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259화 (259/260)

#259. <외전> 그에게 영화란?

도준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는 걸 본 희주가 물었다.

“회사에서 나오래?”

“아니.”

고개를 내저으며 신발을 신은 도준이 희주가 안고 있는 율이에게 뺨을 부비며 말했다.

“잠시 좀 나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현관문을 열며 도준이 옅게 웃었다.

“촬영장.”

열린 문 사이로 도준이 나간 후, 문이 닫히자 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촬영장?”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눈빛이 되어 닫힌 현관문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 율이가 빼액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야, 어야. 우리 딸, 배고파서 그래요?”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거실로 간 희주가 율이에게 모유를 먹이기 시작했다.

***

촬영장 분위기는 나쁘지 않네.

제법 활기차다.

얼마 전 내린 눈이 얼면서 급격히 내려간 기온 탓에 체감온도가 장난 아닌데도 배우들이며 스탭들이 몸을 웅크리지 않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어머! 형부!”

저만치서 대본을 들고 대사를 외우는지 중얼거리고 있던 주연이 날 알아보고는 달려오는 게 보인다.

뿐만 아니라 기만성도 날 봤는지 잽싸게 뛰어오고 있었다.

“형님!”

자식하곤.

지난번 회식자리에서 보고 개인적으로 밥도 몇 번 먹고 술도 가끔 마시다 보니 친해졌다.

그렇다곤 해도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친해진 것치고는 꽤 살갑게 대하는 녀석이었다.

‘기불리’라는 별명답게 정이 많은 게 분명하다.

“바닥 미끄럽다. 그러다 넘어지며 어쩌려고…….”

“와아! 형부, 진짜 변했네! 나이 먹더니 잔소리 장난 아녜요! 완전 아저씨라니까, 아저씨!”

주연이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리는 모습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을 때, 기만성은 미소를 베어 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예. 형님. 조심할게요.”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진짜 눈빛이 깊고 맑다.

뭐랄까,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사람 같달까.

그래서 그런지 한창 뜨고 있는 연예인답지 않게 거만함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언제나 윗사람에게 공손하고 아랫사람에겐 친절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저러니 내가 또 마음이 안 갈 수가 없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남주랑 여주가 동시에 다치기라도 해봐라. 아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농담처럼 말하긴 하지만, 진심도 담겨 있다 보니 주연 역시 배시시 웃으며 내 팔에 매달려 웃는다.

“예, 예. 명심하겠사와요, 오라버니!”

“응?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았던가?”

“글쎄요?”

혀를 쏙 내밀고 날 촬영장 한쪽으로 이끄는 주연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확 궁금해진다.

나중에 형수한테 물어봐야겠다.

주연이 나이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아니면 회사에 가서 슬쩍 좀 볼까?

대표실에 있는 서류들 확인해보면, 프로필과 달리 진짜 나이를 알 수 있을 테니까.

“근데, 형부 요즘 자주 오시네요?”

“왜? 내가 오는 게 싫어?”

“에이, 그럴 리가요. 헤헤헤. 좋아서 그러죠!”

“집에만 있기 답답해서 그러지. 여기 나오면 니들도 보고, 이따가 같이 술도 한잔하고 좋잖아?”

“피이. 술도 잘 못 마시면서…….”

못 들은 척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경이 상고시대라서 그런가, 세트장이 어마어마하네.”

그러면서 지난번에 들었던 스토리를 떠올렸다.

상고시대,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시대 이전의 얘기라고 했었지 아마.

부여? 고조선? 대충 그 시대쯤 되는 것 같은데, 영화 속 설정은 철저히 픽션인지라 배경이 되는 나라는 가상국가라고 했다.

아무튼, 신화에서나 나올법한 느낌의 세트장은 내가 보기에도 꽤 정성을 들인 듯 그럴듯하다.

“오늘은 만성이만 찍는다고?”

“예.”

깊은 눈빛을 발하며 따라붙던 기만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서 주연을 힐끔거렸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주연이 계면쩍게 말한다.

“저, 전 오늘 촬영 스케줄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나, 나와야죠! 주, 중요한 장면이니까…그러니까, 나, 나온 거에요.”

녀석하곤.

누가 뭐랬나?

그리고 그런 말을 하려면 만성이 눈치를 보질 말던가.

아이고, 하여간 저것도 겉만 멀쩡하지 속은 허당이라니까.

픽하고 웃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시선을 돌려 다시 물었다.

“배신당한 주인공이 섬에 갇히는 장면이라고 했던가?”

“예. 절해고도에 유배되는 장면부터 들어갑니다.”

그러고 보니, 세트장 한쪽에 섬처럼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 보인다. 그 위에 지어진 초가삼간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 같아도 돌아버리겠다.

영화 속 이야기긴 하지만, 믿었던 연인과 친구의 배반으로 집안은 몰락하고 역적의 자식이 되어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있는 섬으로 유배를 간다니.

자력으로는 절대로 탈출할 수 없는 외딴 섬에서 무려 30년. 그 오랜 세월을 견디다가 그곳에서 익힌 무공과 누군가 안배해놓은 기연을 통해 간신히 돌아와 자신을 배신했던 이들에게

복수한다는 설정은 어떻게 보면 통쾌하지만, 한편으로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쳐질 만큼 처절하기까지 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말이 섬이지, 사실상 창살 없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인 곳에 갇혀서, 아니 버려진 채로 30년을 홀로 견딘다는 것.

다른 벌이 필요 없을 만큼 그 자체로 엄청난 형벌임을.

“후우!”

내가 한숨을 내쉬자, 주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온다.

“왜 그래요, 형부?”

“아니, 그냥……. 진짜가 아닌 영화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서.”

“호호호. 그러니까요. 제가 주인공이라면 아마 돌아버렸을지 몰라요.”

주연과 함께 웃고 떠들면서 살펴보니 역시 예상대로 기만성의 표정이 묘하다.

아까 전부터 얼굴이 새파랗게 변한 채였다.

뿐만 아니라 대본을 들고 있는 손도 살짝 떠는 듯하고.

저 모습 때문이었다.

내가 요새 촬영장을 드나드는 이유가.

“만성아, 괜찮아?”

“예? 아, 예……. 괜찮습니다.”

뭔지는 몰라도 가끔씩 기만성이 보이는 저런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려서…….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닌지, 주연이 걱정스럽게 묻고 있었다.

“그러네요? 기만성 씨,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요? 혹시 감기라도 든 거 아녜요?”

“아, 아뇨. 요새 좀 피로해서 그래요.”

봐라. 말까지 더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살폈지만, 뭐가 어떻게 이상한 건지 알 수가 없다.

머릿속에선 노인이 나타나 기만성을 바라보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참네, 왔으면 이유라도 명확히 알려주고 가던가.

한순간 바람처럼 사라져버리긴…….

하여간 친절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노인네라니까.

뭐, 좀 더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난 눈을 크게 뜨고 기만성이 촬영을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는 동안, 감독과 스탭들이 아는 체해와서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여전히 기만성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그를 뒤쫓았다.

흠, 아직까진 크게 이상한 점을 못 찾겠는데…….

***

“슛 들어갑니다!”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배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뱃사공 역할을 맡은 중견배우가 스탭들과 껄껄 웃으며 나타나고, 뒤이어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있었다.

음향감독은 지미집을 한 번 더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정신없는 상황이 이어지다가, 한순간 일대가 고요해졌다.

이제 곧 촬영이 시작된다는 신호 아닌 신호였다.

몇 번인가 촬영장을 드나들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레디 액션!”

감독의 외침과 동시에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내 눈은 기만성에게 꽂힌 채 떨어질 줄을 몰랐고.

***

기만성은 슛 사인이 떨어지기도 전부터 몸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큭! 사, 삼십 년이라고?’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대본상으로 보자면, 이 장면 전에 주인공 탓으로 태자가 목숨을 잃었다고 오해한 황제가 진노해서 성지를 내리는 걸로 시작한다.

- 죄인 운가람을 검묘도에 30년간 위리안치하라!

그다음이 바로 이 장면이다.

끼익, 끼익…….

뱃사공 역을 맡은 중견배우, 아니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으니까 이젠 진짜 뱃사공이라고 해야 하겠지. 아무튼,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사내가 노를 젓는 가운데 병사들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기만성을 감시하고 있다.

철썩!

밀려온 파도가 뱃전을 때리고, 그때마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기만성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눈앞에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하아, 현실에선 파도 따윈 치지 않겠지.’

모르긴 몰라도 슛 들어가기 전에 보았던 블루스크린이 배경으로 딱 서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봐도 진짜 파도다.

당연한 얘기지만, 만일에 하나라도 배가 뒤집히거나 한다면 자신은 여기서 죽는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몸을 떨고 있는데, 바다를 가득 메운 안개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유배지인 검묘도에 다다른 것이리라.

끼익, 끼익…….

섬을 발견한 사공이 한층 더 빠르게 노를 젓기 시작한다.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삼십 분 남짓 지났을까.

사공이 섬에 배를 대기 무섭게 병사들이 기만성을 거칠게 떠밀었다.

양손이 묶인 채 배 밖으로 밀려난 기만성이 모래사장에서 중심을 잃고 쓰러지지만, 병사들은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그를 일으켜 세워 짐짝이라도 되듯 끌고 간다.

털썩!

섬 한가운데에 이르러 기만성을 내던지듯 밀치는 병사들.

넘어진 기만성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병사들을 바라보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초막 앞에 그를 던져둔 병사들이 배를 타고 사라지고 난 뒤, 홀로 남은 기만성의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처음 몇 달은 자신을 배신한 친구와 연인을 원망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허망하게 죽어간 가족들과 가솔들을 떠올리며 좌절한다.

그다음엔 복수심에 사로잡혀 미친놈처럼 날뛰길 몇 달.

그러고 나선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며 또 몇 달.

하지만, 가끔씩 들리는 병사들을 빼곤 사람 그림자라곤 일 년에 한두 번이나 볼까 말까 하다 보니, 점차 지쳐만 가는 기만성이다.

그렇게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복수심조차 점차 흐려져 가고 있을 때, 기만성은 우연찮게 섬의 뒤쪽에 숨겨져 있는 동굴을 발견하게 된다.

그곳에서 기연을 얻어 무공을 익히게 되는 기만성.

30년의 세월이 유수와 같이 빠르게 지나갔다…라고 대본에는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미치겠네! 진짜!’

아무것도 없는 섬에서 혼자서 무려 30년을 지낸다는 게 이토록 힘들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하루하루 절망의 기운이 자신의 몸을 갉아먹는 걸 느끼며 그는 매일매일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두른다.

‘크윽! 젠장! 다른 사람들은 이게 촬영이라고만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에겐 아니었다.

그 증거로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엔 망망대해뿐 아무것도 없다.

감독도, 스탭도, 배우들도, 촬영장비도…오늘도 자신을 보러와 준 고주연과 도준이 형도 보이질 않는다.

더 심각한 건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놈의 촬영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무조건 대본대로다.

감독이 컷을 외치기 전까지는.

“끄아아아아아악!”

사무치도록 그리운 현실세계를 떠올리며 절규하는 기만성이었다.

***

도준이 눈을 빛낸 것은 촬영을 시작한 지 3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처음엔 어설프기만 하던 기만성의 검술이 어느 순간부터 점차 날카롭게 변하더니 어느샌가 전문가 뺨치는 수준으로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롱테이크로 찍고 있는 촬영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기만성의 눈빛이 점점 깊어져 간다.

허무와 외로움, 공포와 원망, 그리고 복수심에 미쳐 이를 박박 갈아대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영화 속의 주인공이었다.

“커어어어엇!”

마침내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지자,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들려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지 몰랐다.

“와아! 진짜 장난 아니네!”

“연기를 어떻게 저렇게 하냐?”

“실제라고 해도 믿겠다!”

“기만성 씨, 대단하네! 무슨 연기력이……. 이번 영화도 대박 나겠는데?”

그럴 테지.

도준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준 만은 알 수 있었으니까.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만성은 촬영 내내 영화 속에 갇혀 있었던 거다.

자신이 천 년 노래방에 갇혀 있었던 것처럼.

한차례 입술을 잘근 씹은 뒤, 도준이 기만성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식은땀을 흘리며 헐떡이고 있는 기만성. 그에게 말했다.

“살살 좀 하지. 무슨 연기를 그렇게 무섭게 해? 그러다 몸 축나겠다.”

“……아, 괜찮습니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기만성을 바라보던 도준이 물었다.

“근데 진짜 장난 아니네. 연기가 맞긴 하냐?”

흠칫.

기만성이 몸을 떨며 도준을 보다가 이를 악문다.

그런 채로 그가 고개를 숙였다.

“형님.”

“…….”

“제겐 영화도…….”

“……?”

“현실이에요.”

어딘지 모르게 한 맺힌 듯한 목소리에 도준은 움찔했다가 이내 기만성을 빤히 쳐다보았다.

떨리는 어깨가 보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모습도.

도준은 가만히 손을 뻗어 말없이 기만성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애써 참으며 돌아섰다.

여기까지라는 생각에.

기만성의 삶은 그만의 것이니까.

자신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기만성의 앞날에 얼마나 험난한 시련과 시험들이 놓여 있는지는 몰라도 그걸 헤쳐나가는 건 오로지 기만성의 몫이리라.

자신이 천 년 노래방을 혼자만의 힘으로 빠져나왔던 것처럼.

도준은 애잔한 눈빛이 되어 기만성을 다시 한차례 바라보곤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힘들겠지만……. 부디, 이겨내라.’

마음속으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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