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외전> 그와 그녀의 사정 II(1)
늘 그렇듯 사람들은 뜻밖의 이벤트에 환호한다.
더욱이 그게 로맨틱한 사랑 얘기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당연한 일이지만, 베릴이 니콜에게 청혼한 사건은 채 한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인터넷에 올라갔고, 그로부터 하루가 지났을 땐 전 세계로 퍼져 나간 뒤였다.
몇몇 여자들이 아쉬운 탄식을 흘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축복해주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 진짜 이러기야?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따지고 드는 도준 때문에 베릴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심정이 되고 말았다.
- 축하해. 축하한다고! 진짜로 축하한단 말이야!
아마 세상 어디도 저렇게 버럭버럭 화를 내면서 축하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사과는 베릴이 하고 있었다.
- 야이, 씨! 너 지금 여기 분위기 어떤지 모르지?
잠시 머뭇거리던 베릴이 걱정스레 물었다.
“희주가 화내?”
- 하아. 희주를 몰라?
“그럼 뭐가 문제야?”
- 예은이 때문에 그러지. 진짜 말도 마라. 오늘 아침부터 너랑 비교하면서 어떻게 남자가 길거리에서 반지를 주며 프러포즈를 할 수 있느냐며 떽떽거리는데……. 자긴 나중에 커서 그런
식으로 청혼하는 남자랑은 절대로 결혼 안 한다고 하더라.
베릴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겨우 10살이 된 아이한테 휘둘리고 있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났던 것이다.
“틀린 소리도 아닌 거 같은데, 뭘.”
- 어? 너까지 이러기야? 하아, 아무튼 너 때문에 나 지금 집에서 쫓겨날 판이다. 어머니도 어떻게 아셨는지 잔소리 장난 아니라고.
“어머님도 여자니까.”
- 자기 일 아니라 이거군. 좋아. 내가 네 결혼식에서 축가 불러주나 봐라.
그때였다.
언제 왔는지 제롬이 한마디 툭 던지고 지나간다.
“밴댕이.”
- 헐. 방금 제롬이지?
“더이상 용건 없으면 이만 끊어. 우리 앨범 작업 해야 해.”
- 쯧, 따지려고 전화했다가 졸지에 속 좁은 놈만 됐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준은 웃으면서 다시 한 번 축하한다고 말하고 끊었다.
아마 면피용으로 전화한 걸 테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서 들들 볶을 테니까.
하기야 같은 남자인 베릴이 봐도 더럽게 멋없는 프러포즈였다. 도준이 반지를 건넨 방식은.
진짜 희주니까 웃으며 넘어간 거지, 다른 여자 같았으면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닥에 내던지지 않았을까?
물론 니콜은 그러지 않겠지만.
“한국에 갈 날도 머지 않았네.”
베릴은 도준을 만날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계속해서 좋은 일만 있는 거 같아 기분이 좋다.
계속해서 요즘만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은 형편없이 깨어졌다.
오후 늦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
긴장을 하지 않으려 해도 그게 잘 되질 않는 베릴이었다.
오히려 운전대를 잡은 니콜 쪽이 훨씬 더 침착해 보일 정도였다.
“후우.”
벌써 몇 번째 내쉬는 한숨인지 모른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같은 짓을 반복하다 보니 니콜도 이미 눈치챈듯하다.
오죽했으면 이렇게 말했을까.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베릴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하다.
기껏해야 니콜의 집안 어른들한테 인사를 하러 가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잔뜩 긴장해서 안절부절못하다니.
평소 차분하고 조용한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자신이 소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아냐. 좀 긴장했을 뿐이야.”
베릴은 허세라도 부려볼까 했지만 역시 그건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니콜의 반응이 뜻밖이다.
“풋.”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그녀였다.
그러더니 배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얘기했다.
“아가. 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껴지니? 혹시라도 결혼 허락을 못 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 귀엽지? 호호호. 꼭 주인만 바라보며 어찌할 줄 모르는 리트리버 같다,
그치?”
베릴은 씁쓸하게 웃고는 걱정스러워했다.
“운전 조심해.”
“흥. 그러게 누가 그 나이 먹도록 운전도 배우지 말랬어? 참네. 자기 와이프 될 사람, 그것도 임신부한테 운전을 시키는 예비신랑이 어디 있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기껏 한다는 말이,
“그러게, 운전사 고용하자고 했잖아.”
“어머, 여기가 한국인 줄 알아? 대리운전이면 몰라도 겨우 하루 일해주는 운전기사가 어딨어? 걱정 마. 이래 봬도 내가 30년 무사고야. 도준이 태어났을 때부터 운전했으니까, 사고
내거나 하진 않아.”
“그래도 아기가 막 들어선 참인데, 조심해야지.”
“호호호. 그럼 갈 때는 자기가 운전하던가.”
“끙.”
앓는 소리를 내는 베릴. 그의 머릿속에 어제 오후 일이 떠올랐다.
갑자기 니콜에게서 전화가 왔고, 난데없이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에 나갔더니만 결정하란다.
친구들과 함께 둘이서만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릴지, 아니면 집안 식구들 다 초대해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릴지를.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자기 생각엔 그냥 식구들 없이 결혼하는 게 나을 거 같단다.
그녀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피아니스트를 그만두게 된 것도, 그 후에 어렵사리 줄리아드에 교수로 임용되는 과정에서 방해를 한 것도 그녀의 아버지였다고 들었다.
그 탓에 벌써 10년이 넘도록 식구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내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전부 베릴 자신을 위해서임을 왜 모르겠는가.
진짜 약혼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집안 식구들에게 당당히 인정받기를 바라는 걸 테다.
당연히 고민하고 말고 할 일이 아니었다.
이참에 식구들하고 화해하면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의 가족들을 만나보겠다는 심정으로 뉴욕을 떠나온 건데…….
“조금만 참아요. 거의 다 왔으니까.”
“생각보다 빨리 왔네.”
“코네티컷이니까.”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동네가 바로 코네티컷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빠르다.
아마도 그건, 베릴이 계속해서 긴장해 있던 탓일 터였다.
반면 운전대를 잡은 채 전방을 응시하는 니콜의 눈빛에선 쓸쓸함이 느껴졌다.
베릴로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꼬옥.
그녀의 손을 살며시 움켜쥐며 웃어주는 베릴이었다.
그러자, 니콜의 얼굴에 다시금 화사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
규모가 큰 저택이었다.
한눈에 봐도 이 동네에서 가장 크지 않을까 싶었다.
문앞에서 차를 세운 채 기다리는 동안, 베릴은 궁금하던 것을 떠올렸다.
“여기서 계속 자란 거야?”
니콜이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눈빛을 띠면서.
“언젠가 말한 적 있었지? 우리 집안이 아일랜드계라고.”
1800년대부터 시작된 이주는 1850년경에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1900년경에 다시 한 번 절정기를 맞는데, 이때가 최대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최대 채권국이 된 미국은 더 이상 유럽으로부터 대량의 이민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잡다한 국적과 출신으로 이루어진 이민 사회가 아닌 미국인이라는 국민의식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 정부는 1924년에 이민법을 제정하고 연간 이민자 총수를 제한했다.
아일랜드에서는 비교적 초창기인 19세기 중반, 즉 1840년에서 60년 사이 거의 300만 명에 이르는 이민자가 유입되었는데, 아마 니콜의 선조 역시 그때 이주를 해온 것 같았다.
“오랜……만이겠지?”
베릴이 조심스럽게 묻자, 니콜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저택 안쪽을 살폈다.
그때, 철문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준비됐어?”
니콜이 장난스럽게 물었고, 이번에는 베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아빠가 웃으면서 나올 수 있게 기도해주렴.”
배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얘기한 후, 니콜이 차를 출발시켰다.
***
저택이 넓어서 그런지 정문을 통과한 뒤에도 차는 한참을 더 달려야 했다.
이제 막 봄에 접어든 시기라는 걸 알려주려는 듯 차창 밖으로는 정원수들이 푸른 잎이 달린 가지를 늘어뜨린 채 스쳐 갔다.
한 백여 년쯤 전에는 마차가 달리지 않았을까 싶은 길을 5분 정도 달린 후에야 차가 멈춰 섰을 때, 이미 건물 앞에는 한 사람이 나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말쑥한 정장차림의 노신사였는데, 니콜이 내리며 반색을 했다.
“알프레드!”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가벼운 포옹을 하며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가움을 표시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베릴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10년이 넘도록 만나지 못했을 거다.
그런데도 저토록 반가워 어찌할 줄 모르는 걸 보니, 어지간히 친했던가 보다.
하기야 니콜의 말대로라면 알프레드는 거의 한평생을 이곳에서 집사로 지내왔으니, 사실상 가족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들어가시지요.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프레드의 말에 니콜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그녀는 애써 웃음 지으며 베릴을 이끌었다.
물론 그전에 알프레드에게 베릴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베릴은 말할 것도 없고 알프레드 역시 말이 긴 편이 아닌지라 인사는 간단하게 마무리되었다.
“2층에 계십니다. 올라가시지요.”
알프레드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자, 한창 일하던 이들이 니콜과 베릴을 보고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 시간 손님접대를 해와서인지 그들의 모습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베릴은 과연 명문가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니콜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알프레드가 안내하는 2층의 한곳, 영화에서나 나올만한 제법 멋들어지고 큰 문앞에 이르렀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알프레드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곤 돌아서자, 니콜이 베릴을 한차례 바라보았고 베릴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니콜이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표정을 애써 풀곤 옅게 웃더니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나서야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문 손잡이를 잡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소리 없이 열리며 점차 넓혀가는 문틈 사이로 방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노년의 남자,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노부인, 그리고 양옆으로 보이는 두 명의 중년 남자들. 그들이 누구인지 베릴은 대충 감이 왔다.
니콜에겐 세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오빠 둘에 여동생 하나다.
그중 여동생은 현재 캘리포니아의 베벌리 힐스에 살고 있다고 하니, 아마도 오늘 여기엔 오지 못한 모양이다.
하긴, 워낙 급하게 결정하고 만나는 터라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어서 오게. 벨포드 가에 온 걸 환영하네.”
들어서자마자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네오는 노신사의 손을 베릴은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순간 베릴은 알아차렸다.
자신이 지금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는지.
노신사, 즉 니콜의 아버지인 월라스 벨포드와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되느냐에 따라 자신이 니콜과 결혼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니콜과 그녀의 아버지 간에 쌓인 채 지난 10여 년간 방치되어 있던 해묵은 감정이 해소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레니아에요.”
“반갑소. 펠로요.”
“제레미라 합니다.”
나머지 세 사람의 인사를 받으며 베릴은 떠올렸다.
언젠가 도준이 했던 얘기를.
그의 아버지가 장인인 최 회장에게 사위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눈이 오던 날 대문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고 했던가.
그때는 몰랐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알 것 같았다.
어째서 도준의 아버지가 그랬는지를.
누군가 베릴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었으니까.
베릴에게 있어서 니콜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어쩌면 자기 자신보다도 더.
다시 한 번 니콜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베릴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베릴입니다.”
고개를 쳐드는 그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