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외전> 잊고 있었다(1)
난데없이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베릴에게 불뚱거리기는 했지만, 그게 진심일 리는 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릴과 니콜 교수님이다.
당연히 기뻤다.
일찌감치 두 사람이 썸을 타고 있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9년이나 의식을 잃고 있다가 깨어난 뒤론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아니, 오히려 그때까지 레이크헬 멤버들 중에 누구 하나 결혼을 하지 않은 걸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데, 그들 두 사람이 결국 결혼한단다.
말할 것도 없이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싶었다.
희주는 니콜 교수님이 나이가 열 살이나 많은 걸 두고 다소 걱정하긴 했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나로서는 그게 뭐가 문제인지 알 길이 없었기에 그저 웃어넘겼을 뿐이다.
다만, 부럽긴 했다.
가족들과 친지, 그리고 지인들만 초대해 치르는 수수한 결혼식.
하아, 생각만으로도 좋지 않냐고.
그에 비해 난…….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고.”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결혼식이었다.
이미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아예 특집으로 다뤄서 나와 희주를 집중 조명한 기사들도 여럿이었다.
그런 마당에 조촐한 결혼식?
턱도 없다.
쯧, 한마디로 빼박인 거지.
아무튼, 베릴의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기에 나는 회사 식구들과 함께 곧바로 뉴욕으로 향했다.
“두 사람 중 누굴 닮았을까?”
비행기에 탑승한 후, 옆자리에 앉은 희주가 설레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묻고 있었다.
“흠, 베릴도 잘 생겼으니까 아빠를 닮아도 좋겠지만, 그래도 역시 니콜 교수님 닮았으면 좋겠네.”
“그런 말이 어딨어? 아기가 예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이왕이면 그렇다는 거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우리 애가 자길 닮았으면 좋겠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희주가 얼굴이 빨개져선 내 어깨를 때린다.
“모, 몰라.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고 그래.”
푹 숙인 채 어찌할 줄 모르는 희주를 바라보며 웃고 있을 때였다.
“아, 쫌! 그만 좀 해! 닭살 돋아서 못살겠네! 확 그냥 비행기 밖으로 던져버린다!”
뒤에서 들려오는 형의 목소리에 킥킥거렸다.
그 사이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끄러져 떠올랐다.
뉴욕을 향해서.
***
젠장!
여기서 부러워하면 안 되는데, 진짜 부럽다.
이게 딱 내가 꿈꾸던 결혼식인데…….
한차례 둘러본 저택은 신혼집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베릴 이 자식 이거, 그동안 많이 벌긴 벌었나 보네.
대지만 500평이다.
뭐, 미국에선 어지간한 부자들은 이보다 더 큰 부지에 집을 짓고는 하니까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살기엔 충분하다 못해 너무 넓은 게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말이 저택이지 정문을 지나치면 곧바로 주차장이 나오고, 건물로 이어지는 계단이 펼쳐진다.
위로 올라오면 야외풀장이 보이고, 그 뒤로 200평 남짓한 2층집이 서 있다.
그리고 뒤쪽으로는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는 정원이 있고.
내일 결혼식은 여기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방은 많았기에 하루 전인 오늘 들이닥친 초대 손님들을 다 수용하고도 남았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면서 당연한 수순인양 파티가 벌어졌다.
총각파티라고 하기엔 뭐하고, 그냥 전야제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호오! 이게 말로만 듣던 진짜 파티란 말이지!”
형의 말에 난 웃고 말았다.
“그럼 여태 했던 건 가짜 파티야?”
내가 묻자 형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저택에서 하는 파티를 말하는 거지. 왜 있잖아. 영화에 보면 나오는. 수영복을 입은 여자들이 풀장에서 물장구치고, 술이랑 피자에 마약…. 아, 이건 빼고. 아무튼, 그런 거
있잖아. 유진! 넌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레이크헬이 뻔질나게 한국을 드나들면서 형과는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제대로 짚었는데? 유진이야말로 민준이 말하는 파티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지.”
디알로가 낄낄거리며 얘기하자, 유진이 짜증을 냈다.
“왜 날 걸고넘어지는데? 그리고 민준. 네 딸이 널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뭐 느끼는 거 없어? 내가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네가 말한 파티는 여기서 벌어지지 않아.
왜? 베릴한테 바라지 말아야 할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그거거든. 그리고 말이야, 내가 하는 파티도 올 생각 마. 유부남은 절대 엄금이거든.”
말끝에 씨익 웃으며 유진이 소연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난 제수씨한테 미움받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거든. 오케이?”
“와아. 진짜! 니들 이러기야! 한국 올 때마다 이태원이며 명동할 것 없이 내가 너흴 데리고 다니며 얼마나 애썼는데! 설마 다 잊어버린 거야?”
“응. 다 잊었어. 우린 이제 새출발을 할 거거든.”
“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별거 아니야. 베릴이 결혼하는 걸 보니까, 좀 생각이 달라졌달까?”
유진이 어깨까지 들썩이며 얘기하는 게 농담만은 아닌 듯 보였다.
“무슨 소리야, 그게!”
민준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디알로가 다가와 어깨를 짚었다.
“생각해봐. 상상이나 했냐? 베릴이 결혼할 거라고?”
“음. 그건 아니지. 유진이라면 또 몰라도.”
“바로 그거야. 베릴이 결혼하는 건, 그러니까 음……. 우리가 보기엔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랑 같다는 거지.”
“응? 해는 원래 서쪽에서 뜨는 거 아닌가?”
“친구. 사소한 건 좀 넘어가자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늙어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 것만 같았던 베릴이 우리 아름다운 교수님을 꼬드겨서 결혼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것도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아이부터 만들고 말이지.”
“쯧. 얌전한 베릴이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쥐도 새도 모르게 부뚜막에 올라간 거죠.”
뭔가 묘하게 짜깁기한 속담을 씨부렁거리고 있는 제롬을 보다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아무래도 저 자식은 이제 한국어엔 도통한 모양이다.
하기야 안 그래도 한국의 문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내가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날 핑계로 한국을 드나들며 얼마나 주워들었을지 안 봐도 뻔하다.
게다가 재밌는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마루 누나가 가만 지켜만 봤을 리 없을 테고.
모르긴 몰라도 제롬과 누나는 꽤나 어울려 다니며 한국을 이 잡듯 들쑤셨겠지.
흠, 그렇게 생각하면 제롬은 마루 누나의 수제자인 셈인가?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 언제까지 풀장에서 서성이고 있을래? 예은이 까부러지기 일보 직전인 거 안 보여?”
풀장과 통하는 문이 열리며 마루 누나가 버럭 고함치고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형수 등에 업혀 있는 예은이가 눈을 감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자자, 일단 들어가자. 이제부터 시작인데 벌써부터 이럴 필요는 없지. 안 그래?”
“그렇지. 밤은 기니까.”
“좋아! 예비신랑이 술에 떡이 될 때까지 마시자!”
“그러다가 결혼식 파투나는 거 아니에요?”
“응? 그럼 네가 신랑 대리로 서면 되잖아. 크크크큭.”
농담에 농담으로 응수하며 집안으로 들어가는 레이크헬이었다.
***
헐! 농담인 줄 알았더니만.
이 자식들 진짜 장난 아니다.
기어코 베릴을 보내버렸다.
한국에서 배워온 폭탄주를 연거푸 들이붓더니, 내일 꽃단장하고 결혼식장 서야 할 예비신랑을 술떡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놈들은 밤이 새도록 부어라 마셔라 하며 온 집안에 있는 술병을 빈병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크으으.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제로오오오옴! 리-컨디셔어어어언!”
숙취해소 음료의 이름을 외쳐 부르는 디알로에게 제롬이 쪼르르 달려와 병뚜껑을 따고 있다.
“크아아아아! 역시, 술 마신 다음 날엔 이것만 한 게 없지!”
“흐흐흐. 그러니까요!”
회식 다음날 꼴통 부장과 회사 생활에 익숙하다 못해 닳고 닳은 대리의 대화를 보는 듯한 장면이 눈앞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와, 이 자식들 진짜…….
누가 보면 한국인인 줄 알겠다.
난 혀를 내두르며 몸을 일으키다가 비틀거렸다.
“많이 마셨나 봐?”
날 발견하고 다가온 희주가 걱정스럽게 묻고 있다.
“모르겠어. 새벽 세시까진 기억나는데…….”
두통 때문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제롬이 다가와 리-컨디션을 내민다.
완전 고맙다, 자식아.
달칵.
뚜껑을 따서 마셨지만, 두통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초췌한 몰골로 결혼식에 참석해야 했다.
***
조촐하고 수수한 결혼식?
과연 그럴까?
기자들과 방송관련자들만 들여보내지 않았을 뿐 결혼식에 참석한 인사들의 면면만 보자면 이보다 더 화려할 수는 없을 터다.
레이크헬 멤버들과 HS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밥 데일런과 폴 매카트넌을 비롯해 명성이 자자한 싱어들만 십여 명이다.
거기에 오프라와 티아라, 사이몬을 필두로 미국 연예계에서 난다긴다하는 이들도 대거 참석했다.
뿐인가.
캘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할리우드를 들었다 놨다 하는 배우들과 감독들도 하객으로 와 있었다.
누가 보면 결혼식이 아니라 연말 시상식쯤으로 착각할 정도다.
게다가 약속했던 대로 내가 가장 먼저 나서서 축가를 불러주었고, 뒤이어 레이크헬 멤버들 그리고 리노와 강나리가 노래를 불렀다.
당연한 얘기지만, 니콜 교수님의 제자들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그중에서도 벌써 활동 십 년 차에 접어든 사인조 혼성 클래식 밴드인 ‘더 포어’ 즉 크리스티나와 조안나 그리고 에단과
아즈마엘이 웨딩마치를 연주해주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결혼식이 아닐 수 없었다.
뭐, 덕분에 어젯밤 마신 술 때문에 아직까지 골골거리는 몇몇을 제외하곤 다시금 벌어진 결혼 피로연은 대성황이랄까. 간만에 진짜 제대로 된 파티가 벌어졌다며 유진이 신나서 여자들을
찾아 돌아다닐 정도니 더 이상 말해봐야 입만 아플 테니.
아무튼, 이렇게 해서 니콜 교수님과 베릴은 부부가 되었다.
나?
결혼사진을 찍을 때 니콜 교수님 쪽에 서야 할지 베릴 쪽에 서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힘들긴 했지만, 니콜 교수님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 잽싸게 그쪽으로 자리를 옮겨 자칫하면
맞닥뜨렸을지도 모를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베릴의 결혼식이 이 정도인데, 네 결혼식 땐 진짜 장난 아니겠다.”
형이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눈짓을 하는 쪽으로 시선을 던지니 희주가 보인다.
샤오린과 실비아 등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희주가 때마침 눈길을 돌리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곤 부케를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흠칫.
뭐지? 이 느낌은?
좋아야 하는데, 어쩐지 등골이 시리며 머리털이 쭈뼛 서는 걸까?
“크크크. 자식이! 그런 표정 지으면 되겠냐? 얼른 손부터 흔들어라. 그러다 들킬라.”
형의 말에 나도 모르게 애써 웃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제 느낌이 오냐?”
“뭐, 뭐가?”
여전히 희주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되묻자, 형이 키득거린다.
“아직 모르겠다 이거지?”
형이 입가에 비웃음을 매단 채 돌아섰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그 느낌이 잊지 마라. 그게 바로 목줄이 점점 죄어오는 거란다.”
흠……. 왠지 싸한데?
쯧, 이제 와서 뭘.
그래, 행복할 거다.
분명…….
탁!
그때, 누군가 내 등을 쳤고 난 화들짝 놀라서 콜록거릴 수밖에 없었다.
“여어, 브라더.”
“아, 형.”
다름 아닌 준영이 형이었다.
“왜 그렇게 다 죽어가는 표정이야?”
“……티 나요?”
“얀마. 나 노준영이야, 노준영. 너랑 한두 해 알고 지낸 것도 아니고. 너 데뷔할 때부터 쭉 지켜봐 온 나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왜 그래? 뭔 일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대답을 피하며 희주 쪽을 힐끗거리자, 준영이 형이 픽하고 웃었다.
“난 또 뭐라고. 괜찮아 인마. 결혼이라는 게 누구는 무덤이네 마네 하지만, 그거 다 배 아파서 하는 소리야. 이런 말도 있잖냐.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한다면, 하고서 후회하는
게 낫다는.”
참네, 지금 그걸 격려 아니 위로라고 하는 건지.
“그래도 네가 그러는 거 보니까, 막 인간미 느껴져서 좋네. 크크큭. 김도준도 사람은 사람인가 보다 결혼식을 앞두고 초조해하는 걸 보니.”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요.”
“그래? 그럼 그렇다 치고.”
준영이 형이 실실 웃으며 내 어깨를 치는 게 어째 놀림받는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는 걸 애써 참고 있을 때였다.
“근데, 너 군대는 어쩌냐?”
어? 군대?
갑작스러운 얘기에 난 눈을 치뜨고 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준영이 형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너 설마……. 생각도 못한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