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외전> 샤오린(2)
비행 내내 이 남자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아니, 쉬지 못했다.
어찌나 말이 많은지 한시도 입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주 쓸모가 없진 않았다.
대부분 흥미롭지 않은 얘기들이었지만, 개중엔 뜻밖의 정보들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일테면…….
“직접 봤어야 합니다. 도준이 그 자식이 희주 생일날 메탈을 연주하는 장면을. 크큭. 상상도 못했거든요. 어쩌다 보니 내가 불러내긴 했지만, 진짜 거기서 기타를 신들린 듯이
연주하리라곤…….”
그 사건을 알고 있다.
도준의 팬치고 그 동영상은 너무도 유명하니까.
‘밴드 털어먹은 반도의 흔한 고교생.’이란 제목으로 떠돌던 영상 덕분에 레이크헬이 한국을 찾았던 일은 이제 와선 더 이상 비밀도 아니었다.
도준의 영상 중에서 레전드로 꼽히는 몇 안 되는 영상이기도 하고.
그렇다곤 해도 그 뒤에 이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설마하니 그 당시 그 자리에, 그것도 직접적으로 그 사건과 연관이 있는 당사자를 만나게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달까.
“재밌네요.”
뭐, 그래 봐야 도준 얘기를 할 때나 귀가 번뜩 뜨일 뿐, 나머진 시큰둥했지만.
“음,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던 건데……. 혹시 도준이 중국 팬클럽 회장 아니십니까?”
“……어떻게 그걸?”
“아! 도준이가 언젠가 한번 얘기했었던 거 같아서요.”
샤오린의 눈이 살짝 빛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어렸다.
자신의 처지가 떠오른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석준은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와아! 도준이 얘기론 투자 쪽으론 귀신이라고 하시던데. 특히 부동산이랑 주식은 자기가 아는 한 최고라고 말하더군요. 근데 여기서 직접 뵈니까, 진짜인 거 같네요. 잠깐만
얘기해봤는데도 전문가다운 느낌이 팍팍 느껴진다니까요. 뉴욕에 있는 건물도 샤오린 양이 구해줬다면서요?”
기분 좋은 얘기였다.
도준이 그만큼 자신을 믿고 있었고, 또 인정해주고 있었다는 거니까.
샤오린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손사래를 쳤다.
“투자 쪽 일을 하다 보면 이 정도는 다들 해요. 그리고 뉴욕에 있는 찰리스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구요.”
“겸손하시네요. 아, 혹시 시간 좀 되십니까? 괜찮으면 자문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예?”
갑작스러운 부탁에 샤오린이 의아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공짜로 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석준은 정색을 하면서 혹시나 모를 오해를 불식시켰다.
“어차피 현지에 도착하면 전문적인 인력을 구할 생각이었거든요.”
잠시 석준을 바라보던 샤오린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혹시 하시는 일이라는 게……?”
석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버지……. 아니, 사장님 지시로 하이난에 가는 거거든요. H 그룹 인수건 때문에.”
조금 놀랐다는 표정.
‘H그룹?’
대만에선 꽤 유명한 리조트 관련 기업이었다.
한때는 동남아시아를 비롯해 중국 일부에서 제법 큰소리 좀 치던 회사였다.
하지만, 무리한 해외투자로 재무구조가 악화되다가 연이은 리조트 개발 실패로 근래 들어선 적자로 돌아서며 허덕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자신 역시 한때 주식투자차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던지라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곳이 비행기에 타서도 게임이나 하던 석준의 입에서 나오니 놀라웠다.
그저 한량이라고만 치부하고 있었는데, 그건 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얘기 좀 들어보고 결정했으면 좋겠네요.”
그렇다고 덥석 오케이 할 수는 없어 얘기나 들어보자고 생각해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석준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호탕하게 웃는다.
“하하하. 잘됐네요. 박 실장님 등쌀에 이번엔 또 얼마나 힘들까 괴로워하던 중이었는데.”
원래대로라면 하이난 남부 해안에 사둔 별장 처박혀서 한동안 일은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일복이 있는 건지.
시간이 많으니까 잡생각이 많아진 건지, 아무튼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하기만 했는데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는 샤오린이었다.
***
석준이 했던 말과는 사뭇 다른 인상이었다.
그에게서 박 실장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는 꽤 엄격한 상사로 느껴졌었는데, 만나보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석준을 어려워한다는 게 한눈에 보인달까.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게 윗사람을 모시는 부하직원의 모습이었다.
어찌 되었든 석준은 샤오린을 중국출신의 투자회사 임원쯤으로 소개했다.
상관없었다.
샤오린으로선 딱히 사업차 하이난을 찾은 게 아니라서 큰돈을 바라고 일을 맡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일은 일인지라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한 호텔의 객실을 빌려 보고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회의를 한 후에 석준이 물어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샤오린은 눈을 가늘게 해 보였다.
이 남자.
비행기에서 봤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유쾌하면서도 어떤 면에선 치기 어린 면이 강했는데, 지금은 꽤 진중한 느낌이었다.
“재무관련해선 좀 더 확인해봐야겠지만, 여기 이 서류들에 나와 있는 대로라면 투자 가치는 있어 보이네요. 다만, 작년도와 재작년도의 매출규모가 전년도와 비교해 너무 차이가
크네요.”
석준이 박 실장을 한차례 쳐다보자, 박 실장이 어찌할 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석준이 서류를 들추며 묻고 있었다.
“수상쩍다는 말씀인가요?”
박 실장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거두며 샤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자금 투입도 없었던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마케팅 계획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매출이 증대했어요. 아무리 근래 들어 하이난 지역이 휴양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급격한 성장세에요. 전반적인 사항들을 감안한다손 치더라도 이 정도의 매출 증대는 의심스럽죠.”
잠시 생각에 잠기는지 말이 없던 석준이 눈썹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분식회계인가?”
혼잣말인 거 같아서 대꾸는 안 했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게 샤오린의 생각이었다.
가능성은 충분했다.
분식회계는 투자나 대출 혹은 병합을 목전에 둔 기업들이 흔히 벌이는 수작 중의 하나였으니까.
“박 실장님, 본사엔 제가 따로 보고 할 테니까 파견된 직원들이랑 같이 5년 전 재무표부터 다시 분석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 그럼 그렇게 알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며 박 실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일어섰다.
그러곤 석준과 샤오린에게 인사를 하곤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석준의 태도가 급변했다.
방금까지 심각해 보이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아뇨. 별것도 아닌데요, 뭘.”
“별거가 아니긴요. 비행 뒤에 쉬셔서야 하는데, 무려 세 시간이나 회의를……. 아, 식사 안 하셨죠? 이러실 게 아니라 식사부터 하러 가시죠.”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무슨 말씀이세요. 샤오린 양 아니었으면 며칠을 뒤적이며 쓸데없이 시간을 소비했을 겁니다. 제가 회계 쪽은 영 젬병인지라……. 그리고 샤오린 양을 모셔와서는 엄청 부려 먹곤 밥도
한 끼 안 사줬다고 하면 나중에 도준이가, 아우!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네요. 모르시죠? 그 자식, 성깔 장난 아닌 거?”
농담인지 진담인지 석준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골이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인상을 썼다.
“느닷없이 이상한 놈하고 밥 먹는 게 그렇긴 하시겠지만, 사람 하나 살려준다고 생각하시고 가시죠.”
샤오린은 석준이 우는소리를 하며 간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꼭 애처롭게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를 보는 듯해서.
“그래요. 그럼.”
밥 한 끼 먹는 게 뭐 대수라고.
샤오린이 흔쾌히 승낙하자, 석준이 밝게 웃어 보였다.
***
웃긴 일이긴 한데,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석준은 하이난에 대해 잘 모르는 듯했고, 반면 샤오린은 하이난에 별장이 있는 만큼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당은 샤오린이 안내했다.
“죄송하네요. 밥 산다고 하면서 안내를 부탁한 셈이 되었으니.”
“아뇨. 덕분에 잘 먹고 있는데요. 뭐.”
“근데, 이 집 괜찮네요. 새우요리를 많이 먹어봤는데, 여기만큼 잘하는 집을 못 본 거 같아요.”
“알려지지 않은 맛집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에요. 현지인들만 알음알음 알고 있는 곳이랄까.”
“호오. 좋군요. 나중에 아버지 오시면 여기로…….”
말을 하다말고 말끝을 흐리는 석준을 보면서 샤오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언젠가 도준에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던 것이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예?”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던가?
머뭇거리던 석준이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L그룹이요.”
석준은 씁쓸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샤오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충 알만했다.
도준의 얘기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관계를 맺어온 친구들이며 선후배들이 대부분 있는 집 자식들, 특히 재벌집 자식들이 많다고 했었다.
무엇보다도 L그룹의 총수이며 창업주의 성씨는 ‘구’ 씨였다.
“그렇군요.”
물론 내색할 이유는 찾지 못했다.
오늘 보고 나면 다시 볼 일이 있겠나 싶어서.
뭐, 사업을 하고 있으니 앞날이나 알 수 없긴 했지만.
한데, 한번 어두워진 석준의 표정이 좀처럼 펴지질 않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걸려서 샤오린은 묻고 말았다.
“괜스레 물었나 보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별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석준이 한숨을 내쉰 것도 그때였다.
“도준이 말로는 샤오린 양하고 친하다고 하더군요.”
“그렇긴 하죠. 아시겠지만, 제가 도준 씨 팬클럽 회장이기도 하고요.”
“저어…….”
석준이 망설이는가 싶더니 불쑥 물어온다.
“괜찮으시면 며칠만 좀 더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아, 시간을 많이 뺏진 않겠습니다. 물론 꽁으로 해달라는 건 아니고요. 페이는 정당하게 지불해 드릴 테니, 꼭 좀 부탁드려요.”
잠시 석준을 바라보던 샤오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네 시간. 그 이상은 안 돼요.”
“아! 그거면 됩니다. 후우! 덕분에 살았네요.”
넥타이를 살짝 풀며 죄고 있던 목을 헐렁하게 만든 석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개발 막바지 단계인데, 도통이 시간이 나야 말이죠. 이대로라면 열흘이 걸려도 다 끝내지 못하지 싶었는데, 샤오린 양이 도와주시는 덕분에 간신히 시간을 맞출 수 있겠네요.”
샤오린의 눈이 반짝였다.
“개발이요?”
“아! 벼, 별거 아닙니다.”
슬쩍 눈을 돌리며 대답을 회피하는 석준이었지만, 샤오린이 누군가.
경쟁이 치열하다는 중국 연예계에서 버텨내며 결국 정상급 스타 자리에 올랐고, 투자 쪽에서도 거듭 성공을 거두어온 커리어우먼이기도 했다.
이 말은 곧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얘기도 하다.
당연히 풍기는 기세는 어지간한 사람하곤 비교도 되질 않는다.
그런 사람이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석준으로선 이실직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숨길 이유도 딱히 없었고.
아버지한테만 들키지 않으면 되는 거니까.
“실은…….”
“…….”
“게임을 하나 개발 중이었거든요.”
순간 샤오린은 비행기 안에서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며 게임에 몰두하던 석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비행기 안에서……?”
“……좀 그랬죠? 원래는 혼자 있을 때만 하는데, 마감이 코앞이라서…….”
“마감이요?”
석준이 눈썹을 긁적이며 띄엄띄엄 대답했다.
“6월에 있을 게임쇼에 출품하려면 적어도 이번 달 말까진 게임이 완성되어야 하거든요. 그래야 최종테스트까지 마치고…….”
한참 동안 설명하는 석준은 갈수록 눈을 빛냈다.
아까 일 얘기할 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한데, 왜일까?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어떻게 보면 조금도 관심 없는 분야에 대한 얘기였는데도 이상하게 즐겁게 느껴지는 샤오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