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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2화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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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83년.

고려의 역대 왕 중 가장 성군에 가까웠다는 문종(文宗)이 대소신료들의 비통 속에 승하했다. 문종의 치세 37년간은 고려의 황금기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평화로운 번영기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상(喪) 중이라 술잔을 드는 것은 결례였지만 계림공(?林公) 왕희(王熙)는 거침없이 술잔을 들며 홀로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종이 승하한 이상 곧 차대 보위가 결정 날 터였다. 고려는 조선 시대와 달리 적장자 원칙이 아니었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에 장자가 마땅치 않다면 다른 이에게 왕위를 주라고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대 혜종, 3대 정종, 4대 광종이 형제간에 양위를 받은 사례였다.

승하한 11대 문종 역시 형인 10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니 아들인 자신에게 왕위가 오기보다 숙부들에게 왕위가 돌아갈 가능성도 컸다.

“큰형님이 될 가능성도 있지. 그러나 워낙 몸이 약한 분인데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대신들이 선뜻 나설지 모르겠군.”

왕희는 다시 술잔을 들었다.

그는 손을 들어 달을 잡았다. 잡히는 듯 보였지만 주먹을 풀면 달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왕실은 허약하여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고, 명문가들은 호시탐탐 왕실을 좌지우지하려 한다. 이래서야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언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왕실에 버금갈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가진 가문이 전국에 열 곳 정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곳은 인주(인천) 이씨였다. 차대 왕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긴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군.”

왕희는 툴툴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낳아준 인예왕후 역시 인주 이씨 출신이었다. 그들은 불교의 신임을 얻고자 유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펼쳤다. 왕희가 아버지 문종을 존경하면서도 가장 아쉬워했던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불교의 힘을 지나치게 키워주어 오히려 나라의 독이 되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권좌에 오른다면 아무리 외척이라 해도 쳐내버릴 결심을 하고 있던 왕희로서는 그 본심을 지금 드러내서는 아니 되었다. 아버지 문종은 인주 이씨의 세 딸을 모두 왕비로 맞이했고, 조정에는 어머니와 같은 항렬의 이씨들이 무려 열한 명이나 포진해 있었다.

“지금은 숨을 죽여야 할 때다. 영지인 계림(경주)으로 가기보다 북으로 가서 훗날을 위한 경험을 쌓자. 인재를 모으자. 도성에 머물며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

계림공 왕희는 그날로 측근들을 이끌고 서해도(황해도)로 떠났다. 계림공이 몸소 북방행을 청하자 평소 그를 경계하던 왕실과 세도가들은 환영했다.

문종이 승하한 그 해에 장남인 순종이 즉위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너무나 병약했던 몸인지라 많은 대신이 즉위를 반대했었다. 본인마저도 왕위를 거부할 정도였으나 불행히도 그의 아내인 장경궁주 이씨는 세도가 이자연의 손녀이자, 이자겸의 누이이기도 했다. 인주 이씨는 자신들이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왕을 원했다. 그러나 인주 이씨의 흉심은 오래갈 수 없었다.

순종이 즉위한 지 삼 개월 만에 사망한 것이다. 같은 해에 문종과 순종 두 왕이 죽은 셈이 되었으니 흔치 않은 비극이었다.

순종이 허무하게 죽자 차기 왕위를 시급히 결정해야 했다. 유력한 후보는 둘이었다. 문종의 차남인 국원공 운과 삼남인 계림공 희였다. 그러나 계림공 희는 북방행을 자원하여 도성을 비우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국원공 운이 13대 왕, 선종(宣宗)이 되었다.

선종 역시 불교 색채가 강했던 터라 유학을 신봉하던 대신들은 내심 계림공 희를 원했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환궁하여 왕위 쟁탈전에 뛰어들 것을 권했다. 형부상서 소태보(邵台輔)와 어사대부 최사추(崔思諏)가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중 최사추는 이자겸을 사위로 둔 인물이니 참으로 권력 다툼은 재미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계림공 희는 느긋하게 선종의 즉위식에 참여하여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소태보와 최사추가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계림공 희에게 정말 왕위에 욕심이 없느냐고 직설적으로 묻자 ‘지금의 왕이나 충심으로 보살피시오. 불비불명(不蜚不鳴)이오.’ 그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는 뜻이니 큰일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계림공의 마음을 알아챈 것이다.

한 차례 북방을 순회한 계림공은 그 후 잠자코 도성에서 삼 년의 세월을 소일했다. 불비불명의 주인공, 초 장왕이 삼 년을 소일하다 일소에 칼을 휘두른 것에 비하면 아직 그에게는 휘두를 칼도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계림공이 내심 갈고 있는 마음만은 칼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계림공 희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이도 있었다. 선종의 정비(正妃) 사숙왕후(思肅王后)였다. 이 여인도 인주 이씨 출신이었다. 계림공 희의 어머니인 인예왕후의 조카뻘이 되는 여인이었다.

“계림공은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능숙하게 말하며 유학자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몇 년 전에는 은밀히 북방 양계의 장수들을 포섭했지요. 도성에서 삼 년을 소일하며 머무르고 있으나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를 영지인 계림으로 멀리 보내 몇 년 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종은 자신의 동생을 의심하는 사숙왕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끝내 그 의견을 물리치지 못했다. 사숙왕후가 장남을 낳은 지 채 몇 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위를 물려준다면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기에 교서를 내려 계림공 희에게 영지를 잠시 돌볼 것을 명했다.

계림공 희는 순순히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전주 고산현(전북 완주) 출신의 측근 장수, 고의화(高義和)에게 일러 서해도 곡주로 나아가 양계의 장수들을 잘 단속하도록 일렀다.

양계라 함은 고려의 국경 지역으로 천리장성을 북과 동으로 나눠 각기 북계, 동계라는 이름으로 병마사가 직접 관리하는 지역을 가리켰다. 항상 북방의 침입을 대비하고 있기에 다른 도처럼 정무를 담당하는 안찰사가 다스리기에는 벅찬 곳이었기 때문이다.

서해도 곡주는 바로 그런 양계의 경계지역에 있었다. 북계와 동계의 경계선에 있으니 자연 양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저 산골 마을에 불과한 곡주를 과거 계림공이 다녀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계림공이 영지인 계림으로 내려간 몇 년 사이 도성에서는 사건들이 연이어 있었다. 문종의 사남(四男)인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이다. 그는 삼천 권에 이르는 불경을 고려로 들였는데 선종의 친불교적인 정책은 의천의 귀국으로 더 심해졌다. 천태종의 본산인 국청사의 건립을 명하며 왕실 재정의 악화를 가져왔다. 그런 친불교 정책은 유학자 출신 대신들에게 불편한 심경을 일으켰음은 불문가지였다.

또한, 왕실로서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12대 순종의 비(妃)였던 장경궁주 이씨가 궁인(宮人)과 사통한 것이 밝혀진 것이다. 남편인 순종이 왕위에 오른 지 석 달 만에 승하했으니 그 외로움을 궁인과 달랜 것은 일반인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는 처사이기는 했으나 왕실의 체통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트린 행동이었다.

당시 고려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대등한 정도였다. 남녀 혼욕이 허용되고, 사찰에서 남녀가 같이 예불을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을 정도다. 그로 말미암아 불륜이 성행하자 자제하라는 왕명이 떨어지기도 했었다.

어쨌거나 장경궁주 이씨의 추락은 그녀의 동생이자 전도유망한 젊은 관료, 이자겸까지 끌어들여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게 한다.

“누이의 일을 나에게까지 덮어씌우다니!”

한창 출세가도를 준비하던 이자겸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당시 고려는 조선과 같이 대역죄나 추문이 있어도 구족을 멸하는 제도는 없었다. 직계 이외에는 그 죄를 묻지 않았고 회생의 기회를 주었다. 이자겸은 불행히도 직계였던 것이고, 누이의 잘못을 덮어줄 생각보다 자신의 출세가도가 막힌 것에 분노했다.

인주 이씨의 세도가 강해지면서 인주 이씨 내부에서도 차기 권력을 놓고 다툼이 한창이었으니 그중 선두권에 선 이자겸으로서는 앙심을 품을 만한 일이기는 했을 것이다.

인주 이씨는 장경궁주의 추락으로 실추된 세도를 복귀하기 위해 선종에게 새로운 비를 맞을 것을 권했다. 새로운 비 역시 인주 이씨 출신으로 권신 이자의의 여동생이었다. 이자의는 선종의 정비, 사숙왕후와 사촌이기도 하고, 실각한 이자겸과도 사촌지간이었다.

뜻밖에도 선종은 이자의의 여동생인 원신궁주(元信宮主) 이씨와 잘 어울렸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도 셋이나 낳았다. 정비인 사숙왕후는 그런 선종에게 아쉬움을 느꼈지만 차대 보위만은 자신의 아들 욱(昱)에게 물려주기 위해 철저히 준비해나갔다.

재위 9년째, 깊은 병이 든 선종은 머지않아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평소 시를 즐겼던 그는 아픈 와중에 시를 읊었다.

-약효야 있건 없건 무슨 소용이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니, 오직 원하는 것은 선행을 쌓아 청정(淸淨)한 곳에 올라 부처를 만나는 것이라네.

그로부터 2년 뒤, 선종이 승하하고, 장남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14대 왕, 헌종(獻宗)이다.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계림을 떠나 도성에 칩거하고 있던 계림공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아버지 문종이 승하한 후로 무려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야 자신이 뜻을 펼 수 있는 세력이 완성되었다.

불과 열 살에 보위에 오른 어린 조카는 태어나서부터 병약하기 그지없었다. 어린데다가 병치레까지 잦으니 어미인 사숙태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점점 헌종의 병세가 심해지자 진맥한 의원들은 한입으로 오래 살아야 한두 해라는 말을 남겼다. 권신, 이자의는 자신의 여동생이자 선종의 후비, 원신궁주가 낳은 아들을 차대 왕위로 올리고자 물밑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산후 균이 바로 그였다.

“결코, 서둘러서는 아니 된다. 이자의 그놈이 먼저 움직이는 순간, 우리도 나선다.”

계림공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자의가 움직인 순간 그를 역적으로 몰아붙여 세력을 일소시킬 수만 있다면 자신의 세력을 당해낼 자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그토록 원하던 소식이 전해졌다. 헌종의 병세가 오늘내일 하자 이자의는 한산후 균을 태자로 추대하고자 사병을 모아 왕궁으로 향했다는 것이었다. 왕궁에 사병을 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미 인주 이씨의 권세는 왕을 넘어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칼을 빼들 때가 되었다.”

계림공 희가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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