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외전> 잊고 있었다(2)
농담이 아니라 깜빡하고 있었다.
갓 스무 살이 됐을 때 정신을 잃는 바람에 군대에 대한 건 생각지도 못했달까.
“뭘 그렇게 죽상이냐? 까짓 다녀오면 되는 일인데.”
“아뇨. 가기 싫은 게 아니라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나 한심스러워서.”
준영이 형이 어깨를 두드리는 동안, 형이 다가와 낄낄거렸다.
“그걸 이제 알았냐?”
참네, 이젠 형한테까지.
“그러는 형은 다녀왔…….”
“자식이. 이 형님은 대한민국 병장 출신이니라.”
어깨를 쭉 펴고 얘기하는 형이 얄미웠지만, 그저 한차례 노려보는 일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피로연이 끝나고 니콜 교수님과 베릴이 몰디브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걸 배웅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
“부르셨어요?”
아저씨가 부른다는 얘기에 가보니, 책상 앞에서 서류를 뒤적거리던 아저씨가 날 보곤 고갯짓으로 앉으라고 한다.
그동안 날로 번창해 제법 규모를 갖추게 된 회사는 이미 건물 한 채를 매입해 이전한 뒤였다.
그렇긴 해도 대표실은 예전에 비해 조금 더 커졌을 뿐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다.
워낙 깔끔하시고, 실용적인 성격인지라 사무실 자체가 꾸밈이라곤 없는 수수한 모습이었다.
“도준아.”
아저씨가 소파로 와서 마주 앉으며 날 불렀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여직원 한 명이 들어와 차를 놓고 나갔다.
이것 참, 익숙하질 않네.
예전 같으면 마루 누나가 불쑥 들어와 농담과 함께 모과차를 주고 갔을 텐데, 이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지.
뭐, 마루 누나도 미국 지부 일이 바빠지면서 여태 시집도 가지 않고 일에만 매진하고 있으니까.
“고마워요.”
여직원이 나간 뒤, 아저씬 본론을 꺼내 들었다.
“준영이한테 들었다. 당황스럽지?”
군대 문제를 얘기하는 것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예.”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일 테다.
통일이 되었다면 또 사정이 달라졌겠지만, 아직 통일이 된 상황이 아닌지라 여전히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있어서 군 복무는 반드시 해야만 할 의무로 남아 있었다.
“실은 그 문제 때문에 회사에서도 여러모로 얘기가 많았다.”
“아, 그랬어요?”
“자식하곤. 너야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정신이 없었겠지만, 회사로서도 무척 중요한 일이니까. 당연히 신경 쓸 수밖에 없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겠네요.”
“알고 있겠지만, 병역의무는 만 36세까지니까 피할 수 없지. 그렇긴 한데,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자 아저씬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베어 물며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가셨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네가 국제 콩쿠르에 나가서 1등을 하는 거고, 그 외에도 몇 가지 편법을 쓸 순 있겠지. 일테면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진단을 받아서 37세까지 입영을
미룬다거나 하는.”
날 가만히 바라보시던 아저씬 담담한 어조로 물어오신다.
“어쩔래?”
나참.
내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저러시는지.
입꼬리를 그렇게까지 쭈욱 끌어올린 채 물으시는데, 바보도 아니고 아저씨의 의도를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하아, 언제쯤이나 돼야 날 어린애 취급하지 않으시려는지.
“어쩌긴 뭘 어째요. 가야죠.”
피식.
아저씬 그저 웃기만 하셨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이셨다.
“그럼, 바로 회사 입장 발표하마. 이런 일은 결정했을 때 해치우는 게 좋아. 자칫 시기를 놓쳐서 나중에라도 문제가 불거진 후에 얘기해봐야 사후 약 처방밖에는 안 되니까.”
“알아서 해주세요. 다만…….”
“……?”
“그래도 신혼인데, 한 일 년 정도는 미뤄주실 수 있으시죠?”
“글쎄다. 여긴 병무청이 아니라서.”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입가엔 미소를 머금고 계시다.
악마 같은 웃음을.
아, 진짜! 현실로 돌아와서 다 좋은데, 저 웃음만큼은 여전히 익숙해지질 않는다.
아니지.
무의식 속에선 저것마저도 그리웠으니까.
그래, 좋게좋게 생각하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베스트다.
내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임을 잊지 말자.
***
아저씨의 말씀대로였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기사들이 터져 나왔다.
[김도준, 1년 후 군입대 예정.]
[병역 의무를 회피하지 않는 연예인의 귀감?]
[팬들, 김도준의 결정에 아쉬움과 함께 환호.]
[일부에선 9년간이나 병상에 있었던 김도준이 병역을 치러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인터넷의 게시판마다 난리다.
- 오올! 김도준! 남자다잉!
- 아! 안돼요! 오빠! 군바리라니요!
- 상큼 발랄한 우리 주니 오빠가 군입대라니! 안돼애애애!
- 세계적인 스타도 피해 가지 못하는 성역. 그렇쥐! 김도준 쯤 되면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 한국인이라면 당연한 의무를 지는 건데,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 윗분, 말이 좀 그렇네요. 아는지 모르겠지만, 김도준 쯤 되면요, 조금만 짱구 굴리면 병역 회피하는 거 일도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간다잖아요. 그것도 자발적으로다가. 이 정도면
박수받을 만하지 않나요?
- 확실히 그렇죠. 안 그래도 갈수록 병역 비리 때문에 말들이 많은데, 김도준이 솔선수범을 보이면 다른 이들도 어지간해선 꼼수 부리기 어렵죠.
- 파이팅입니다! 형님!
- 근데, 군대에서도 노래할까나?
- 그건 어려울 걸요? 예전처럼 연예 사병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 흠, 고건 좀 아쉽네요.
참네, 한국 남자라면 다 가는 군대인데 뭘 그리 호들갑들인지.
한데 웃기는 건 외국에서도 꽤 격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 서프라이즈! 킴이 군인이 된다고?
- 한국 남자들은 그러는게 의무라잖아.
- 거기서 뭐 하는데? 설마 진짜 전투를 벌이는 건 아니겠지?
- 상상이 안 됨. 킴이 총 들고 싸우는 거.
- 근데 킴은 원래 평화주의자 아님?
- 아우, 답답아! 한국은 군 복무가 의무라잖아.
- 근데 내가 아는 한국 친구 중에는 병역 대상자인데도 안가는 사람 있던데?
- 뭐, 신의 아들인가 보죠.
- 응? 그건 뭐임? 손 오브 가드?
- ㅋㅋㅋ 그런 게 있어요.
한편으로는 희주한테 미안하기도 했다.
곧 결혼하는 새신부인데, 그녀만 남겨놓고 군대를 가야 하니까.
“미안해서 어쩌지?”
나름 한소리 들을 각오로 말했는데, 희주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복무기간이 줄어서 일 년밖에 안 되는데 뭘. 회사도 아직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서 바쁘기도 하고. 게다가 불안하지도 않으니 상관없어.”
“불안?”
희주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군화 거꾸로 신을 일 없으니까.”
너무 확신에 차서 단호하게 말하는 희주를 보니 어쩐지 장난기가 동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희주의 얼굴에 ‘어?’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야?”
어라?
어째 등줄기가 쭈뼛한 게…….
제길! 장난 한번 치려다가 된통 당하게 생겼네.
이러다가 울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에이, 그냥…….”
“김도준. 대답 잘해야 할 거야.”
큽. 더 이상 말했다간 본전도 못 찾겠다.
난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야, 너 날 어떻게 보고.”
씨익하고 웃는 걸 보니, 희주도 장난이었던 모양이다.
난 희주의 손을 살며시 잡고는 속삭였다.
“오히려 내가 걱정이다. 고무신…….”
찰싹!
내 손을 때리며 희주가 흘겨본다.
“그럴 일 없거든? 그리고 난 고무신 안 신어. 하이힐도 안 신는데 무슨. 그리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린 절대 안 헤어져.”
“응?”
미소와 함께 희주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우린 운명으로 묶인……흡!”
잽싸게 키스를 퍼부어 희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우, 오글거려.
이쯤에서 감동할 만도 한데, 이상하게 이쪽으론 면역이 없다.
한참 만에 입술을 떼어내며 얘기했다.
기습적인 키스에 살짝 몽롱한 눈빛이 된 희주를 감싸 안으며 얘기했다.
“그래. 얼른 다녀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걱정 마세요. 서방님을 철석같이 믿는 소녀는 일 년이고 10년이고 기다릴 수 있사옵니다.”
킁. 할 말이 없다.
실제로도 희주는 지난 9년을 나 하나만 바라보고 기다려주었으니까.
“뭐, 그 문제는 그렇다 치고. 자, 받아.”
한강변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레스토랑.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마음이 들어서 요새 들어 자주 오는 곳이었는데,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희주에게
내밀었다.
그게 뭐냐는 눈빛을 해 보이는 희주에게 눈짓으로 말했다.
열어보라고.
잠시 후, 그녀가 봉투 안에 든 것들을 보고는 눈을 홉떴다.
“……어째서?”
의아함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럴 수밖에.
“우리야 결혼하면 항상 같이 있을 텐데, 뭘. 그러니까 이번엔 가족들하고 지내. 할아버지 모시고 다녀와.”
내가 건넨 건 크루즈 여행권이었다.
희주네 식구들 숫자에 맞춰 준비한.
중요한 건 날짜였는데, 희주의 생일날을 끼고 앞뒤로 3일씩. 일주일간 지중해를 여행하는 상품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잘근거리던 희주가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고마워.”
“에이, 왜 그래? 우리 사이에.”
“응. 그래도 고마워.”
“참네. 사람 뿌듯하게시리.”
손가락으로 코끝을 문지르며 시선을 돌렸다.
창밖으론 봄날을 맞아 한껏 피어난 벚꽃들이 바람결에 흩날리며 꽃비를 나리고 있었다.
새삼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
며칠이 흐른 후 희주가 가족들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떠났다.
거참. 만날 보다가 안 봐서 그런가?
어째 가슴이 휑한 느낌이네.
쯧, 이래서야 군대나 다녀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들, 이 옷이 좋아 아니면 이 옷이 좋아?”
어머니께선 한창 패션쇼 중이시다.
보름 앞으로 다가온 결혼식 때 입으실 옷을 벌써부터 고르시느라 저러신다.
“어머니도 참. 제가 뭐 아나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잠들어 있었던 기간이 무려 9년이었다.
그 사이 유행은 수없이 바뀌고, 아직 감각을 따라잡지 못한 나로서는 내 앞가림하기도 벅차달까.
그런 마당에 어머니 옷을 어떻게 골라준단 말인가.
어머니께서도 별 기대 없이 물어보신 건지,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시고.
“이건 너무 화려하고, 그렇다고 이걸 입자니 너무 수수해서 좀 그러네.”
그때 TV로 뉴스를 보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한 말씀 하신다.
“이참에 한 벌 사지 그래?”
“어머, 이이도 참. 그럴 돈이 어디 있어요?”
어머니의 물음에 아버지 옆에서 소파에 몸을 기댄 채 TV를 보고 있던 형이 황당하다는 듯 어머닐 쳐다본다.
“우리 그렇게 가난한가? 도준이가 벌어놓은 돈도 그렇고, 지금도 앱을 통해서…….”
“그 돈이 엄마 돈이니? 아들 돈이지! 그리고 사람들이 기부한 돈으로 옷을 사라고?”
“에이, 엄마도 참. 뭘 또 그렇게 발끈해서……. 그럼 제가 한 벌 사드릴게요.”
“됐네요. 지금도 옷장이 터져나가려고 하는데 무슨.”
어머닌 형을 살짝 흘겨보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신다.
그러면서 별말 아니라는 듯 얘기하셨다.
“이 엄마는요. 김민준, 김도준. 두 아들의 엄마랍니다.”
응?
뭐지?
진짜 별 얘기 아닌데…….
갑자기 가슴속에서 뭔가 뭉클하고 올라온다.
“안 되겠다. 큰애야, 네가 보기엔 어떤 게 나은 거 같니?”
결국, 형수를 찾는 어머니셨다.
3월 중순.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