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갓싱어-247화 (247/260)

#247. <외전> 그와 그녀의 사정 II(2)

언제나 그렇듯 대화는 가정사를 비롯해 신변잡기적인 얘기로 시작되었다.

물론 말하는 쪽은 대부분 니콜의 아버지 쪽이었다.

“보기도 많이 보고, 얘기도 많이 들었소만 이렇게 직접 보니 신기할 따름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아, 저 역시 레이크헬의 팬입니다. 하하하. 지금은 이렇게 나이를 먹어 흰머리가 날 정도가 되어버렸지만, 한때는 로큰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했었죠.”

이 집안의 장남이면서 니콜의 큰오빠이기도 한 펠로는 웃으며 거들고 있었다.

“그러셨군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이 방에 들어오니 마음이 편해진 걸까.

베릴은 평소와 다름없이 짧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솔직히 요즘 음악들은 우리 때와는 감성이 달라서 그런가 듣기가 영 거북한 것도 사실이죠. 새로 데뷔하는 싱어들하곤 뭔가 교감하기 어렵다고나 할까. 레이크헬처럼 정통 락의 계보를

잇는 밴드들이 좀 더 나와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진심인 모양이다.

펠로는 눈을 반짝이면서 빠르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만큼 음악도 거기에 맞춰 변화할 수밖에 없는 거겠죠.”

베릴의 얘기에 펠로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또다시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니콜의 아버지인 월라스의 얘기에 막혀버렸다.

“그래, 텍사스 주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부친께선 어떤 일은 하시는지?”

니콜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찰나였다.

베릴이 그녀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아버진 트랙터를 파는 일을 하셨습니다. 제가 열여섯 살 때 돌아가셨고요. 빗길에 차가 미끄러지며 뒤집히는 바람에……. 그때, 어머니와 여동생도 함께…….”

“큼. 미안하오.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아닙니다. 다 지난 일인 걸요.”

베릴은 담담한 어조였다.

실제로도 이제는 그때처럼 가슴이 아픈 것도 아니었고.

뭐, 당시에는 가족들 중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외로움에 방황하기도 했지만.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어 있던 터라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느라 1박2일로 캠핑을 떠난 가족들을 따라나서지 않은 게 그렇게 후회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론 줄곧 켄터키 주에 있는 외할아버지댁에서 지냈습니다. 그 무렵 음악을 시작했고요.”

“아 그러셨군요.”

어색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니콜의 어머니가 말했다.

“지금쯤이면 준비가 끝났을 거 같은데, 식당으로 내려가시죠. 칠면조를 준비했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좋아합니다.”

“다행이군요. 자, 그럼 갑시다. 괜히 늦장을 부리다간 음식이 식는 수가 있으니. 아, 술은 좀 하시오?”

“남들만큼 합니다.”

“잘됐군요. 아끼던 술이 있는데, 함께 마십시다. 마음에 들 거요.”

다시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된 채 방을 나섰다.

모두 니콜의 어머니인 레니아의 기지 덕분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니콜이 일어나 어머니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는 모습이 보였다.

베릴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니콜의 가족들과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

식사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니콜의 가족들은 시종일관 유머러스한 말들로 대화를 이어갔고, 그 덕분에 베릴은 생각했던 것보다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베릴은 자신이 이 가족의 일원이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로서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니콜이 집을 뛰쳐나와야 했던 이유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아버지와 연을 끊었던 걸까.

술을 곁들인 식사자리였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분위기는 더욱더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베릴의 머릿속은 점차 복잡해졌고.

그렇게 베릴의 마음속에 의아함이 커져만 가고 있을 때였다.

“큼. 초면에 이런 말이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니콜의 아버지인 월라스가 매우 조심스럽게 운을 떼고 있었다.

베릴은 말없이 월라스를 바라보며 듣고만 있었다.

“니콜이 자네를 여기까지 데려온 걸 보면, 아무래도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것 같진 않은데.”

긍정의 표시로 베릴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자, 월라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금 얘기를 이어갔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오래전에 내가 딸애에게 큰 실수를 했다네.”

“…….”

“우리 집안과 가깝게 지내는 가문과 혼약을 맺는 과정에서 니콜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거지. 니콜, 그때는 그게 진정으로 널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지 못내 후회가 되는구나. 늦었지만 아비가 사과하고 싶은데, 받아주겠니?”

니콜은 고개를 숙인 채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어깨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베릴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니콜의 눈에 물기가 한가득 어려 있을 것임을.

그는 손을 가만히 뻗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니콜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러자, 니콜의 떨림이 점차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멈추었다.

그러고 나서야 니콜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이미 지나간 일인걸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입술을 한차례 짓씹고는 말을 이어갔다.

“저라고 후회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저 역시 알고는 있었으니까요. 제가 남들과 달리 뭐하나 부족하지 않은 유복한 집안 덕분에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고 살았던 만큼 제게도 그에

합당한 의무가 있다는 것 정도는요. 그래서 가문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약혼하는 것까진 참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아, 아마 전 그때로 돌아가도 또 똑같이

행동할 거예요.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한평생을 살라는 건 제겐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럼에도, 후회해요. 그때 좀 더 제 의견을 말하지 못했던 것을. 그랬더라면, 어쩌면

아버지께선…….”

감정이 북받치는지, 목소리는 어느새 물기가 어려 있었고 그나마도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던 베릴이 니콜의 손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자, 니콜이 베릴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젠 원망하는 마음보단 체념하는 마음이 더 크다고 할까요. 한번 지나간 일은 더 이상 돌이 켤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오지 않을 수 없었어요.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이 사람보다 전 나이가 많아요. 이미 이룰 것도 다 이룬 남자라서, 제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어요. 오랜 시간 그의 곁을 맴돌며 망설인 것도 그

때문이고요. 예. 맞아요. 짐작하시겠지만, 그를 키워주시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일가친척 하나 없이 외롭게 살아온 그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되어 베릴을 쳐다보던 니콜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아버지인 월라스를 바라보았다.

“아빠, 이이를 가족으로 받아주실 수 있나요?”

월라스를 비롯해 가족 모두가 니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어머니인 레니아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월라스는 얘기했다.

딸인 니콜이 아닌 베릴을 보면서.

“자넬, 아들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나?”

베릴이 대답했다.

“맹세컨대, 가족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니콜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보며 베릴은 그녀를 안아주었다.

베릴에게 가족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

니콜과 베릴이 떠나고 난 뒤, 서재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월라스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돌아보니,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아내다.

가만히 다가온 레니아가 월라스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월라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해.”

그는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내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어야 하는데……. 두려웠거든. 니콜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딸애를 잃고 싶지 않았어.”

“알아요. 당신 마음.”

레니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월라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남자인 거 같아요.”

“그래. 니콜이 날 많이 닮은 거겠지. 당신만큼이나 좋은 사람을 데려온 걸 보면.”

레니아는 픽하고 웃으며 월라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알면 잘해요.”

말없이 그저 웃고만 있는 월라스였지만, 그의 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레니아였다.

그녀는 방금까지 지어 보이던 안쓰럽고 서글퍼 보이는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니콜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 거야. 베릴은……. 들을 줄 아는 남자니까.”

많은 것이 함축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레니아는 알아들었다.

세상의 반은 남자고, 그중 절반 이상은 적어도 집에서만큼은 대접받고 싶어한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여자 입장에서 보자면 때때로 그 점이 삶을 고달프게 만들곤 한다.

왜냐면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은 의례 자신을 먼저 내세우게 마련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에 앞서 자신의 입장부터 말하는 법이니까.

말이 쉽지, 다른 이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이미 반생을 넘어 황혼에 접어들고 있는 레니아가 모를 리 없었다.

“예. 그는……. 고집 세고, 예민한 성격의 니콜에겐 더없이 훌륭한 배필이죠.”

“후우. 아쉽군.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좀 더 일찍 만나볼 것을.”

“베릴을요?”

레니아의 질문에 월라스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둘 다.”

“호호호.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이제부터라도 자주 만나면 될 거에요. 가족으로서요.”

“그래, 가족으로서…….”

노년에 이른 부부가 정답게 서서 창밖으로 던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이미 니콜과 베릴이 떠나고 없는 텅 빈 정원을.

***

도준은 황당한 전화를 받아야 했다.

“뭐야? 꼭두새벽부터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런 게, 뉴욕과의 시차를 감안하면 저쪽은 오후쯤 되었을 터다.

하지만, 이쪽은 아침 아니 새벽 여섯 시를 갓 넘긴 시간. 잠에서 깨운 것도 모자라 한다는 소리가 갑자기 결혼하겠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 이미 동네방네 결혼하겠다고 발표해놨는데, 네가 먼저 결혼을 해버리면 난 뭐가 돼? 와아, 진짜! 새치기할 게 없어서 결혼식을…….”

- 미안하게 됐다. 한데, 어쩔 수가 없다. 니콜이 아이를 가졌거든.

“아, 아, 아이?”

한숨을 푹 내쉰 도준이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뭐야? 결혼식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마저 먼저……. 후우, 그래 이 자식아! 너 잘났다. 혼자 다 해먹어라!”

툴툴거리던 도준이 말미에 덧붙였다.

“행복하냐?”

- 응.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린 도준이 갑자기 정색하며 협박한다.

“스승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라도 보이면, 죽을 줄 알아!”

- 명심하지.

그제야 도준의 입에서 나왔다.

“니콜 교수님……. 부탁하마. 행복해라.”

축하한다는 얘기가.

이로써 도준과 희주의 결혼식에 앞서 니콜 교수와 베릴의 결혼식이 먼저 치러지게 되었다.

한창 꽃이 피기 시작하는 3월 중순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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