위해 끼어드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런 여러 가지 불완전한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게 되면 마음은 더욱 단단해지고 호흡의 힘은 강해지리라고 말했다. 정말 그것 때문일까?
그는 내게 매일 같이 정권 찌르기를 하던 아름드리 거목을 힘껏 쳐보라고 말했다.
누가 믿을까?
양팔을 둘러도 채 감싸지 못할 만큼 오랜 수령의 거목이 허리를 숙이며 꺾였다. 분명히 내 주먹이 한 일이건만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망인은 이제 떠날 때라고 했다.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날이 있으리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이름만이라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저 한숨을 쉬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발해의 유민이었다. 그러나 거란의 부름을 받아 벼슬을 받게 되었다. 어쩌면 너와 나는 전장에서 서로 칼을 겨누게 될지도 모른다.”
발해가 망하고 유민은 둘로 나뉘었다. 대다수는 거란에 복속했고, 일부만이 고려로 흘러들었다. 아마도 망인은 고의화처럼 고려로 흘러든 유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왜 고려를 떠나 거란의 벼슬을 받는 것을 수락했을까?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과거가 남아 있었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언젠가 북방으로 향하여 그의 진실한 내력을 알아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까지 필요한 것은 실력을 키우는 일이었다. 나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끊임없이 수련했다. 그렇게 내 나이 열다섯의 겨울이 되었다. 해가 바뀌면 곧 열여섯이 될 터였다.
이 나이쯤 되면 성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랑 같은 또래 중에는 벌써 혼례를 치른 녀석들도 있었다.
그날도 야산에서 홀로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가 갑자기 날아드는 기척에 흠칫 피했다.
“제법이구나.”
나를 스쳐 지나간 돌멩이 하나가 눈밭에 파묻혔다. 돌멩이를 던진 사람은 다름 아닌 고의화였다. 그가 오 년 만에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는 험상궂은 얼굴에 누런 이빨을 내보이며 웃었다.
“준비되었느냐?”
그 한 마디를 기다렸다. 나는 문득 망인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쯤 거란에서 벼슬자리에 올라 있을 것이다.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구름 위의 세상을 보기 위해서라도 망설임은 필요 없었다.
“가시지요.”
이제 출사표는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