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외전> 아버지의 이름으로(3)
서울은 기적의 땅이라고 불려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도시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어나 국제적인 도시로 발돋움하기까지 쌓아올린 일화들은 전설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모두 우리네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밤낮없이 피땀을 흘린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제 러시아에서 북한을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철도가 개통되게 되면 한국은 다시 한 번 재도약의 역사를 이루게 될 터였다.
당연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그래서인지 서울은 여느 대도시 못지않게 혼잡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구도심인 시청과 종로는 사시사철 안 막히는 때가 없었으며 70년대 후반부터 뒤늦게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했던 강남지역은 이제 넓은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차들과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오늘은 유난히 심했다.
강남 한복판, H 아트홀 주변. 도로는 꽉 막히다 못해서 거의 주차장이라도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창라의 빛]이라는 다소 생소하고 어려운 이름을 지닌 오페라 초연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창라가 대체 뭐야?”
좌석 2만 명 규모의 메인홀 귀빈석에 앉아서 묻고 있는 디알로에게 제롬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쯧쯧. 그러니까 한국어 좀 공부하라고 했지?”
“알았으니까, 뜻이나 좀 말해봐. 이거 한자지?”
고개를 끄덕인 제롬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설명하고 있었다.
지난 3개월 동안 도준을 비롯해 니콜 교수와 조마루가 혼신의 힘을 다해 오페라를 준비하는 동안, 어느덧 심마에서 벗어난 제롬은 예전의 상태를 되찾은 지 오래였다.
물론 조마루가 너무 바쁜 탓에 다시금 프러포즈를 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창(唱), 노래를 뜻해. 그리고 라(羅)는 그물을 말하는데 도준의 얘기대로라면 세상을 다 덮어버릴 만큼 넓게 펼쳐진 비단? 이를테면 천을 말하지. 그러니까 창라의 빛은 세상을
아우르는 노래의 빛…쯤으로 해석하면 될 거야.”
“오오! 뭔가 있어 보이는……. 큭!”
“삼촌! 좀 조용히 해요! 다들 쳐다보잖아요.”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예은이가 그 작고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허리를 쿡 찌르자, 디알로는 끙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닌게아니라 빈자리 하나 없이 꽉 들어찬 관객석 곳곳에선 레이크헬을 비롯해 많은 귀빈들을 향해 선망과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뭐, 감수성이 예민한 예은이로선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여제도 왔네?”
제롬이 돌아보며 눈을 빛내자, 콜린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도준이 초청장을 보냈으니까.”
“글쎄. 초대하지 않았어도 오지 않았을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피아노의 여제 마가렛 헤라시오네가 도준의 든든한 후원자임을. 아니 추총자란 것을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캘리를 비롯해 할리우드의 스타들도 여럿 보인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아직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밥 데일런을 위시해 아티스트들과 연예인들도 수두룩 빽빽하고.
거기에 더해 세계 각지의 정관계 인사들도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슬슬 시작하려나 보다.”
누군가 얘기한 것처럼 극장 안의 조명이 하나둘씩 꺼진 것도 그때였다.
도준이 만든 첫 번째 오페라 [창라의 빛]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커튼이 열리고 드러난 무대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신비롭게 느껴지는 동양풍의 고궁 그 자체였다.
화려함보단 어딘지 모르게 장중하고 묵직한 느낌이 드는 무대. 마치 수묵화 한 폭을 고스란히 옮겨온 듯한 모습에 희주가 감탄하며 두 손을 모은 것도 잠시. 그녀의 귓가로 웅장한
음악이 흘러들었다.
그리고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낸 주인공.
동쪽 나라인 ‘선(鮮)’의 장군가 출신 소년이었다.
희주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소년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도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음악과 함께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기에.
소년은 외조부인 대장군을 따라 북쪽 나라와의 대전투에 참전하고, 첫 출정에서 적들에게 쫓기다가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벼랑 아래로 떨어져 간신히 살아남은 뒤, 아무도 없이 홀로 수림 속을 헤매던 중 발견한 동굴은 기기묘묘했다.
발을 딛고 들어서는 순간, 놀라운 세상이 펼쳐졌으니까.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풍요로운 세상이었다.
또한, 그곳에서 만난 신선들 역시 하나같이 잘해주었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선 동쪽 산 너머에 펼쳐진 열사의 땅, 끝없이 펼쳐진 사막 끝에 산다는 화우(火牛)라는 괴물의 뿔이 있어야만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 수 있다는 거였다.
그것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다는 얘기에 절망한 소년이 신선들에게 무예와 병법 그 외에도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는 가운데, 때때로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장면에서 희주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태중 혼약한 사이였던 약혼녀를 떠올리며 밤마다 달을 쳐다볼 때 관객석 여기저기에선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결국, 소년은 모든 신선들이 만류함에도 길을 떠난다.
사막을 횡단하는 와중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런 와중에 만난 부족들의 도움으로 끝내 도착한 곳에서 사투를 벌인 결과 힘겹게 화우를 처치한 소년.
하지만, 그러는 동안 천 년이란 시간이 지나버렸다.
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바깥으로 나가는 걸 선택한 소년. 그렇게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온 소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굴 안 세상과 달리 현실에서의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았던 것.
그렇다고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제국은 전쟁에 져서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고, 자신의 가문은 모함까지 받아 역적으로 몰려 멸문하고 말았던 것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외할아버지와 한밤중 몰래 황궁을 찾은 소년은 화우의 뿔로 만든 검을 내보이며 적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을 황제에게 맹세하고…….
약속대로 소년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만, 외할아버지는 그 와중에 전사하고 만다.
소년 또한 무사할 수만은 없었다.
깊은 상처로 인해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져든 소년. 그런 소년의 곁은 지키며 매일매일 노래하는 약혼녀의 모습에 관객들은 가슴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었다.
희주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이미 이야기에 푹 빠져서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부디 소년이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그리고 기적은 일어났다.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약혼녀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녹아가던 화우의 뿔은 끝내 사라지고…….
빛으로 화해 하늘로 올라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순간, 소년, 아니 이제는 청년이 된 주인공이 깨어난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청혼을 거절하며 청년의 곁은 지켜온 여인과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을 맞이한 밤.
하늘에 떠올라 있던 별 하나가 어둠을 뚫고 내려와 여인의 몸속으로 깃들었다.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그때 주인공은 깨닫는다.
그 별은 다름 아닌 화우의 뿔이 하늘에 올라 변한 것이었음을.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아이가 태어나 힘찬 울음을 터뜨리고, 이제 청년이 된 소년이 아이를 안고 신선들에게 배웠던 노래를 부르며 막이 내려간다.
***
눈물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얼굴로 도준을 찾은 희주는 그를 보자마자 맹렬히 달려와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희주는 자신조차 왜 이러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자꾸만 눈물이 나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도준을 알고 있는 모두가 비슷한 반응이었다.
아니, 오페라를 본 관객들은 웃으면서도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궁금해했다.
“흑흑……. 근데, 그 음악은 뭐야?”
누군가 물었고, 도준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다가 대답했다.
“아프리카 부족들에게서 전승 되어온 노래에서 영감을 얻었어.”
“아, 그랬구나!”
다들 어쩐지 하는 눈빛들이 되어 도준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들어본 노래들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음악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가슴을 파고드는 선율에 오페라를 보는 내내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던 그들이었다.
“후우, 리허설 때도 느꼈지만…….”
니콜 교수는 도준을 자랑스럽다는 눈빛이 되어 그를 끌어안았다.
“내 인생에서 널 만난 건……축복이란다.”
도준이 니콜 교수, 아니 공연 직후 자신을 찾아온 모두를 한명 한명 바라보다가 깊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저야말로…….”
숙인 고개 아래에선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도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모두를 만나 행복했습니다.”
***
도준은 약속을 지켰다.
그가 만든 오페라 [창라의 빛]이 전 세계를 돌며 순회공연을 하는 동안 쉼 없이 작곡하고 또 조마루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노래를 녹음하는 사이 반년이 지났을 때, 군입대를 지원한
것이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 언론들이 일제히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김도준, 스스로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
[한창 활동기에 접어든 그가 잠시 우리 곁을 떠나야 하는 이유.]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고 말하는 김도준.]
[평화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자신의 가족을 지킬 힘조차 없는 사람이 어떻게 평화를 부르짖겠나. 자청해서 총을 드는 까닭을 묻는 기자에게 한 김도준의 일침.]
[김도준, 득녀.]
[허니문 베이비가 분명한 딸을 안고 웃고 있는 김도준.]
입영 당일.
도준은 이제 막 태어난 딸을 안고서 따라나서는 희주를 돌아보았다.
앙증맞은 손가락을 꼬물거리고 있는 딸을 보며 도준이 말했다.
“아빠, 금방 다녀올게요. 우리 율이도 아빠 없다고 울면 안 돼요?”
“……우아아아아앙!”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울음을 터뜨리는 딸을 도준이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도준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는 희주였다.
그러면서 말한다.
“생각해봤는데, 나 잠시 일을 쉴까 해.”
뜻밖의 얘기에 도준이 의아해하자, 희주가 옅게 웃어 보였다.
“나도 율이한테 뭔가를 해주고 싶어서.”
쑥스럽다는 듯 한차례 웃은 희주가 다시 말했다.
“……란 건 핑계고. 아이가 클 때까지만이라도 곁에서 지켜보고 싶어졌어.”
이유를 묻지 않는 도준이었다.
그럼에도 희주는 얘기했다.
“자기…….”
“……?”
“그 오페라……. 나랑 율이한테 들려주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도준은 말없이 희주를 바라보았다.
희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얘기를 이어갔다.
“보는 순간 알았어.”
“…….”
“선물이란 걸. 아니, 고백인가?”
잡고 있던 도준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갖다 붙이며 희주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동시에 입가엔 미소 한줄기가 떠올라 있었다.
“그거……. 자기 얘기지?”
도준이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희주를 끌어안았다.
“우애애애앵…….”
엄마와 아빠 사이 끼어서 답답했는지, 율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도준이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러곤 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율아. 아빠가 우리 딸 사랑하는 거 알지?”
그러자 율이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웅아…웅아.”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도준의 얼굴을 만지는 율이었다.
그런 두 사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희주는 행복한 얼굴이 되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