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250화 (250/260)

#250. <외전> 샤오린(1)

4월 3일.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사방엔 만개한 꽃들 덕분에 그저 거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정도. 모두가 신이 주신, 아니 자연이 만들어낸 섭리 덕일 터다.

더구나 이날은 주말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간만에 집을 나와 가족들과 혹은 연인끼리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다.

예년 같으면 기사에는 ‘화창한 봄날, 유원지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정도의 헤드라인이 걸렸겠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오늘은 모두에게 기억될 것이다.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이 부서진 날로.]

맞다.

예상대로다.

4월 3일은 도준의 결혼식이 치러진 날이었다.

샤오린 역시 참석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는 일. 이미 그녀는 단순히 중국 지역 팬클럽 회장이 아니었으니까.

도준의 재산 중 절반 이상을 그녀가 관리 중이었고, 무엇보다도 도준에게 있어서 샤오린은 힘들 때나 고민이 있을 때 손을 내밀면 언제든 달려와 주는 소울메이트였다.

그 점에선 도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샤오린이 중화권에서 명성을 얻고 더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를 쌓는 것과는 정반대로 갈수록 마음속이 공허해졌을 때가 있었다.

그때 만난 게 도준이었다.

정확히는 도준의 음악.

충격이었다.

동시에 치유였다.

지쳐가던 삶은 새로운 활력을 얻었고, 인생이 백팔십도 바뀌었다.

이쯤 되면 단순히 팬심이라고 말하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사심이 없다면 그거야말로 거짓말일 터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지만 갈수록 도준에게 연심이 싹텄다.

하지만, 그걸 내세우진 않았다.

될 수 있으면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왜냐면 도준에겐 희주가 있었으니까.

첫눈에 알아봤더랬다.

희주를 보는 순간.

도준의 옆에 있을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희주라는 걸.

다행히도 도준에 대한 정이 깊어진 상태가 아니라서 빠져나올 순 있었다.

그렇게 착각했었다.

도준이 쓰러지기 전까진.

하지만…….

말 그대로 착각이었다.

도준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날, 샤오린은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걸 느꼈던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자기 자신조차 속이고 있던 감정의 실체를.

샤오린은 도준을…….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날을 위해 S그룹 소유의 호텔이 일주일 전부터 통째로 비워졌고, 오직 결혼식에 참석하는 사람들만이 객실에 묵을 수 있었다.

이는 그만큼 결혼식에 참석하는 이들의 면면이 대단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세계 각지에서 오는 만큼 스케줄이 제각각이었던 탓도 있었고, 도준이 손님을 대접할 만큼 커다란 저택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때문에 결혼식 전부터 이슈를 모았고, 결혼식 당일은 또 얼마나 화려할지 기대가 컸다.

물론 그 기대는 보란 듯이 충족되었다.

호텔에서 가장 크다는 다이아몬드 홀에 마련된 식장에 준비된 좌석만 5백 석을 넘어갔으며,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 참석.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의

유명인사들이 자리했다.

정·재계를 비롯해 음악계, 영화계 심지어는 클래식 쪽에서도 대거 참석한 결혼식장은 실시간으로 방송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도준이 말쑥한 차림새로 서서 기다리는 동안, 인터넷과 SNS는 난리가 났고 마침내 꽃바구니를 든 예은이를 화동으로 앞세우고 신부가 모습을 드러내자 네티즌들이 끝내 폭발했다.

환호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참지 못한 여자들이 대거 희주를 향해 갖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살소동을 벌이는 경우도 허다해서

각국에서 소란이 그치질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결혼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수많은 싱어들이 축가를 불러준 후에야 두 사람, 도준과 희주는 부부가 되어 식장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결혼식이 끝나고, 샤오린은 사업을 핑계로 막 호텔을 빠져나온 길이었다.

“상하이로 갈까요?”

이젠 단순한 비서가 아닌 회사의 중책을 맡고 있는 브레드 콴이 묻자, 샤오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베이징으로.”

브레드 콴은 아무런 말 없이 차를 몰았다.

그러면서 백미러를 통해 샤오린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 어디에서도 표정을 찾을 순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스쳐 가는 거리만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

사업차 자주 찾는 곳이라서 그리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가슴이 뛴다.

샤오린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기억하는 것이다.

도준이 중국 5대 도시 투어를 시작했던 때에 샤오린이 그를 처음 만난 곳이 바로 베이징 올림픽 주 경기장인 궈자티위창이었다.

경기장 앞에 선 채로 샤오린은 아련한 눈빛이 되었다.

‘<조금만 더>를 불렀었지.’

도준이 중국 팬들에게 선물한 노래.

그가 와주길 기다리는 중국인들을 위해 작사작곡한 노래.

처음으로 중국어로 부른 노래.

1,00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던 노래였다.

- 无??走到?里,?都无法到?.

??道路永?不?无止境.

在海?,我在那里等?.

望着无法穿越的大海,

我?在在唱歌.

我希望我的?音能?接?到?.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곳.

가도 가도 끝없는 그 길.

바다 너머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건너지 못하는 바다를 바라보며,

나 지금 노래하고 있어.

내 목소리가 너에게 닿았으면 좋겠어.

도준 특유의 나직하지만 무겁지만은 않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상냥하면서도 마음을 울리는 노랫소리가.

샤오린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읊조렸다.

- 我?在在唱歌.

我可以?系?.

所以 再多一点 再多一点 ?稍等.

나 지금 노래하고 있어.

너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그러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줘.

경기장 앞에서 나직하게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을 많은 이들이 지나쳐가며 흘깃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어지간한 중국인들은 도준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한류라고 하기엔 너무나 사랑하는 가수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녀 역시 그중 한 명이라고만 치부했던 것이다.

“我?在在唱歌. (나 지금 노래하고 있어.)”

그러거나 말거나 샤오린은 10년 전의 일들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노래하고 있었지만.

“再多一点 再多一点 我可以?系?······.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다가갈 수 있기를······.)”

도준이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9만 명의 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때, 샤오린은 대기실에 있었더랬다.

대기실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모니터를 보면서.

얼마나 웃고 또 얼마나 울었던가.

그 감격은 말로 형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기실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함성에는 스타디움의 열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샤오린의 가슴은 쉬지 않고 두근거렸었다.

언제나 자기절제가 강하고,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그녀로선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때까지 그녀를 알고 있던 이들이 보았다면 놀라서 까무러칠 정도의 변화였다.

하지만, 그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허설을 위해 도준을 처음 만났던 때?

아니다.

우연히 LONGING TIMES 동영상을 보게 되었던 그때, 그녀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때까지 남자라곤 누구 하나 마음에 담지 않았던 그녀의 가슴 속에 김도준이란 이름 석 자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후우우우!”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뜬 샤오린은 다시 한차례 궈자티위창 경기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 돌아섰다.

또각 또각 또각.

콘크리트 바닥을 울리는 하이힐 소리가 도심을 울리고 있었지만, 누구도 듣지 못했다.

예전과는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 이미 세계 10대 도시의 하나로 거듭난 베이징이었기에, 도로를 가득 메운 차 소리에 묻혀 흔적없이 사라져버렸으니까.

***

“잘 다녀오십시오.”

브레드 콴은 샤오린이 출국장을 빠져나가기 전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그걸 아는지 샤오린은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그렇게 돌아서는 그녀를 보면서 브레드 콴은 끝내 참지 못하고 나직한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9년이었다.

샤오린이 도준을 기다린 시간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도준을 걱정하느라 헤아릴 수도 없는 밤을 지새웠고 그걸로도 모자라 시간만 나면 한국을 찾았다.

물론 알고 있다.

그녀만 그런 게 아니란 것을.

가족은 말할 필요도 없고, 도준의 스승인 니콜 교수나 레이크헬을 비롯한 친구들까지. 누구 하나 도준이 깨어나는 걸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도준에게 지극정성이었던 건 바로 도준의 연인인 희주였다.

결혼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9년간 도준을 보살핀 것도 그녀였고.

그러나 브레드 콴이 보기에 샤오린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럼에도, 도준이 깨어난 후에 주어진 보상은 달랐다.

희주가 도준에게 프러포즈를 받고 마침내 결혼을 함으로써 그 시간들을 보상받은 반면, 샤오린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샤오린이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을 쓸쓸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터다.

브레드 콴은 출국장으로 들어가고 있는 샤오린의 등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부디 즐거운 여행 되시길.”

가능하다면, 9년 만에 떠나는 여행길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를 빌어보는 브레드 콴이었다.

***

하이난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른 후, 샤오린은 곧바로 후회했다.

‘하다못해 비즈니스석으로 할 걸.’

남아 있는 표가 없길래 그냥 이코노미석으로 했더니만 이런 일이 벌어졌다.

‘몇 시간 안 걸리니까.’

참자는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바로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마우스 클릭 소리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샤오린은 슬쩍 눈을 뜨곤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창가 쪽에 앉은 남자는 동양인. 짧게 깎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남자였는데, 그녀가 비행기에 탔을 때부터 한 시간이 다 지나갈 때까지 계속해서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

한숨이 나올 수밖에.

생긴 건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잘생겼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인데, 저 나이에 게임이라니.

딱 봐도 스물 후반대에서 서른 초반대로 보이는 데 정말이지 미친 듯이 자판을 두드리며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통로를 지나쳐가는 스튜어디스가 몇 번이나 눈총을 보내며 망설이는 게 느껴질 정도다.

조만간 누군가가 항의를 해오지 않을까 싶었다.

한숨을 내쉰 샤오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중국분이세요?”

“어? 지금 뭐라고……. 죄송합니다만 제가 중국어를 몰라서요.”

영어로 대답하는 남자.

샤오린 역시 영어로 말하는 수밖에.

“중국분이냐고 물었습니다만, 아닌 거 같군요.”

“아, 그러셨군요.”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선 대답했다.

“한국인입니다.”

그러곤 샤오린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 시선에 불쾌해진 샤오린이 한마디 하려는 찰나였다.

“혹시…….”

“…….”

“저희 구면 아닌가요?”

한숨이 나온다.

이렇게 뻔한 수작질이라니.

샤오린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였다.

남자의 입에서 뜻밖의 얘기가 흘러나왔다.

“도준이 결혼식에 오셨지 않습니까?”

멈칫.

샤오린이 잠시간 남자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하하하. 맞죠? 안녕하세요. 저 도준이 친구예요. 와아! 진짜 신기하네요. 반나절 전에 한국에서 뵀는데, 이번엔 북경 아니 베이징에서 하이난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뵙다니. 이래서

사람은 죄짓고 살면 안 되나 봅니다. 이렇게 세상이 좋다니까요.”

기억을 하든 못하든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건 좋은데…….

‘수다쟁이네.’

비즈니스석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타고 가는 이코노미석에서 무례할 정도로 노트북을 두들겨대던 탓에 안 그래도 안 좋던 남자의 첫인상에 가벼운 이미지까지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남자는 더없이 밝은 미소로 얘기했지만.

“아, 이런……. 제 소개를 안 했군요.”

“괜찮…….”

“구석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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