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258화 (258/260)

#258. <외전> 어디서 본 적 있던가요?

전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정 할 일이 없으면 작곡이라도 하면 되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한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싶었다.

그렇다고 몇 달씩 그러고 싶었던 건 아니고, 한 달 정도? 딱 그만큼만 쉬고자 했다.

혁수 아저씨한테도 이미 그렇게 말해두었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덕분에 흔히들 잉여라고 말하는, 반백수가 되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다행이랄까, 희주도 일을 그만두고서 율이를 키우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어서 집에서도 눈치 볼 일은 없었다.

오히려 좋아한달까.

간만에 주어진 여유에 우리 세 식구는 하루종일 붙어 지내며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웅, 그래쩌요? 우리 율이가 그렇게 말을 잘해요?”

“우우웅……웅…. 아부, 아부.”

“자갸!”

“응? 왜?”

“방금 들었어?”

“뭐를?”

“율이가 아빠라고 한 거 못 들었어?”

진짜 희한한 일이다.

부모가 된다는 건.

솔직히 이맘때쯤 아이한테 바라는 거라곤 한 가지밖에 없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

그것뿐인데도, 어쩌다가 지금과 같은 경우가 생기면 이상할 정도로 아이가 기특하게 느껴진다.

“진짜?”

주방에서 김치전을 부치고 있던 희주가 달려온다.

앞치마를 두른 채 한 손에는 뒤집개를 들고서.

“진짜라니까!”

“아부, 아부…….”

“드, 들었지? 지금 아빠라고…….”

“하아……!”

희주가 한숨을 나직이 쉬더니, 이내 날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진짜네? 축하해, 자기.”

“그, 그치?”

난 더없이 밝게 웃었다.

그러곤 율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까르르르 거리는 율이.

흐뭇하게 우리 부녀를 보던 희주가 살짝 질투 어린 음성을 내뱉었다.

“율이, 너 진짜 서운하다. 엄마보다 아빠란 말을 먼저 하다니.”

“하하하하. 우리 율이가 그래쪄요? 엄마보다 아빠가 좋아요오?”

다시 말하지만 희한한 일이다.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니, 이상한 부분에서 유치해진다.

그걸 알면서도 자꾸만 이러고 있다.

“응? 자기 전화 온 거 아냐?”

“괜찮아, 괜찮아.”

주방으로 돌아가려다가 핸드폰을 가리키며 내게 말하는 희주에게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래도 받아봐. 혹시 모르잖아.”

혹시 모르긴, 무슨…….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게 보인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올해 마지막 비가 내리고 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전화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지금은 그저 아이랑 함께 시간을 보내고, 지난 일 년간 독수공방을 시킨 와이프와 같이 있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부르르르르르.

누구야 대체……?

끊어졌다가 다시금 울리는 진동에 나는 핸드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라? 내 전화가 아닌데?

“자갸! 내 꺼 아닌…….”

그땐 이미 희주가 전화를 받고 있었다.

“어, 주연아. 무슨 일……. 어머, 그래?”

능숙한 솜씨로 부침개를 부치면서도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채 전화를 받고 있던 희주가 날 힐끔거렸다.

***

“형부!”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주연.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아직도 그녀에게선 씨크릿걸즈의 막내였던 모습이 남아 있다.

나는 반가움에 손을 치켜들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군대 갔다 온 사이에 더 예뻐졌네?”

“형부도 참.”

부끄러워하던 주연이 이내 미안하다고 얘기한다.

“죄송해요. 비도 오는데, 불러내서”

“에이, 뭘……. 안 그래도 얼굴 한번 봐야지, 했어.”

“그래도…….”

“괜찮다니까, 그러네.”

의자에 앉으며 손사래를 치자, 그제야 주연이 미안한 표정을 지운다.

“요즘 일 안 하고 쉬신다면서요. 솔직히 안 나오실 줄 알았어요.”

그렇긴 하지.

정말 어지간하면 나오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주연이라면 좀 다르지.

씨그릿걸즈의 멤버들은 내게 있어서 남매 같은 느낌이니까.

같은 회사 소속이기도 하고, 형수에겐 자매 같은 이들이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팀의 막내인 주연은 어쩐지 여동생 같아서 자꾸만 신경이 쓰인달까.

아마 씨그릿걸즈 중에서 나랑 비슷한 나이인데다가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드라마 대박 났다며?”

잠시 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묻자, 주연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한다.

“대박까진 아니고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대박 맞다.

걸그룹 해체 후 배우로 전향, 전격적으로 영화 데뷔. 첫 영화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당당히 연기력을 뽐낸 주연은 차기작으로 드라마를 선택했었다.

그리고 그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아 인기몰이를 하며 차세대 스타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CF도 많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그, 그야……. 아이, 몰라요.”

여전히 부끄럼이 많은지, 두 손으로 양볼을 감싸며 다소곳이 말하는 주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렇게 숫기가 없는데, 어떻게 큐사인만 떨어지면 확 변하는지…….

연기력은 타고난 모양이다.

난 기꺼운 얼굴이 되어 물었다.

“이번에 들어갈 영화에 음악 좀 넣어달라고?”

“예. 감독님이 직접 부탁은 못하고 저한테 은근히 눈치를 주더라고요.”

“그래?”

대충 알만하다.

소속사인 HS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요청했겠지만, 아마 마루 누나가 단칼에 거절했겠지.

누구보다도 날 걱정하는 누나로선 전역 후 잠시라도 맘 편히 쉬기를 바랐을 테니까.

참네, 이럴 때 보면 진짜 엄마 같다니까.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시나리오 가져왔어?”

“여기요.”

주연이 내민 대본을 받아 한동안 읽어보았다.

“재밌네.”

“그쵸? 처음 받아봤을 때 딱 느낌이 오더라고요. 흥행할지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재밌겠다는 생각은…….”

하여간 못 말린다.

영화 얘기만 나왔다 하면 백팔십도 변하는 눈빛. 주연을 보면서 픽하고 웃고 말았다.

“일주일 뒤에 주면 돼?”

“아! 해주실 거에요?”

“안 해줄 거면 뭐하러 나왔겠어? 아, 마루 누나한텐 내가 말할 테니까, 걱정 말고.”

“헤헤. 다행이다. 제가 이러는 거 언니가 알면 저 죽거든요.”

“형수는 안 무서운가 보네?”

“앗! 소연 언니는 더 무서운데……. 안 그래도 며칠 전에 통화했는데 요즘 예은이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하아, 제가 형부 따로 만난 거 알면 당장 달려올지도 몰라요.”

흠,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예은이가 요새 좀 심하게 달리는 중이긴 하지.

말 그대로 질풍노도라고나 할까.

덕분에 형수 역시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진 상태란 걸 떠올리고 말았다.

그러곤 울상이 되어 어찌할 줄 모르는 주연을 보며 옅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막내의 서러움인 건가?

아니지.

회사에서 키우고 있는 연습생들은 둘째 치더라도 리노랑 강나리만 해도 주연보다 한참 어린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주연만 보면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주고 싶달까.

하긴, 저 커다란 눈을 글썽거리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보고 있으면 누군들 안 그럴까.

“걱정 마. 마루 누나랑 희주야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사람한텐 말 안 할 테니까.”

“고마워요, 형부! 시간 날 때 연락 주시면 제가 한턱낼게요!”

“기대해도 되지?”

“그럼요!”

“오케이. 희주한테 말해주면 좋아하겠다. 안 그래도 요즘 니들 보고 싶어하던 눈치던데.”

“호호호. 저도 그래요. 언니 본지 벌써 한 달도 넘은 거 같아요.”

“율이 보고 싶은 건 아니고?”

“에이, 그건 너무 당연한 얘기잖아요.”

일 얘기도 끝났겠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헤어졌다.

그렇게 빗속을 뚫고 집으로 돌아와 희주에게 말해주니, 의외로 희주는 기뻐해 주었다.

***

3주일 정도 지났을까?

주연이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영화가 크랭크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때쯤엔 칩거 아닌 칩거 생활을 끝내고 슬슬 연말 콘서트 준비를 할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어, 주연아. 웬일이야? 혹시 내가 준 곡들이 마음에 안 든대?”

- 아뇨! 그 반대에요! 감독님이 너무 마음에 들어하셔서……. 아참, 이런 얘기할 때가 아니지. 형부! 오늘 어쩌다 보니 회식을 하게 됐는데, 감독님이랑 스탭들이 형부 보고 싶다고

난리지 뭐에요. 이번에 주신 음악들 너무 좋다고 꼭 감사 인사 드려야 한다면서…….

찾아와도 만나주질 않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날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글쎄. 지금 희주랑 장 보던 중이라서…….”

그때, 옆에 있던 희주가 눈짓을 하는 게 보인다.

가라고?

통화소리가 새어나오는 바람에 다 들은 모양이다.

“큼, 알겠어. 어디로 가면 되는데? 응, 응. 오케이. 그럼 한 시간 뒤에 거기서 봐.”

***

흠, 투자를 제대로 받은 모양이네.

크랭크업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화를 개봉한 것도 아닌, 아직 촬영 중인데도 회식을 최고급 한우만 파는 고깃집에서 하는 걸 보니.

“안녕하세요, 김도준입니다.”

마중 나온 주연과 함께 들어가 인사를 하니, 감독을 비롯해 스탭들, 배우들까지 전부 기립해서 박수를 쳐댄다.

이것 참 민망해서.

얼굴이 살짝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주연이와 함께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인사를 건네온다.

“처음 뵙겠습니다. 기만성입니다.”

어?

순간 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뭐랄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낯설지 않은 느낌이랄까.

앞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이면서 손을 내미는 남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러시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일단 인사부터 하곤 다시 물었다.

“근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던가요?”

“아, 아뇨. 처음 뵙습니다.”

하긴, 그랬으면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요즘 기만성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요?”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연기 진짜 잘하시던데, 그래서 그런가 보네요.”

“형부도 봤나 봐요? 기만성 씨 나온 영화…….”

“봤지. 저번 영화도 그렇고, 네 데뷔작인 영화에서도 나왔었잖아? 그 뭐냐……. 왜군 장수한테 막 대들다가 목 잘리는 역할로. 그때 얼마나 놀랐는데. 기만성 씨, 진짜 연기

잘하시는 거 같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요즘 충무로의 블루칩으로 한창 뜨고 있는 친구였으니까.

나보다 서너 살쯤 어린 걸로 아는데, 연기력이 엄청나서 항간에는 메소드의 달인이란 소리를 듣는 걸로도 모자라 팬들로부터 ‘기블리’란 별명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평소엔 소탈하고 정 많은 타입인데, 촬영만 들어가면 무서울 정도로 연기에 몰입해 자신이 맡은 역할을 100% 아니 120% 소화해내면서 생긴 별명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번에 드디어 주연을 맡은 모양이다.

“지난번 영화는 잘 봤습니다.”

“아, 가, 감사합니다.”

쑥스러운지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어찌할 줄 모르는 기만성에게 잔을 내밀었다.

“한잔 받으시죠.”

“제가 따라 드려야 하는데…….”

“에이, 뭘요. 술이야 누가 따르면 어때서요.”

그때부터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기만성과는 형 동생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감독이랑 스탭들, 그리고 배우들이 다가와 몇 잔인지 모를 술을 마셨고.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혼자서 밖으로 나와서 바람을 쐬니 술이 좀 깬다.

너무 달렸나?

예전에 비해선 주량이 좀 늘긴 했지만, 여전히 술이 센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가, 아까부터 속이 불편하면서 어질어질한 게…….

“쯧, 이제 좀 살만하니까 몸을 막 굴리는 거냐?”

응?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여, 영감님!”

노인이 서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천 년 노래방을 애써 지우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아, 혹시 저한테 뭐 하실 말씀이라도……?”

내 얘기를 못들은 건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노인은 대답은 고사하고 눈길도 주질 않는다.

대신 가게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오늘은 너 보러 온 거 아니다.”

응? 이건 또 무슨…….

의아해졌지만, 일단은 노인이 던지는 시선을 쫓았다.

가게 유리창 안쪽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렇게 노인이 기묘한 눈빛으로 기만성을 바라보는 가운데, 어째선지 모르지만 내 마음속에선 기만성에 대한 안타까움이 솟구쳤다.

왠지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그 옛날의……. 천 년 노래방 시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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