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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꾸다 in 고려-1화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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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동여진 완안부의 추장, 우야소는 기가 막히기 그지없었다. 그는 누런 이빨을 열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여진의 전사가 고작 한 놈에게 휘둘린단 말이냐!”

사백 년을 이웃하며 살아왔다.

신라에서 고려로 바뀌던 때부터 시작하여 한 번도 이 땅은 저들의 영토가 아니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신라의 영토를 보면 평양까지 미치지 못했다. 250년이 지나 왕건이 고려를 열자 그때야 평양(서경)을 차지할 수 있었다.

동여진의 활동 무대인 동북면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근 400년간을 발해 유민과 여진족, 말갈 등의 거주지가 되었다. 북방의 거란이 점차 힘이 강해지면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여진은 상대적으로 남하를 선택했고 정주(定州) 인근에서 전열을 수습할 수 있었다. 정주는 고려 천리장성 바로 코 앞이었다.

고려는 정주 인근에 머무르고 있는 대규모의 여진족을 침입 의사가 있는 것으로 지레 간주하여 문하시랑 평장사, 임간을 판동북면 행영병마사로 삼아 여진을 치도록 했다. 고려는 본래 총사령관을 문신으로 임명하는 전통이 있었다.

귀주대첩이라는 빛나는 업적을 일군 강감찬 역시 본래 장군이 아닌 문신이 아니었던가? 임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윤관열전에 기록되기를 학문을 좋아하여 전쟁터에서도 오경을 휴대하며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았을까. 샛골 샌님이니 제대로 된 지휘를 할 수 없었다.

그런 지휘를 받는 고려군이었으니 오합지졸인 것은 당연했다. 일대 십이란 말이 있었다. 말을 타는 여진을 상대하기 위해 고려는 열 명의 창 든 보졸을 동원해야 상대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후일 윤관이 별무반을 구성하며 십칠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이끌고 동북면의 평정을 위해 나섰지만 상대한 여진족은 불과 이만이었다. 큰 피해를 감수하며 아홉 성을 쌓았지만, 이듬해에 여진족에게 다시 돌려줘야만 했다.

“장성에 의지하여 방어에만 급급한 고려놈들 중에 저런 자가 있을 줄이야.”

총사령관인 임간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기회를 한 하급 군관의 출현으로 저지당했다. 임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고, 오직 그 군관만이 홀로 남아 무려 이백 명의 여진 전사를 상대했다. 일대 십의 비율을 따진다면 홀로 이천 명의 고려 보졸의 몫을 하는 셈이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대로는 그냥 물러설 수 없다. 거란 놈들에게 휘둘리는 것도 울화통이 터지는데 고작 고려군관 한 놈에게조차 휘둘릴 정도라면 차라리 아랫도리의 물건을 떼는 것이 낫다!”

이럇! 소리와 함께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우야소의 급작스러운 행동에 주변 여진 전사들도 깜짝 놀라 뒤쫓기 시작했다. 그 수가 일백을 헤아렸다.

“컥!”

여진 전사 일인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핏물이 분수처럼 흘러나왔다.

“이십 명인가? 삼십 명?”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핏물이 흥건한 내 손바닥을 들어 보았다. 이 손에서 믿을 수 없는 힘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겨울 한설이 내리고 있었다. 1월 말인 지금, 동북면은 아직 겨울이었다.

“커억!”

감상에 빠진 사이 슬금슬금 접근하던 여진족의 전사 한 명은 이마에 창을 꽂힌 채로 뒤로 쓰러지고 있었다. 이미 장성 너머로 퇴각한 고려군이 버려둔 창은 발에 채는 돌멩이만큼 널려 있었다.

나는 남쪽을 바라보았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천리장성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미 문은 굳게 닫쳐 있었고, 성벽 위에서는 자신을 응원하는 고려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체 하늘은 내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힘은 쾌감을 선사해주었다. 여포나 관우 같은 이들도 이런 쾌감을 느끼며 전장을 누볐던 것일까?

“네 이놈!”

일갈하며 달려드는 자가 있었다. 행색을 보니 일개 추장 정도 되는 자였다. 그의 뒤로 일백에 이르는 여진 기병이 뒤를 쫓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창 두 개를 각기 양손에 잡았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창을 힘껏 던졌다.

전력으로 달리던 말의 두상에 정확히 창이 꽂혔다.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추장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눈 때문에 젖은 흙으로 범벅된 그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귀화를 뿜어냈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뜻이리라.

“지금껏 고려에 네놈과 같은 군관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내 오늘 네놈을 반드시 죽이겠다. 죽기 전에 이름을 남길 기회를 주마!”

이미 일백의 여진 기병이 내 주위를 에워쌌다. 나를 공격하던 일백오십의 여진 기병도 합세했다. 그럼에도, 전혀 두렵거나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뛰는 심장은 어서 더 빨리 뛰게 해달라고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창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야압!”

달리기 시작했다. 오로지 여진족의 추장을 노렸다. 여진 기병이 앞을 가로막았다. 상관없었다. 지금 내 한계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수록 여진족 추장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십 명의 벽을 깨고 여진족 추장의 코앞에 핏물이 흐르는 창끝을 들이댔을 때, 그는 분노와 수치심에 전신을 떨고 있었다.

“누구냐! 네놈은 대체 누구냔 말이냐!”

“나?”

나도 모르게 이빨이 드러내 보일 정도로 웃음이 나왔다. 대소도 미소도 아닌 끝도 모를 자신감이었다. 다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한설은 더욱 심해져 전쟁의 상처를 하얗게 덮고 있었다. 하늘이여, 대체 내게 무엇을 바라는 것입니까?

“척준경.”

“척준경, 네놈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해두겠다!”

우야소는 죽음을 각오하였다. 어느새 창끝이 뒤로 물러나자 이제 자신을 향해 찔러 올 것을 예상하고 눈을 질끔 감았다. 그러나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떴다.

그곳에는 창 대신 핏물이 흥건한 손을 내민 척준경이 있었다. 우야소는 신음을 발했다.

“대체 이것이 무슨 뜻이냐?”

“완안부는 유능한 추장 영거가 이끌면서 동여진 대부분을 통합할 수 있었지, 하지만 압록강 유역의 서여진이 거란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남하하자 상대적으로 세가 부족한 완안부는 계속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우야소는 입이 떡 벌어져 있었다. 자신들의 부족이 아니면 알 수 없었던 진실이 고려의 일개 하급군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영거는 남하 과정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는 자신의 뒤를 유능한 조카에게 잇게 하라고 당부하고 죽었지만, 그의 아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지. 서여진을 상대하기에도 모자라 자중지란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그 조카가 바로 우야소였다. 지금 그가 정주성 인근에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추스르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때를 봐서 고려와 손을 잡을 생각까지도 했었다. 그러나 고려는 사신을 보내 그들의 사정을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국경을 침입할 병력으로 보고 오히려 물리치기 위해 병력을 꾸렸다가 대패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내가 이기게 해주겠다.”

“네놈이? 네놈이 대체 무어라고!”

나는 여전히 손을 거두지 않았다. 우야소는 내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얼토당토않은 확신이겠지만 지금이라면 그럴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았나. 나는 척준경이다. 고려의 척준경.”

하늘이 말해주지 않겠다면 스스로 이유를 찾아내겠다.

============================ 작품 후기 ============================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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