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외전> 제롬의 도전(1)
내 이름은 제롬 휴이.
레이크헬의 베이시스트다.
또한,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도준의 베스트 프랜드이기도 하다.
더불어 한국통이기도 하지.
처음에는 흥미로 접근했던 건데 어느새 어지간한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에 정통해졌다.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한 달에 한 번은 한국을 찾고 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가장 친한 친구인 도준이 쓰러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도 있지만, 지금에 와선 다른 이유가 더 크다.
“조! 지난번에 알려준 사투리들이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좀 봐줄래요?”
“아, 미안. 나 지금 도준이 리노 앨범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조, 내가 끝내주는 식당 찾아냈는데 같이 가요! 기사 식당인데, 거기 나오는 돈까스가 장난 아니게 크거든요. 맛도 끝내주…….”
“어떡하지? 지금 바로 나가 봐야 해.”
“조오오오! 떡볶이 먹으러 갈 건데 갈래요?”
“미안, 미안. 미팅 가야 해서 시간이 없는데, 어쩌지?”
하아, 바쁜 건 알고 있지만 벌써 며칠째 이런 식이다.
한 손에 서류가방과 또 한 손엔 태블릿 PC를 들곤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는 조마루 팀장 아니 지부장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예전이 그립다.
그때는 늘 같이 다니며 도심이며 지방할 것 없이 곳곳을 들쑤시곤 했는데…….
“어디 가는데?”
“방송국! 방송국!”
함께 방한한 디알로가 나 대신 묻고 있었지만, 조마루는 대답할 여유도 없는지 손을 휘젓고는 회사를 떠나고 있었다. 그러면서 리노를 부른다.
“리노! 뭐 하고 있어? 얼른 와!”
“예. 가요!”
강나리와 노닥거리고 있던 리노가 살갑게 대답하며 조마루를 따라나서는 모습을 보며 힘없이 돌아섰다.
“나리야, 떡볶이 먹으러 갈래?”
“아뇨. 저 요즘 다이어트 중이에요.”
“나리! 네가 뺄 때가 어디 있다고 다이어트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10년째 후견인을 자처하고 있는 디알로가 말하자, 강나리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친다.
“무슨 소리예요. 저 요즘 얼마나 쪘는데요! 하아, 집에 왔다고 마음 놓고 먹다 보니……. 에휴, 팬들이 보면 깜짝 놀랄 거에요.”
“걱정 마. 넌 뭘 해도 예뻐. 아마 팬들도 그렇게 생각할 걸?”
“아유, 참! 디알로가 자꾸 그렇게 얘기하니까, 자꾸 긴장감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몰라. 나 한 달 안에 무조건 3킬로그램 뺄 거에요.”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디알로와 강나리를 보다가 돌아섰다.
그러곤 HS 엔터테인먼트 건물을 빠져나와 거리를 거닐었다.
오오, 편의점이다.
목도 마르는데 잠시 들를까?
편의점 안은 서너 명의 사람들만으로도 꽉 찬 느낌이었다.
진짜 신기하다.
일본도 그렇지만, 서울은 정말이지 도시 자체가 백화점 같다.
아니 쇼핑몰?
편의점만 해도 그렇다. 백 미터도 안 돼서 하나씩 있다. 편의점만 그런 게 아니다.
거리에는 온갖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살 수 있달까.
특히나 편의점의 경우엔 온갖 잡다한 물건들을 파는데다가 24시간 내내 열려 있어서 한밤중에도 언제든 물건을 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차를 타지 않고 몇 걸음만 걸어가도 되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다.
하긴 어떤 가게든 마찬가지긴 하지.
뭘 원하든 간에 일단 나가면 다 있다. 정말 넘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다는 거지.
좀 멀다 싶으면 지하철을 타면 되고.
꼭 거미줄처럼 서울 곳곳으로 뻗어 있는 지하철이기에 정말 편하기가 말할 수 없을 정도니까.
뿐인가.
어디에서든 와이파이가 터진다.
심지어 지하철 안에서도.
이게 은근 편해서 미국으로 돌아가면 가끔 불편해질 때가 있을 정도다.
하기야 그립기는 야식도 매한가지지.
족발이고, 피자고 간에 전화 한 통만 걸면 한 시간 안에 배달해주는 음식문화는 정말이지 신통방통하기까지 하잖아?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데, 한강 둔치에서 배달시켜도 갖다 줄 정도라고 하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냐고.
“음, 어딨냐? 오! 여깄네. 역시 토마토 쥬스는 이게 최고지!”
편의점 안에서 음료수 하나를 꺼내 들었을 때였다.
“와! 저 외국인, 한국말 엄청 잘한다!”
“그러게. 응? 레이크헬 아냐?”
“어! 진짜다! 제롬이야, 제롬!”
슬쩍 돌아보니 여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 쑥덕대고 있다.
난 그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꺄아악!”
“어떡해, 어떡해! 제롬이 우리한테 손 흔들었어!”
“사인받을까?”
누군가 외치자, 여학생들이 꺅꺅 꺼린다.
하지만, 다가올 엄두는 못 내고 있다.
“사인해줘요?”
내가 먼저 묻자, 멈칫하던 여학생들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깔깔거리는 나이라더니.
“진짜요?”
못 믿겠다는 듯 묻는 여학생에게 웃으며 물었다.
“사진도 찍어줘?”
“아하하하하! 진짜 한국말 잘한다!”
“누가 보면 한국사람인 줄 알겠어요!”
씨익 웃어 보이며 얘기했다.
“난 한국을 사랑하니까.”
“장난 아니다. 제롬, 너무 웃겨요!”
여학생들이 또다시 깔깔거린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편의점 안에 있던 중년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노랑머리 외국인이 여학생들이랑 노닥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뭐 상관없지.
저런 모습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난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여학생들에게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함께 찍어줬다.
그리고 여학생들이 기분 좋게 웃고 있는 걸 보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물었다.
“혹시 니들 시간 되냐?”
“왜요?”
“웅? 설마 우리 납치하려고?”
“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깔깔깔! 납치해주면 우리야 좋지!”
“제롬! 우리 납치해줘요! 응?”
이것들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가 이내 씨익 웃었다.
“납치까진 아니지만…….”
세 명의 여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랑 떡볶이 먹으러 갈래?”
***
해외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에는 매력적인 음식이 무척 많다.
일테면 숯불구이.
최상급 스테이크조차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는 한우 살치살을 비롯해 베이컨의 고급 버전이라고 해도 무방한 삼겹살 등은 단연 최고다.
그 외에도 일단 한번 맛보면 눈이 휘둥그레질 음식은 헤아릴 수없이 많다.
떡볶이 역시 마찬가지.
떡 자체의 질감을 싫어하는 외국인들이 있긴 하지만, 한국 음식 특유의 매운맛과 짭짤하고 달콤한 양념이 곁들여진 떡볶이의 매력에 한번 빠지게 되면 헤어나올 생각을 접어야 한다.
오죽하면 마약 떡볶이이라는 표현까지 쓰겠는가.
떡볶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길거리 떡볶이와 즉석 떡볶이.
긴말은 하지 않겠으나 둘은 나름의 차이가 존재하고 각각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나야 당연히 길거리 떡볶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즉석 떡볶이가 싫다는 건 아니다.
즉석 떡볶이에 추가되는 온갖 사리들은 진미 중의 진미라 할 수 있으니까.
다만,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혼자 먹으러 가기가 좀 그렇다는 거지.
“야아! 니들 덕분에 이렇게 떡볶이도 먹으러 오고 좋네.”
“헤헤. 우리가 고맙죠.”
“근데, 너희 어디 가던 중 아니었어? 혹시 나 때문에 학원 땡땡이친 거 아냐?”
“깔깔깔! 땡땡이래, 땡땡이!”
“제롬은 한국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거 같아.”
“에헴. 이래 봬도 한국통이거든. 아! 못난이! 그거 내가 먹으려고 했는데!”
“그런 게 어딨어요! 먼저 짚으면 임자지!”
“하아! 아깝다! 야! 누가 만두 먹으래! 딱 내려놔! 그건 양보 못하거든!”
“와아! 완전 쪼잔해! 무슨 남자가 먹는 거 가지고 소리를 박박 질러대요!”
“먹는 거 앞에서 남자 여자가 어딨어! 아무튼, 만두는 내 꺼니까, 딴 거……. 헛! 달걀! 아, 안돼!”
한참 동안 가게 한구석을 점령한 채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으니 가게 안의 시선이 온통 우리 쪽으로 쏠리고 있다.
그러든지 말든지 우린 신나서 떡볶이를 해치우고 있었지만.
물론 오뎅이랑 순대를 곁들인 건 당연한 일이었고.
“아우, 더는 못 먹어!”
“너 혼자서만 한 3인분은 먹은 거 같은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에이, 제롬. 한국의 여고생들을 무시하면 안 되죠! 이 정도는 껌이라고요.”
“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니들 그래가지고 시집가겠어? 아니지. 남자친구 앞에선 완전 깔짝거리면서 많이 못 먹는 척하겠지?”
내 말에 또다시 깔깔거리던 여학생들.
그렇게 다 함께 웃으며 분식집을 나왔다.
그러곤 내친김에 커피까지 쐈다.
“제롬은 진짜 한국에 대해서 잘 아는 거 같아요.”
“귀화해도 되겠어요.”
“진짜 그러는 거 아냐?”
“글쎄다.”
“어! 정말 귀화하려고요?”
픽하고 웃음이 나온다.
씁쓸한 미소가 머금은 채 말했다.
“비밀.”
“에이! 그게 뭐야! 완전 치사해!”
“근데, 제롬! 나 오늘 찍은 사진, SNS에 올려도 돼요?”
“나도 올릴 건데?”
“히힛! 신 난다!”
좋아라하는 여학생들 보다가 싱긋 웃어 보이곤 말했다.
“전번!”
“응? 우리 번호 따려고요?”
“그렇게 안 받는데, 제롬 완전 음흉해!”
“야! 아니거든! 까똑 등록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래야 나중에 또 떡볶이 먹으러 갈 때 연락할 거 아냐! 싫으면 말고!”
“킥! 누가 뭐랬나? 줘봐요. 번호 찍어줄게요.”
“다음엔 짜장면이랑 탕슉 먹으러 가요!”
“난 깐풍기가 좋은데!”
“이것들이! 누굴 호구로 알고! 지금 날 벗겨 먹으려는 거야?”
“아, 우리도 가끔 사면 되잖아요!”
“맞아요! 아직 학생이라 용돈이 얼마 없어서 그러는 거지. 나중에 돈 벌면 팍팍 사주면 될 거 아녜요!”
“흐응. 그래? 좋아. 한번 믿어보지.”
까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돌아보며 수군거릴 정도였다.
“친구 등록 완료!”
“읽씹하면 화낼 거에요!”
“바빠서 못 볼 수는 있어도, 그런 짓은 안 해.”
“깔깔깔! 제롬 진짜 한국 사람 같아!”
“영혼만은 한국 사람이라니까 그러네.”
이렇게 대화를 하다 보니 문득 그리워졌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그녀와 이러고 있었는데…….
갑자기 떠올랐다.
진짜 내가 한국인이 되고 싶은 이유.
처음엔 그저 한국이란 나라가 신기해서 호기심에 파고들었지만, 본말전도라고 이젠 그녀 때문에라도 한국사람이 되고 싶어졌달까.
나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면서 어딘지 모르게 티가 났던 걸까.
여학생들이 눈치를 보다가 내게 물은 것도 그때였다.
“왜 그래요, 제롬. 우리가 뭐 실수했어요?”
“너 때문에 그러잖아! 자꾸 버릇없이 틱틱거리니까, 제롬이 맘 상한 거 아냐!”
“내가 뭘 어쨌다고. 그냥 난 제롬이 편해서…….”
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들 말고.”
“그럼 왜 그러는데요? 말해봐요! 혹시 알아요? 우리가 도움될지?”
난 잠시 말없이 여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이것들을 믿어도 될까?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 처음 본 아이들이다.
게다가 심심한 건 한시도 참지 못하는 나이고.
어디 그뿐인가.
한국만큼 SNS가 발달한 나라가 또 있을까.
아마 여기서 내 본심을 털어놨다가는 하루도 못 가서, 아니 한 시간도 안 돼서 인터넷에 쫙 깔리겠지.
그것도 스캔들이라면 스캔들이려나.
뭐,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녀의 성격상 아마 길길이 뛸 게 뻔하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는데요? 혹시 연애 문제에요?”
헉!
하여간 여고생들이란…….
눈치 하난 끝내준다.
어떻게 단번에 맞추냐.
눈알을 굴려 아이들의 시선을 피하자 여고생들이 진득한 미소를 베어 문다.
그러더니 말한다.
“누군지는 안 물어볼게요. 대신 이것만 말할게요. 사랑은요, 쟁취하는 거에요!”
주먹까지 꽉 쥐고 흔드는 여학생이었다.
“맞아요! 이런 말도 있잖아요!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게 백번 낫다!”
후우, 딱 저 나이 때의 아이들이 생각해낼 얘기들이다.
게다가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도준의 표현에 따르자면 살짝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하고.
봐라.
조막만 한 손을 움켜쥐고 흔들며 외치고 있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피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는 거에요, 제롬! 그 여자 누군지는 몰라도 제롬이라면 할 수 있어요! 아니 누가 있어서 세계적인 스타며, 레이크헬의 비주얼 담당인
제롬을 거부할 수 있겠어요!”
답답한 소리들 한다.
그렇게 쉬우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고.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커피잔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그러니까, 해요! 틀림없이 잘 될 거에요!”
“그래요, 제롬. 제롬이 베이스……. 아니, 기타를 치면서 프러포즈를 한다면 그 여자도 반드시 넘어올 거에요!”
“아! 생각만으로도 끝내준다! 저라면 아마 감동 받아서 울고 말 거에요!”
멈칫.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손을 멈춘 채 떠올렸다.
베릴이 메디슨 스퀘어 광장에서 니콜 교수님께 했던 프러포즈를.
“그, 그럴까?”
더듬거리며 되묻자, 아이들이 결연한 눈빛이 되어 ‘응!’ 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