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 <외전> 그와 그녀의 사정 I(4)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베릴은 거실에 모여 앉아 있는 레이크헬 멤버들을 분명히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인사조차 없이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어? 저 자식 왜 저래?”
디알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하자, 언제나처럼 제롬이 받아쳤다.
“베릴이잖아.”
그걸로 모두가 납득해버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디알로로선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제롬. 탐정 놀이는 이제 끝난 거냐?”
“언제적 얘기를 해?”
따지고 보면 한 달도 넘은 일이었다.
베릴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고 여겼었고, 그 때문에 디알로를 끌고 다니며 베릴을 미행하던 것도.
니콜 교수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됐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시들해졌달까.
썸타는 시기라면 또 모를까.
이미 그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인 이상 더 이상 파고드는 것도 의미 없는 일. 궁금해할 이유도 없지만, 그 이상으로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실례다.
아무리 친하다고 한들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하니까.
그게 오랫동안 함께 밴드 생활을 하면서도 큰 불화가 없었던 까닭이기도 하고.
“그야 그렇긴 하지만, 궁금한 거 아니었어?”
“뭐가?”
“두 사람의 관계가 언제까지 갈지.”
“그게 왜 궁금해? 나하곤 손톱만큼도 상관없는, 그야말로 두 사람 문제인데.”
“응? 그럼, 베릴이 니콜 교수랑 헤어져도 상관없다는 말이야?”
“에이, 누가 그렇대? 당연히 잘 지냈으면 좋지. 하지만, 그건 당사자들만 아는 일 아니겠어? 두 사람이 결혼을 하든 이대로 연애만 하든, 것도 아니면 당장 내일 헤어지든 간에.”
“어라? 어째 말이 좀 그렇다? 나만 그렇게 들리는지 모르겠는데, 네 말만 들어선 베릴하고 니콜 교수는 결혼까지 가긴 어렵다는 말로 들리는데?”
디알로의 얘기에 콜린과 유진까지 관심이 생겼는지, 제롬의 얼굴과 베릴의 방문을 번갈아 쳐다본다.
제롬은 피식하고 웃고는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쯧쯧쯧. 다들 잊고 있는 모양인데. 결혼이라는 제도는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행복을 보장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라고.”
“아우, 씨! 자꾸 어렵게 얘기할래?”
“나참. 진짜 몰라서들 이래?”
아무도 대꾸하지 못하자, 제롬이 오히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와아. 이 아저씨들 봐. 지금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레이크헬 멤버들을 둘러보며 제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마치 학원 강사처럼 손짓을 크게 해가며 설명했다.
“브라이언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이혼했잖아? 덕분에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그 이유가 뭔데? 평범하지 않기 때문 아냐? 그럼 우린? 말할 필요도 없지. 평범? 그게 뭐지? 알지도
못하지. 왜? 우리는 평범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아까도 말했잖아? 결혼이라는 건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에요. 우리 같은 사람들한텐 과분한
거라니까.”
한참을 듣고 있던 콜린이 결국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극단적인 거 같은데? 그렇게 따지면 도준도 평범하진 않지. 그런데 결혼하잖아.”
“맞아. 도준이야말로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지 않아? 아마 우리 중에서 가장 특별할 걸?”
“에이, 그건 아니지. 재능이 특별하다는 거지, 사람만 놓고 보면 평범 그 자체지. 아, 물론 지난 9년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건 아무나 체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
멀리 볼 게 뭐 있어. 유진! 한 여자로 만족하며 펴어어엉생을 살 자신이 있어?”
잠시 생각해보던 유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왠지 설득력이 있는데?”
“아, 설득력이 있는 게 아니라 이게 팩트라니까 그러네.”
“흠, 아무튼 네 생각엔 그러니까 베릴도 곧 깨질 거다?”
“누가 그렇대? 결혼하기엔 장벽이 너무 많다는 거지.”
“장벽이라…….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긴. 니콜 교수의 집안을 생각하면…….”
“그에 비해 베릴은 너무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왔고 말이야.”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세 사람을 보면서 제롬은 픽하고 웃고 말았다.
자신의 주장이 먹히자, 의기양양해진 제롬은 해선 안 될 말까지 해버렸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오늘도 분명 베릴은 힘든 하루를 보내고 들어온 게 분명해.”
“힘든 하루?”
“알면서 그래. 여자는요, 남자랑 다른 생물인 거에요. 겉모습도 다르지만, 속은 더더욱 다르니까. 여기……. 응? 여기가 완전 다르다고.”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던 제롬이 베릴의 방 쪽으로 등을 돌렸다.
“어? 너 어디 가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우정을 확인하겠어? 힘들 땐 역시 친구잖아?”
대답 대신 의문형으로 말을 던진 제롬이 베릴의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
한참이나 망설이던 베릴이 힘겹게 사정을 털어놓았을 때, 제롬의 표정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멘탈이 탈탈 털린 얼굴이랄까.
그럴 만도 하다.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니콜 교수가 임신을 했고 베릴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다는 거네?”
제롬의 얘기에 한숨을 내쉰 베릴이 한층 더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책임을 지고 싶은 게 아니라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였는데?”
“그게 그거 아닌가?”
“하아. 앞뒤가 바뀐 거 같긴 한데, 일단 넘어가자. 어쨌든 제롬, 네 생각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하던 제롬이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가 보기엔 좀 무모한 도전 같긴 하네. 뭐, 말릴 수 있으면 말려보겠는데, 보아하니 말려질 거 같지도 않고……. 우선은 상대방의 의사부터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을까? 니콜
교수님은 결혼할 의향이 있대?”
머뭇거리던 베릴이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 다만…….”
베릴은 떠올렸다.
니콜 교수와 함께 병원에 가서 초음파 사진을 보는 순간, 느꼈던 그 감정들을.
떨리고, 설레고, 행복했다.
검은 바탕에 손톱만 하게 보이는 아기는 아직 하나의 생명이라고 하기엔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걸 보는 순간, 베릴은 벅찬 감정을 누를 수 없었다.
자신과 니콜의 아이.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기적. 그가 크리스천이라서가 아니라 눈앞에서 확인하는 찰나 온몸이 떨려서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환희에 젖었던 것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감정을 다시 한 번 느끼며 베릴이 얘기했다.
“함께 하고 싶어. 아니 곁에 있을 거야. 그녀와 그 아이 옆에.”
담담하면서도, 진솔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얘기에 제롬은 더 이상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뭘 고민하는 거야?”
“…….”
“간단하잖아. 청혼해.”
너무 쉽게 얘기하는 제롬을 한차례 쳐다본 후 베릴이 콧등을 문질렀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롬이 되물은 것도 그때였다.
“뭐가 문젠데? 청혼하고, 승낙하면 결혼한다. 그럼 되는 거잖아.”
“후우. 청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이러는 거지.”
“응? 그냥 반지 하나 주면서…….”
“그래도 될까?”
심각한 눈빛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베릴. 제롬은 흠칫하고 말았다.
“그, 그래도 되지 않을까? 아, 아, 아닌가? 아우씨! 그런 걸 해봤어야 알지.”
머리를 북북 긁던 제롬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거야!”
“……?”
기대감 가득한 눈길이 부담스러웠지만, 제롬은 망설이지 않았다.
“베릴이 잘하는 걸 해!”
“내……가 잘하는 거?”
되묻는 베릴에게 제롬이 씨익하고 웃어 보였다.
***
3월은 미묘한 계절이다.
겨울은 아니지만, 여전히 추운 날이 많았고 낮과 밤 사이에 기온 차가 심해서 외출할 때면 옷을 입기가 쉽지 않았다.
바람이 많이 불고 기온이 내려가는 저녁을 생각하면 외투를 걸치는 게 맞겠지만,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한낮에는 외투가 거추장스럽기 마련. 다른 곳에 비해 특히 추운 뉴욕에 살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편한 니콜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땅거미가 질 무렵 약속시간을 정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역시나 사방이 뻥 뚫린 광장은 추웠다.
하필이면 이런 장소로 나오라고 한 건지 베릴이 살짝 원망스러워졌지만, 니콜은 메디슨 스퀘어 광장 한가운데 서서 외투 깃을 여미며 베릴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광장 곳곳에 서 있는 빌딩들, 그곳에 매달려 있는 전광판이 한순간 바뀌었다.
- 띠리리링……띠링…띵.
기타와 손을 비춘 장면이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어디선가 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뭔가 싶어서 시선을 들어 전광판을 바라보던 니콜의 눈이 빛난 것도 그때였다.
카메라가 멀어지며 화면 속의 기타 크기가 줄어들고, 이내 기타를 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광장에 있던 이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남자는 다름 아닌 베릴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팬이 아니더라도 미국인치고 레이크헬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콘서트 광고인가?”
“글쎄. 앨범 광고 아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니콜은 돌처럼 굳은 채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전광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베릴의 눈빛이…….
두근.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니콜은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전광판에선 베릴이 기타를 치고 있었고, 어디선가 기타 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베릴이 노래를 시작했다.
- I never imagined it.
Cause I was stupid.
I just could not admit it.
But I know now
Love you.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어.
내가 어리석어서였는지 몰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젠 알아.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니콜은 베릴의 노래를 듣고 있자니, 갑자기 코끝이 시려 왔다.
도준만큼 잘 부르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허스키한 음색의 노래는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담담한 느낌에 어딘지 모르게 가슴 깊이 스며드는 목소리가 니콜은 좋기만 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호감만큼이나,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저 남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또 친구가 아닌 연인이 되기를 얼마나 기다려왔는지를.
그런 그가 이젠 만인이 보는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은 그저 콘서트 광고니, 앨범 홍보니 하면서 즐겁게 듣고 있었지만, 니콜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건 청혼가다.
오로지 자신에게 구애를 하기 위해 부르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노래. 그리고 단 한 명의 남자……. 그가 눈앞에 있었다.
울컥한 마음에 니콜이 눈을 크게 뜨며 어떻게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려던 때였다.
노랫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함성이 일었다.
그 소리를 향해 돌아선 니콜은 왈칵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트레일러 차량을 개조해 만든 공연용 차량이 광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 You know, I'm not a good guy.
Would you stay with me anyway?
알고 있겠지만, 난 그리 괜찮은 남자가 아냐.
그래도 함께 해줄래?
베릴이 자신을 보며 노래하고 있었다.
기타를 치면서.
물론 언제나처럼 그의 뒤쪽으로는 나머지 레이크헬 멤버들도 있었지만, 니콜의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눈물이 흘러내려 베릴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베릴이 차량에서 뛰어내리고 있다는 걸.
여전히 노래를 부르면서.
그런 채로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베릴. 그가 마침내 니콜 앞에 이르렀다.
감미로운 선율과 함께 더없이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헤집었다.
- Please marry me.
Love you.
Love you.
부디 나랑 결혼해줘.
사랑해.
사랑해.
바로 앞에서 무릎을 꿇는 순간, 광장에 있던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릴은 기타에서 손을 떼며 마지막 소절을 불렀다.
“I Love you.”
달칵.
그러곤 품에서 꺼낸 반지를 내밀었다.
니콜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와락.
그녀는 미친 듯이 몸을 던져 베릴에게 안겨들었기 때문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메디슨 스퀘어 광장을 뒤흔들었다.