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외전> 제롬의 도전(2)
역시 한국 속담은 기가 막히다.
젠장, 베릴 보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놀렸었는데, 내가 딱 그 짝이라니.
여학생들과 헤어져 돌아온 뒤, 노트에 계획을 쓰고 지우길 십여 차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가 이렇게 머리가 나빴나?
어쩔까?
베릴이 했던 것처럼 해볼까?
막 시청 광장에서 전광판 띄우고 노래 부르면서 프러포즈해?
하아……. 그랬다간 분명히 조마루가 질겁을 할 텐데.
역시 그건 안 되겠다.
그럼 어쩐다?
“아우! 머리 아파!”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린다.
“누구…….”
“어, 나야.”
디알로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디알로가 문틈 사이로 머리를 쑥 들이민다.
그러곤 묻는다.
“혹시 오늘이 그날이냐?”
이 자식이!
“뭔 그날!”
“너 가끔씩 히스테리 부릴 때 있잖아? 오늘이 그날이냐고.”
미친!
저걸 친구라고…….
한숨을 푹 내쉬곤 손짓했다.
“할 말 있으면 얼른 하고 가.”
안심했는지 디알로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뭔 고민을 하길래 그래?”
“내가 뭘.”
“너 지금 얼굴 어떤지 모르지?”
“…….”
“좀비야, 좀비. 잘하면 물겠다.”
다시금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물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뭔 고민인지는 몰라도 털어놔 봐. 이 형님이 들어줄 테니까.”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봤다.
곰처럼 커다란 덩치에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가 보인다.
순수함이 팍팍 느껴진달까.
그래서 더 믿음이 안 간다.
뭐랄까.
숙맥?
아무래도 이 자식한테 연애 상담을 하는 건 스스로 삽 들고 무덤을 파는 느낌이랄까.
차라리 유진이랑 얘기해볼까도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놈은 몰라도 그놈은 안된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듣자마자 비웃을 테니까. 게다가 만일에 하나라도 프러포즈가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내가 죽을 때까지 우려먹을 게 뻔하다.
그러니 유진은 패스.
그럼 콜린이랑…….
됐다. 그놈이나 나나 거기서 거기지.
도준이한테 물어볼까?
아차, 아직 신혼여행에서 안 돌아왔지.
그럼 베릴……. 관두자. 그놈이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을까?
난 가만히 시선을 들어 디알로를 바라보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하는 수 없나.
“저기, 디알로…….”
“응.”
아, 진짜 저놈의 눈동자. 맑기도 하지.
진짜 믿음이 안 가네.
“실은…….”
몇 번이나 망설이느라 머뭇거리는 바람에 지금의 내 상황을 설명하는데 무려 삼십 분이나 걸렸다.
“흠, 그러니까 네 말은……. 조마루 지부장이 좋다? 그런 얘기인 거야?”
예상대로 디알로는 비웃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쓸만한 계획을 내놓지 못한다는 게 문제일 뿐.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실현 가능성이 낮은 얘기들만 늘어놓는 중이었다.
“이런 거 어때? 러브 리얼리티에서 나온 것처럼 스케치북에다가…….”
“야이 씨! 장난해? 그게 언제적 수법인데!”
“왜애! 너도 알잖아? 원래 그거 밥 데일런이 뮤직 비디오에서…….”
“됐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오그라들 거 같아.”
“흠. 그럼 이건?”
“……?”
“그러니까, 무작정 조마루를 차에 태우는 거야. 왜 있잖아? 옛날에 뉴욕에서 도준이 납치했을 때처럼. 그러곤 한강 변의 도로를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리는 거지.”
“……설마, 나랑 결혼 안 해주면 죽는다고 징징거리는 컨셉은 아니겠지?”
“에이. 날 어떻게 보고.”
어떻게 보긴.
딱 그렇게 보지.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일단 참고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은?”
“그다음은……에또……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들판에서 차를 멈춰 세워. 그때쯤엔 이미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서 석양이 지고 있지. 어둑어둑해진 들녘에 둘만이 남겨진 상황. 캬! 뭔가
분위기 있잖아?”
“그렇다 치고. 그다음엔 어떻게 하면 되는데?”
“뭘 어떡해? 미리 장치를 해놔야지.”
“장치?”
“몰라? 천 개의 별?”
“……촛불이라도 켜라고?”
“촛불이 되었든, 전구가 되었든 간에 네가 신호를 주면 우리가 불을 켜는 거야. 그때 맞춰서 넌 노래를 하는 거지. 아, 그전에 차 트렁크를 짠! 하고 열면……. 크크크, 풍선이
날아오르면서…….”
“하아.”
결국,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기껏 생각한다는 게…….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들판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는 둘째치고라도, 어느 한구석 참신한 데가 없다.
고전도 이런 고전이 없달까.
조마루가 얼마나 까다로운 여자인데…….
“됐다. 그냥 나 혼자 생각할래.”
“왜애애애! 좋기만 하구만!”
“예, 예. 너님 프러포즈하실 때 많이 애용해주시고요. 머리가 아파서 한숨 잘 테니까, 이만 자리 좀 비켜주시와요.”
“그, 그럴래?”
디알로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간 뒤, 난 침대에 몸을 뉘인 채 눈을 감았다.
“후우. 뭐 끝내주는 거 없을까? 막 심장이 벌렁거리고,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얼마나 뒤척였을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를 굴러다니던 나는 한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그래! 그거다!”
웃음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절망 뒤엔 작은 감동도 크게 다가오는 법이지!”
고민이 되긴 했다.
“아씨! 너무 감동하면 안 되는데!”
흐뭇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이거라면 통할 거야!”
그래! 난 믿는다.
진심은 통한다는 걸.
“분명 내 마음이 전달될 거야.”
도준이 그랬듯.
베릴이 그러했듯.
나 역시 그러하리라.
결심을 굳히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마음이 편해지니까 곧바로 잠이 쏟아지는구나.
급격히 몰려드는 수마에 금세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
조마루는 미팅 도중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에 화들짝 놀랐다.
‘응? 디알로네?’
방송사 관계자들하고 미팅하고 있는 거 알고 있을 텐데?
의아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진 않았다.
얼른 통화 불가 메시지를 보내곤 전화벨도 무음으로 돌려놨다.
지금은 그런 전화를 받을 때가 아니었으므로.
“지부장님, 저희 좀 살려주십시오. 예?”
“하아, 진짜 왜 이러세요. 도준이 이럴 때라도 좀 마음 편히 쉴 수 있게 해줘야죠. 안 그래요?”
“그렇죠. 그렇긴 한데……. 컨셉이 너무 좋잖아요. 국장님도 어떻게 아셨는지, 이거 꼭 성사시키라고 난립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듯하다.
박 피디는 애가 타는지, 금방이라도 엎어져 손이고 발이고 싹싹 빌듯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마루로선 선뜻 알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 그러니까 왜 하필이면…….’
신혼을 여행을 가도 꼭 그런 데로 가냐고.
아니, 아프리카로 간 것까진 좋다.
그럼 그냥 거기서 사바나라도 돌면서 코끼리라든가 기린이나 좀 구경하다가 올 것이지 뭔 난민촌을 돌며 자원봉사를 하는 건지.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떻게 생애 한번 가는 신혼여행마저 이슈를 만들어내는 거야.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미 늦었다는 거 아시잖아요. 지금 팀 꾸려서 출발해도 도준이 따라잡을 수 없다니까요.”
“알죠.”
“아시면서…….”
“에이, 왜 이러세요. 저희도 듣는 귀가 있습니다. HS 측에서 도준 씨 신혼여행에 카메라 딸려 보낸 거 다 압니다.”
“그거야 걔들 기념촬영차 보낸 거고요. 그걸 어떻게 방송용으로 씁니까?”
“안될 건 또 뭐 있습니까? 여기 송 작가랑 제가 붙으면 끝내주게 편집할 수 있다니까요!”
진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조마루는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박 피디가 승부수를 띄웠다.
“오케이!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
“일단 저희 측에서 촬영팀 급파하고요. 앞서 HS 측에서 도준 씨 촬영한 거랑 해서 편집한 후, 검수받겠습니다. 그리고…….”
“…….”
말끝은 흐리며 결연한 의지로 눈을 빛내는 박 피디.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판권은 HS 쪽에서 갖는 거로 하고, 대신 저희 방송만 하게 해주세요. 그럼 되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파격적인 조건이었음에도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조마루였다.
과연 도준이 허락할지도 미지수였고, 설사 허락한다고 해도 정말 이래도 되는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까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니라 정말 이번만큼은 도준이 마음 편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길 바라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박 피디 말마따나 컨셉이 너무 좋다.
세계적인 스타인 도준.
게다가 거진 10년간이나 잠들어 있던 도준이었다.
그런 도준이 깨어나서 콘서트를 한 후 결혼했다.
그러곤 떠난 신혼여행이 아프리카 빈민들을 구호하는 자원봉사활동이다.
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들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원주민들의 토속 음악을 즐기며 매일 밤 새로운 곡들을 국수 뽑듯 뽑아내는 중이라고.
전 세계에 포진되어 있는, 이제껏 도준이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길 기다려온 이들의 갈증에 단비가 될 게 뻔하지 않은가.
당연히 방송은 전파를 타기 무섭게 대박을 칠 거고.
한참 동안 묵묵히 고민하던 조마루가 한숨과 함께 얘기했다.
“일단 좀 쉬죠. 머리가 다 아프려고 하네요.”
“그러시죠. 요 앞에 국밥 잘하는 집이 있는데 저녁부터 먹고 다시 얘기하시죠.”
며칠 동안 승강이를 벌이던 얘기인지라, 오늘 안에 어떡해서든 결론을 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조마루는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오늘도 JTBS 방송국의 간판 피디인 박 피디랑 송 작가와 끝날 것 같지 않은 실랑이를 하다가 잠시 쉴 때였다.
조마루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보곤 기겁하고 말았다.
‘여, 열두 통?’
모두 디알로에게 온 전화들이었다.
전화를 무음으로 돌려놓은 지 20분쯤 되었나?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 짧은 새에 12통이나 전화를 한 거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그녀는 얼른 디알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죄, 죄송한데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만 하시죠. 제, 제…제가 좀 급한 일이 있어서요.”
손까지 벌벌 떨며 얘기하는 조마루를 보며 박 피디와 송 작가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알겠다고 얘기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진정 좀 하세요.”
물까지 떠서 주며 조마루를 안정시킨 그들은 떠나가는 그녀에게 운전 조심하라는 당부까지 해주었다.
그만큼 조마루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하아…….”
아닌게아니라 방송국 건물을 벗어나 주차장에 이르른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얼른 차에 올라탔다.
부아아아아앙.
무서운 속도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빨간색 스포츠카였다.
***
다다다다닷!
로비로 뛰어드는 발소리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마루는 하얗게 질리다 못해 새파래진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디알로를 발견하곤 재빨리 다가갔다.
“제, 제롬은요?”
“이쪽으로!”
대답 대신 서둘러 달리기 시작하는 디알로를 따라 달리는 조마루의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엘리베이터는 왜 이렇게 안 오는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녀가 되물었다.
“어떻게 된 건데요?”
“가, 가보면 압니다.”
“하아! 대체 이게 무슨……. 왜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굴렀다고?
그리고 의식 불명?
사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터였다.
제롬이 그 정도로 심각한 상태라면 호텔이 아니라 병원으로 직행했어야 한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을 텐데, 지금의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솔직히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다행이랄까.
하마터면 방송국에서 그대로 주저앉아 정신을 잃을 뻔했었으니까.
도준이 쓰러진 이후, ‘의식불명’이란 단어 자체가 알게 모르게 트라우마로 남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후욱, 훅…….”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멘탈이 무너지려는 걸 애써 참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가 내려왔다.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든 그녀는 미친 듯이 버튼을 눌러댔다.
그 모습을 뒤에서 디알로가 묘한 눈빛이 되어 바라보고 있었지만, 조마루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십 년 같은 몇 분이 지나고 제롬이 묵고 있는 7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자, 그녀는 디알로가 손쓸 틈도 없이 뛰쳐나갔다.
그러곤 정신 나간 여자처럼 내달려 객실로 뛰어들었다.
벌컥!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
컴컴한 객실.
암막 커튼이 창이란 창은 모조리 가리고 있는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 암흑의 공간에서 조마루는 그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때였다.
반짝!
객실 가득 별빛이 떠올랐다.
꼬마전구들이 어둠 속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가운데, 기타 음이 들려왔다.
띠링.
현란하진 않지만, 감미로운 선율이었다.
그렇다.
상황이 지금과 조금만 달랐더라면 어쩌면 달콤하게 느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뒤이어 흘러나온 노랫소리도 마찬가지였다.
-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대만을 진정으로.
은은하게 어둠을 밝히는 별빛 속에서 제롬이 기타를 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조마루를 향해 더없이 따스한 눈빛을 보내면서.
- 부디 받아줘요. 나의 간절한 마음을.
띠링…띠리링……띠리리리링.
귀를 파고드는 부드러운 노랫소리와 누가 들어도 감탄이 나올법한 기타 음이 객실을 가득 메운 가운데 제롬이 조마루 앞에 이르렀다.
- 사랑해요. 사랑해요. 이 세상 누구보다.
천천히 무릎을 꿇는 제롬.
그 앞에서 조마루는 오도카니 선 채로 망부석이 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롬은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조마루를 올려다보며 옅은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달칵.
뿐만 아니라 품에서 꺼낸 상자를 열어 앞으로 내밀기까지 한다.
반지.
백금으로 이루어진 링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가 어둠 속에서도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그 모습을 객실 문 바깥에서 훔쳐보고 있던 디알로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순간이었다.
멍하니 반지를 쳐다보고 있던 조마루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제롬…….”
흐뭇한 표정이 된 제롬이 반지를 좀 더 앞으로 내밀었을 때, 조마루가 물었다.
“계단…….”
“…….”
“후욱. 계단에서 구른 거 아니었어?”
조마루의 표정을 볼 수 없었던 제롬은 여유로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니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걱정한 거야? 조도 참……. 지금 상황 보면 몰라? 하하하. 서프라이즈하긴 하지. 조! 내 청혼을 받……. 헙!”
턱!
제롬은 숨이 막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조마루가 내민 손이 제롬의 멱살을 움켜잡고 있었으니까.
뿐만 아니다.
휙 하고 바람이 이는 순간, 제롬은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느꼈다.
쿵!
“꺼억!”
등판을 때리는, 아니 등이 바닥을 때리는 순간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건 고통 축에도 들지 못했다.
어느새 조마루가 덤벼들더니 그대로 두 다리로 제롬의 머리를 감싼 채 조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끄어……! 조…조…조! 나……주, 죽……죽어!”
“이 망할 자식아!”
“끄어어어억! 사, 살……끄으윽!”
“차라리 죽어어어어어어!”
살의가 가득 느껴지는 고함이 객실을 가득 울리고 있을 때, 객실 밖에선 디알로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부들부들.
몸을 떨던 디알로가 살금살금 뒤로 물러나며 뒤늦게 떠올렸다.
조마루가 태권도 3단, 유도 2단에 레슬링을 비롯한 각종 격투기에 정통하다는 걸.
지금 조마루가 걸고 있는 기술이 아마 헤드시저스였지?
두려움에 낯빛이 새카매져서 뒤로 물러난 디알로가 뒤도 안 돌아보고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벗어났다.
“끄어어어어어어어어어!”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렀을 때, 들려온 참담한 비명에 디알로는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무섭게 몸을 던지며 빌었다.
부디 친구가 목숨만은 건질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시각, 객실 안에선…….
조마루에 의해 저만치 내동댕이쳐진 제롬이 컥컥 대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제롬에게 조마루가 으르렁거렸다.
“한 번만 더 이딴 짓 했단 봐!”
서늘한 시선으로 제롬을 노려보며 그녀가 단호하게 얘기했다.
“다시는 내 얼굴 못 볼 줄 알아!”
“그, 그런……. 하아, 알았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제롬. 그 모습이 꼭 비 맞은 채 떨고 있는 강아지같이 처량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조마루는 조금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섰다.
차갑다 못해서 냉랭한 바람이 부는 듯했다.
그렇게 객실을 나서는 조마루를 제롬이 쓸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흠칫.
조마루가 걸음을 멈추자, 제롬이 움찔거렸다.
뭐가 또 남았나 싶어서.
그때, 조마루가 돌아보지 않은 채 나직이 말했다.
“프러포즈…….”
“……?”
“하려면 제대로 좀 하든지.”
끝에 가서 살짝 흐려지는 음성만을 남겨놓은 채, 뭐가 그렇게 바쁜지 조마루가 바람처럼 객실을 빠져나간 후, 제롬의 얼굴 위로 햇살 같은 미소가 떠오르더니 천천히 번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