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254화 (254/260)

#254. <외전> 아버지의 이름으로(1)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이놈의 손발은 시기적절하게도 오그라드는 걸 멈추지 않는다.

밥 데일런이 이래서 어지간한 일에는 나서질 않는 모양이다.

진짜 민망해 죽겠다.

뒤따라 붙으며 찍고 있는 카메라는 그렇다 치고, 나와 희주가 빈민촌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나눠주는 등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아니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하고 나면 꼭 달려와 묻는 리포터. 마치 날 무슨 천사인양 혹은 정의의 사자인양 대하는 그 태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김도준 씨, 이번 여행 기간 동안 ONEZ 재단과 함께 아프리카인들에게 지어준 집만 벌써 백여 채가 넘어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난 기가 막혀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여성 리포터를 바라보았다.

이것 참, 아무리 대본에 있는 대로 묻는다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잖아?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 수 있으니까요.”

“예?”

손발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등 뒤로 숨기면서 애써 대답했더니만…….

뜻밖의 얘기였던 걸까?

리포터인 고영미는 날 멍하니 쳐다보다 뒤늦게 멘트를 친다.

“그, 그러시군요. 그럼, 역시 안타까운 마음에…….”

미치겠다.

난 그녀의 말을 더 이상 들어주길 못하겠다고 판단하곤 손을 들어 올렸다.

이런 식이면 때려죽여도 방송에 내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내가 보낸 신호에 반응해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멈췄다.

JTBS에서 방송 얘기를 꺼낼 때부터 사전에 약속했던 사항이었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언제든지 촬영을 거부할 수 있다는.

카메라가 꺼진 걸 확인하곤 고영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기, 고영미 씨. 고영미 씨가 방금 어떤 의도로 물으신 건지는 알겠어요. 아, 혹시라도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그렇다고 제가 잘났다고 이런 얘기 드리는 것도 아니고요. 그

뭐랄까. 대본대로 가시는 건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좀 불편하네요.”

“아! 죄, 죄송합니다! 선배님!”

데뷔 3년 차에, 재작년엔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대박 나면서 나름 스타덤에 올라 이번에 JTBS에서 전격적으로 투입한 그녀였다.

그렇기에 꽤 콧대가 높을 걸로 예상했었는데, 생각보다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친근한 성격이다.

한마디로 성격이 좋다.

그래서 그런지 꼬박꼬박 날 선배라고 부르고 있는 건 좋은데……. 가끔은 날 어려워하는 게 느껴진다.

따지고 보면 동종 업계도 아니고 나이도 나랑 서너 살밖에 차이가 나질 않아서 이렇게까지 대우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걸 또 콕 짚어서 얘기하면 오히려 난감해할까 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뇨, 아뇨. 고영미 씨를 탓하자고 하는 얘기는 아니에요. 다만…….”

어이구야!

지난번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이는 것도 문제지만, 이번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날 바라보는 것도 문제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말했다.

“세상에 저 같은 사람들 많아요. 아니, 저는 이름도 못 내밀죠. 가깝게는 저희 어머니만 해도 소외된 이들에게 허기를 채워줄 죽 한 그릇, 비바람을 막아줄 천막 하나라도 더

세워주기 위해 얼마나 애쓰시는데요. 진짜 모르셔서 그렇지. 지금 시각에도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시는 분들은 셀 수가 없을 정도예요.”

“아……. 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아,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제 말은요, 그분들을 비롯해 저 역시도 딱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 이러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아까도 말했듯이…….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에요. 그저 그뿐이에요.”

나는 허름한 판잣집 사이로 뛰어다니면서도 햇살 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어려운 얘기가 아니잖아?

저 아이들이 인류의 미래라는 뻔한 얘기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세계 평화를 위해 이 한 몸 바쳐 이바지하겠다는 거창한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저 모습을 보는 게 좋은 거다.

반대로 말하면 고단한 인생으로 인해 시름 가득한 얼굴을 보는 게 싫은 거고, 또 부모·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플 따름인 거다.

왜냐면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사람이니까.

일부러 그러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

단지 그뿐이다.

그걸 이해 못 한다면…….

“고영미 씨, 전 당신 선배는 아니지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네요.”

또, 또……. 제발 그렇게 눈 좀 빛내지 마라.

이 여자는 우리 희주 눈초리가 변하는 거 안 보이나?

아니 내가 왜 신혼여행을 와서 와이프 눈치를 봐야 하는 거냐고.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찔려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희주를 힐끔거리며 얘기했다.

“일은 일이니까, 방송도 좋고 대본대로 하는 것도 좋아요. 그치만 한가지는 잊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피부색이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사는 방식이 우리랑은 달라도 저들 역시

사람이에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우는…….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으면 저들과 친구가 되어봐요.”

진심이었다.

비록 여기 머물다가는 건 잠시뿐이겠지만, 세상이라는 게 TV에서 보여주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얘기했다.

파르르르.

응?

어째서 눈썹을 떨고…….

어라? 고개는 또 왜 숙이는데?

우, 우는 거야?

어깨까지 살짝 들썩이고 있는 고영미를 보면서 난 어찌할 줄 몰랐다.

저만치에선 희주가 뭔가 새치름한 눈길로 이쪽을 쳐다보는 중이었고.

그때, 고영미가 고개를 쳐든다.

하이고…….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눈물이 맺혀 있다.

설마 도덕 교과서 같은 내 얘기, 그러니까 나이 좀 먹었다고 나도 모르게 꼰대 기질이 튀어나와서 설교 아닌 설교를 늘어놓은 내 말에 감동 먹은 건 아닐 테고…….

어찌 되었든 그녀를 안아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섣불리 위로할 수도 없는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 그럴게요!”

꽉 하고 주먹을 움켜쥐더니 소리친다.

그러더니 소매까지 걷어붙이며 눈빛이 이글이글…….

뭐, 뭐야 이 여자!

아까와는 좀 다른 의미로 무섭다.

게다가…….

“역시 선배님이세요!”

부담 백배의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외치는 그녀였다.

하아,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느낌인데?

***

좀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나쁘지 않다.

고영미는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이 더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태도는 백팔십도 바뀌어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현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희주를 따라다니며 아이들과 어울리더니, 나중엔 함께 온 ONEZ 소속의 의료진들과 함께 환자들도 볼보고 촌락의 잡다한 일들을 돕기까지 했다.

물이 귀한 곳인 만큼 멀리서 물을 떠 오는 일은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는데도 자청해서 하기도 하고, 식사 때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 줄 음식을 마련하기도 했다.

물론 안다.

그런다고 해서 이곳의 사정이 눈에 띌 정도로 바뀌지는 않을 거라는 걸.

그저 한차례 지나가는 온정의 손길을 뿐임을.

그래도 기껍다.

이렇게 해봐야 결국 소용없잖아…라고 생각하고 안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내가 그러하듯, 그녀 역시도 느끼길 바랄 뿐이다.

그 막막한 공간.

천 년 노래방에서도 그랬고, 무의식 속에 갇혀 있을 때도 그랬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절망감에 휩싸여 무너졌을 때, 오직 바라던 것.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줬으면 하는 바람.

아니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걸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가.

아마도 그때의 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더라면 결국 벗어나지 못했을 거다.

예은이를 시작으로 지치지 않고 찾아와 말을 걸어준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여기 있지도 못했을 테지.

“무슨 생각해?”

한창 아이들과 어울려 까르르 웃고 있는 고영미를 바라보고 있을 때 희주가 다가와 내 옆에 쪼그려 앉는다.

“응, 그냥.”

스윽.

희주가 고개를 기울여 내 어깨에 기대어 온다.

그러곤 말없이 쳐다보았다.

별 볼 일 없을지도 모르는 메마른 대지위에 흩어져 있는 허름한 건물들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희주야.”

“응?”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 행복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을 느끼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말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

희주는 말없이 듣고만 있다.

역시 현명한 여자다.

아니, 고마운 사람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 옆에 머무르며 지금처럼 말없이 손을 잡아줄 줄 아는, 그런 사람이다.

난 고개만 살짝 돌려 희주의 얼굴을 바라보곤 웃어 보였다.

“가수가 된 게 다행이라고.”

“자긴 뭘 해도 잘했을 거야.”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고…….”

아련히 떠오르는 지난날들이 머릿속에 스쳐 간다.

그 속에는 외할아버지도 계셨다.

꼬물거리며 잠들어 있던 내 손을 잡아주던 아기 때의 예은이도 있었고.

“언제라도 마음을 나눌 수 있잖아. 노래를 부르면…….”

“…….”

“그게 그렇게 고마운 일인지 예전엔 몰랐었던 거 같아.”

희주의 손을 꼭 잡았다.

“나……. 되게 외로움 많이 타는 남자거든.”

“……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손을 놓고 희주의 어깨를 감싸 끌어안았다.

힘없이 딸려와 내 품에 안기는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옅게 웃어 보였다.

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더불어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나로서 남을 수 있었다는 것도.

그게 아니었더라면 난 여전히 무의식 속에서 헤매고 있었을 테지.

그렇기에 느끼는 것이다.

매 순간순간 느닷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을, 그리고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오는 절망을 노래라는 매개로 교감함으로써 나뿐만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는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걸.

그래서 난…….

“……좋네.”

뜨거운 햇살 아래 모래가 섞인 바람조차도 행복하다.

***

한국으로 돌아온 후, 정신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을 전부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회사에서 선별한 곳과 몇 차례 만났고, 그 와중에 내 결혼식에 참석해준 이들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몇 분은

직접 찾아뵈었다.

물론 희주네 집에 가서 정 회장님과 장인 장모님을 뵌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러는 동안 리노가 앨범을 발표했다.

콜린이 프로듀서를 맡고 디알로가 피처링까지 참여한 앨범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인기를 끌었다.

타이틀 곡이 발매 첫주에 한국을 비롯해 빌보드, 그리고 세계 곳곳의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레이크헬이 신곡을 발표. 말 그대로 광풍이 되어 세상을 휩쓸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노래가 묻혔다며 리노가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게 느껴지는 것이 녀석의 얼굴엔 자기 노래를 발표했을 때보다 더한 자부심과 기쁨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뒤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때 JTBS에서 방영되었다.

나와 희주의 신혼여행기, 즉 ‘김도준이 부르는 아프리카’의 1회차가 전파를 탄 것이다.

- 할 수 있으니까요.

으으……. 미치겠다.

저 땐 내 나름대로 진심이 되어 한 말이었는데, 방송으로 보니 뭔가 잘난척하는 것도 같고…….

아무튼, 민망해 돌아버리겠다.

난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그런 나를 형이 놀려대는 가운데, 예은이가 눈빛이 초롱초롱해져서 TV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하아, 역시 이런 건 나한테 안 맞는다.

내가 다시는 이런 거 찍나 봐라.

결국, 난 더 이상 보질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거실 소파에 참새들처럼 주욱 앉아서 방송을 보고 있던 가족들이 어디 가냐는 눈빛이 되어 날 올려다보았지만, 애써 무시하고 방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곤 고개를 내저으며 책상에 앉았다.

이미 분가한지라 여긴 이제 내방이긴 해도 머무르진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여전히 어머니께선 방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계셨는데, 덕분에 이렇게 가끔씩 집에 올 때면 옛날 생각을 하면서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드륵.

서랍을 열자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쓰던 물건들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특히 작은 상자 하나가 눈에 띈다.

달칵.

상자를 열자, 코인 네 개가 보였다.

하프 문양이 새겨진 코인.

결혼하고 희주와 함께 살게 되면서 이것도 가져갈까 했지만, 그대로 놔두었다.

딱히 손을 탈 일이 없기도 하고, 더 이상 천 년 노래방에 갈 일도 없으니까.

뭐, 노인한테선 언제고 한번 노래방을 사용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내긴 했지만.

사실 이제와선 다시 노래방에 가지 않는 이상 코인을 쓸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날의 일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줄 뿐 별다른 가치를 지니지 않는달까.

그렇긴 해도, 역시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의 나는 그날의 내가 있었기에 가능한 거니까.

난 코인을 만지작거리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희주가 들어왔다.

“뭐야, 그건?”

내가 쥐고 있는 코인을 보며 희주가 묻길래 웃어 보였다.

“노래방 코인.”

별거 아니란 듯이 상자 안에 코인을 넣고, 서랍을 닫았다.

그 사이 희주는 내 곁으로 다가와 가만히 내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곤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얘기했다.

“들려?”

“응? 뭐가?”

내가 올려보려 하자, 희주는 머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곤 오히려 자신의 배에 더욱더 밀착시킨다.

왜 그러나 싶지만, 그래도 묻지 않고 그대로 따라주고 있을 때였다.

“나 아기 가졌대.”

순간 눈이 커지고 말았다.

“저, 정말?”

“응.”

고개를 끄덕이는 희주.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잡고 다시 물었다.

믿기 어려워서.

아니, 가슴이 너무 벅차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린다.

“지, 진……짜?”

말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희주였다.

와락.

나도 모르게 희주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곤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온몸이 떨리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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